두 명의 프랑스인이 모험 삼아 아프리카의 사막을 횡단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많은 분이 만류합니다. 그런데도 사막 횡단을 출발하였습니다. 물도 제대로 없고 사람도 없는 곳에다 문화생활도 누릴 수 없으니 사막 여행은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일정을 잘 마쳤습니다. 사막 여행을 잘 마친 두 사람은 이 어려운 일을 잘 마쳤으니 기념할 만한 것을 남기는 것이 좋겠다고 서로 의견 일치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남겨 기념할 것인가 하는 데서 서로 의견이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우리 두 사람 이름으로 기념비를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기념비도 좋지만, 우리가 사막을 여행하는 동안 물이 아주 귀해서 고생을 많이 했으니 다른 여행객을 위해 우물을 하나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다 마지막에는 그 두 가지를 다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막에 기념비와 우물을 세웠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난 뒤 두 사람은 다시 아프리카의 그 사막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반겨주는 것은 기념비가 아니라 우물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불어온 사막의 거센 모래바람에 기념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반면 우물은 많은 여행객의 목을 적셔주며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기념비가 있습니다. 역사 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도 있지만 별로 의미 없는 무가치한 것도 있습니다. 역사는 대부분 당대보다 시간이 흐른 다음 평가하기 때문에 당대에 기념비를 세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더구나 자신을 위해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웬만해서는 피해야 합니다. 자칫 조롱거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울 왕이 자기 손으로 자기를 위해서 기념비를 세운 일이 나옵니다. 자화자찬의 성격인데 과연 잘한 일이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사울의 기념비 정말 합당합니까?」 로 정했습니다.
1. 사울은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사람이 기념비를 세우는 목적은 다양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세우는 승전비가 있고, 고을 원님이나 감사가 백성을 사랑하며 헌신한 것을 기념하는 감사비도 있고, 열녀나 효부를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열녀비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기념비 종류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념비들은 대부분 기념해야 할 사람이 죽었거나 떠난 다음에 세웁니다. 역사가 냉정한 판단을 한 후에 세워야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자칫 조급하여 자기 당대에 세우다 보면 자기 인생을 욕되게 할 수 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12절은 사울 왕이 자기의 보잘것없는 공적을 나타내려는 공명심 때문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루는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을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0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명령입니다. 왜 이런 전쟁을 하여야 합니까? 이스라엘이 과거 출애굽 후 광야생활 할 때 가장 먼저 전쟁을 걸어온 민족이 아말렉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전쟁을 치를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종살이의 처지에서 출애굽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출 17:08~14).
그로부터 약 3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에게 그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에 사울은 하나님 명령을 따라 직접 21만 명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아말렉과 전쟁을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승리를 한 후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남기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0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드는 일의 우선순위가 아말렉 왕 아각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첫 명령부터 따르지 않았습니다. 왜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었습니까? 아마 아각을 통해서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한 목적 같습니다.
진멸하라는 엄한 명령도 부분만 이행하고 말았습니다. 재산 가치로 볼 때 좋아 보이는 것 질 좋은 것은 자기를 위하여 살짝 감추고 말았습니다. 물욕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차단하는 길로 나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갈멜로 가서 승리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게 제정신입니까? 이런 일이 믿음의 행적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에 왕가의 가문이 끊어지는 지름길입니다.
2. 사울이 새운 기념비는 교만의 결과입니다. |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김삼일 가족 여러분, 사울 인생에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인 것 같습니까? 교만입니다. 아말렉 군대를 물리친 후 갈멜로 가서 기념비를 세운 일은 전혀 안 어울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하여 진노를 당할 처지에 놓인 사람이 기념비가 무슨 말입니까? 사울을 위한 기념비가 아니라 묘비를 세워야 할 처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먼저 사무엘에게 당신이 복을 받으셔야 합니다. 당신 시키는 대로 해서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라고 보고합니다. 사무엘이 물어보기도 전에 사울이 먼저 말을 합니다. 왜 먼저 말을 합니까? 양심의 찔림으로 인해 자기의 치부를 가리려는 수작입니다.
왜 변명하고 왜 거짓말을 합니까? 왜 충고를 무시하고 잘못된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까? 사울의 마음에 교만이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회개하기가 쉽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사울의 교만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사무엘이 사울을 면접할 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 내 백성을 다스릴 자라고 점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사무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나타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소속입니다. 내 집안도 보잘것없습니다(삼상 09:21). 이렇게 사울은 왕이 되기 전 매우 겸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되자 언젠가부터 교만하여져서 이스라엘의 사사요 선지자요 대제사장인 사무엘을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였습니다. 사울이 아말렉을 이긴 일도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죄악을 심판하기로 계획하셨고 그 심판의 대행자로 사울을 사용하신 것뿐입니다.
