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사도신경

사도신경⑪ 나는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요일 01:03~0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9. 1. 1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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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배 때나 성도의 친목의 현장에서 자주 이런 찬송가를 부릅니다. 찬송가 220장인데 여러분도 잘 아는 곡입니다.

1.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 한 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여 즐거운 찬송 부르네. 내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같이 환난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2. 사랑하는 주님 앞에 온갖 충성 다 바쳐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 힘써 섬기네. 우리 주님 거룩한 손 제자들의 발을 씻어 남 섬기는 종의 도를 몸소 행해 보이셨네.

3.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 몸같이 친밀하고 마음조차 하나 되어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찬송으로서는 제격입니다. 교회 생활에서 성도 간에 주고받는 사랑의 교제야말로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지지대입니다. 사랑의 교제는 일상생활에서 성도의 삶을 붙들어 주는 활력소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바로 이 성도의 원만한 교제에 있습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행복한 성도의 교제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예루살렘교회의 현장을(02:42) 보면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일에 힘을 쓴 것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일임을 밝힙니다. 계속되는 사도신경 강론의 오늘 제목은 나는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함께 은혜받는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성도의 교제가 무엇입니까?

 

0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에서는 성도의 교제라고 표현합니다. 반면 개정 전의 사도신경에서는 성도의 교통(交通)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교제나 교통 둘 다 의미는 같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고백하는 교제라는 단어의 의미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제는 함께 취미 생활을 하는 동호회나 관계를 다지는 친목회, 또는 학술 토론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는 주님과의 연합을 말합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원문의 뜻을 보겠습니다.

 

사귐(κοινωνίαν. fellowship). 사귐을 헬라어로 코이노니아라고 하며 이 단어는 이제 교회에서는 일반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협동, 공유, 남과 함께 나누다, 친교 등의 의미로서 신약성경에서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요일 01:03)와 성도 간의 교제(요일 01:07)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는 성별과 직업과 관심사가 다릅니다. 단 한 가지 공통분모 예수 그리스도를 구심점으로 모인 무리입니다.

서로의 필요를 따라 모인 계약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모인 언약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일반 공동체의 모임과는 교제 내용이나 성격이 다릅니다. 그렇다고 교회 안에서 사교의 분위기로 일상을 나누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서로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친교의 모임과 사랑 나눔도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몸 된 지체를 함께 섬기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를 오해합니다. 일상과 현실의 고민을 나누는 것이 교제 전부로 생각합니다. 교제의 본질과는 대단히 거리가 멀어졌습니다중요한 것은 성도의 교제는 믿음을 공유하면서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신령한 대화를 나누는 데 있습니다.

 

02:0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0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성도의 사귐과 교통(交通)이 실현되는 곳은 하나님과의 교제(요일 01:06),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고전 01:09; 요일 01:03), 성령님과의 교제(고후 13:13; 02:01), 성도 상호 간의 교제(05:13; 01:06; 요일 01:07)에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모두 한 가족으로서 반드시 거룩한 교제를 나누어야 하며(02:42) 그 복된 현장이 바로 성만찬입니다(고전 11:23-26).

성도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님 안에서 서로 하나 되어 위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요, 수평으로는 성도 간의 교제입니다.

 

 

  2. 교제는 빛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0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05절과 07절에서 빛과 대조시키는 어둠, 하나님과의 교제를 차단하는 어둠이 무엇입니까? 어둠(σκοτία)은 생명을 가로막는 죄악 된 세상, 곧 사탄의 세력입니다.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어둠은 당시 복음을 방해하는 영지주의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빛은 의로움과 진리로서(27:01; 04:02),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04:08)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계속 빛과 어둠을 대조시켜서(01:04; 08:12; 09:05; 12:35, 36) 하나님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은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요청합니다. 빛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도가 빛 가운데 거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과 교제의 필수 요건이고 성도 간의 교제에도 역시 필수 요건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순히 그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진보하여 성도와 성도 간의 교제로 발전하여야 합니다. 성도 간의 교제는 신령한 기쁨이 주제가 되어야 하며 마지막은 성령님의 열매(05:22, 23)를 맺는 자리에 이르러야 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주님 안에서 진정한 교제를 나누는 가족으로 거듭납시다. 동시에 여기 모인 우리가 신령한 가족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공동 관심사와 공동의 기쁨을 잘 관리하고 지켜나가야 합니다. 성도의 아름다운 교통, 아름다운 교제를 잘 지키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그때는 성숙한 사람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일방으로 사랑을 받으려만 하면 건강한 성도가 아닙니다. 사랑과 믿음을 앞세우는 성도는 거룩한 교제와 화평을 유지할 의무가 있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눌 의무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10:37). 이런 마음을 가슴에 품을 때 나와 같은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도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와. 로마 가톨릭은 성도를 죽은 성인으로 해석합니다. 당연히 성도의 교제를 산 자와 죽은 자가 교통하는 교리로 삼습니다. 그래서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이라도 특별심의를 거쳐 복자(福者), 성자(聖者)라는 서품을 내립니다. 이런 교리 때문에 지금도 죽은 자들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헌금도 하는데 성경이 부정하는 강신술을 권장하는 일들은 미신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18:11, 08:19~20).

 

사도신경이 이단 분별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에 본래 사도신경 끝에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어다. 아쉬운 것은 현재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끝부분에 있던 이 표현이 없습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계속 아쉬움이 남는 부분입니다. 아마 한국교회가 영어로 된 사도신경을 한글 번역하면서 가톨릭 냄새가 나는 부분을 삭제했기 때문입니다.

 

 

  3. 성도의 교제는 성찬식에 동참함으로 실현됩니다.

 

고전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성찬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제자들과 맺은 거룩한 언약입니다(22:19-20). 예수님은 출애굽의 감격을 기념하는 유월절 예식을 자신의 피로 세우신 성찬식으로 대체하시면서 이를 기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은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 곧 대신 속죄를 상징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22:19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성찬식의 목적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에서 먹는 떡과 잔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함은 영혼을 더욱 새롭게 합니다. 성찬식은 불신자를 위한 예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성도의 예식이며 믿음을 북돋우어 주는 예식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찬식에 참여하여 축복의 떡을 떼고, 축복의 잔을 마심이 진정한 교제임을 전하면서(고전 11:23-29),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돌아가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피야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길, 완전한 교제의 길이라고 안내합니다. 어떻게 안내하는지 성경을 보겠습니다

 

요일 0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신즉슨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제가 오늘 말씀을 열면서 사랑하는 주님 앞에라는 찬송가 220장을 함께 불렀지 않습니까? 진정한 성도의 교제는 성찬식에 참여한 성도가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찬양의 고백을 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성찬식이야말로 예수님께 죄 사함을 받고, 주님과 우리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에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행복한 장()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떡을 먹은 것처럼, 성찬식을 통하여 구원의 피 흘림에 참여함으로 신비로운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성찬식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며, 성도 간에도 새로운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미 코이노니아의 관계로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김삼일 가족들은 코이노니아로 이루어진 행복한 가족입니다. 진정한 교제를 나누는 관계이며 서로를 격려하고 배려해 주는 관계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에게 주님과 교제하도록 감동을 주십니다(고전 01:09; 벧후 01:04). 성령님은 성도들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상호 간에 교제를 이어주십니다. 신약성경에서 서로(125), 더불어(52), 함께(463) 같은 부사들은 코이노니아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용어들입니다. 그러므로 교제를 나누는 일에는 혈연, 학연, 지연을 초월해야 합니다.

 

0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된 교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교제로 나타나야 진정한 교제의 열매를 맺습니다. 여기에서 신령한 힘을 얻어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