사울은 실제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사실 그대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싸우라 해서 싸운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셔서 이겼습니다. 그런데도 승리의 기념비를 세운 것은 내가 아말렉과 싸워서 이겼다는 자기 공로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야고보가 전하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약 04:0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사울의 교만한 모습을 싫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데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가로채버린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기도해서 그렇게 된 거야. 아무개는 내가 전도했다고. 그 일 바로 내가 한 거잖아. 여러분 가능한 한 우리의 언어에서 나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라는 주어가 꼭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했다고 할 때입니다. 다 내 잘못입니다. 라고 할 때 내가 필요하고 자랑할 거리가 있을 때는 나를 감추어져야 합니다. 내가 드러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내가 드러나면 다른 사람의 공을 가로채는 결과가 됩니다. 이 부분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복의 통로가 막힙니다.
3. 나도 사울처럼 교만의 기념비를 세우지는 않습니까? |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어찌하여 왕이. 이 말은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하는 소리입니다. 동시에 우리 모두의 모습, 바로 내 모습을 책망하는 소리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사울 왕처럼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렇게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기념비를 세우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혹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가로채는 것은 아닙니까? 뒤에서는 교만의 기념비를 열심히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조심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내 입으로는 자랑하지 맙시다. 내 마음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제어합시다. 그래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내가 자랑거리의 주체가 되고 내가 드러나는 주인공이 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인정받는 바울은 누구보다도 자랑거리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분수를 넘어가는 자랑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자랑할 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자랑거리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랑할 일이 있고 꼭 자랑하고 싶으면 주님 안에서 자랑하면 됩니다(고후 10:17).
우리가 사람을 평가할 때 주로 어떤 기준으로 평가합니까? 지능지수((intelligence quotient)입니다. 지금도 대학입시는 거의 IQ로 평가합니다. 결과는 똑똑한 사람을 뽑기는 하지만 풍성한 감정을 지닌 사람을 뽑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감성지수인 EQ(Emotional Quotient)가 제시되었습니다. 또 이것만으로도 삶을 바르게 인도할 지표로 삼지 않습니다. 최근 새롭게 등장한 용어가 SQ(Social Quotient)라고 하는 사회지수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사람, 인간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에너지를 심어주는 사람은 배려와 관용을 베풀 줄 압니다. 자기 자랑 대신 상대방을 일으켜 세웁니다. 사울처럼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이웃에게 힘을 실어줍니다.
구약성경에는 기념돌 기념비 기념나무를 세운 일이 더러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별히 여호수아가 세운 기념돌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이 넘실대는 요단강을 무사히 건너 가나안에 입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 대표를 불러 요단강 가운데 있는 돌을 하나씩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길갈에다 기념비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기념비를 세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넘실대는 요단강을 잘 건넜음을 후세에 전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후세에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때 기적은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지도자로서 행한 첫 이적입니다. 이쯤 되면 여호수아에게는 요단강을 건넌 일이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요 치적을 충분히 기념할만한 거리가 됩니다(수 047:20~24).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 놀라운 사건을 인간의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위한 자랑거리 기념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기 위한 기념돌입니다. 여호수아와 사울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은 갈멜에서 자기를 위한 자랑 비를 세웠고 여호수아는 길갈에서 하나님의 은혜 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랑 비를 세우는 자입니까? 아니면 은혜 비를 세우는 자입니까? 무엇보다 이 두 비를 잘 구분합시다. 김삼일 가족은 은혜의 비를 세우며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남아메리카 지역은 본래 인디언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17세기경 유럽인이 들어오면서 멸족에 이를 만큼 인디언 사회가 무너졌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라틴족이 이주하여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을 세웠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라틴계를 중심으로 세운 남미 지역은 실패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나 베네수엘라 쿠바 같은 나라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앵글로색슨족을 중심으로 한 북아메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모범 된 국가가 되었습니다. 선진국 미국과 캐나다가 그 대표 나라입니다.
17세기 같은 유럽인이 같은 시기에 세운 나라인데 결과는 왜 서로 반대가 되었습니까? 문제의 핵심은 국가를 세운 목표가 다르고 비전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남미를 세운 라틴 이주민은 목표와 꿈이 황금이었습니다.
북미를 세운 앵글로색슨 이주민은 자유와 평등, 인간다운 삶의 질이 목표였습니다. 황금을 찾아 부를 누리려 한 남미는 빈곤의 역사를 창출하였고, 자유와 평등의 사회를 지향한 북미는 자유와 평등과 기회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짧은 세상을 삽니다. 사람이 나를 크게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황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복 중의 복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한 명예의 기념비를 세웠다 부끄러운 사람으로 추락한 사울의 길을 가기를 원합니까?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우리의 자랑거리로 삼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맙시다. 김삼일 가족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울 왕처럼 나를 위해 기념비를 세우는 삶입니까? 그렇다면 바로 그런 삶을 내려놓읍시다. 겸손과 교만 틈에서 계속 갈등하는 삶입니까? 그때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은혜의 날을 사모하며 삽시다. 신령한 길을 믿음으로 잘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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