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사도신경

사도신경⑬ 나는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요 05:24~2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9. 1. 1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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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사님께서 주일학교 시간에 천국에 대해 설교하셨습니다. 천국은 너무너무 좋은 곳이며, 도로는 금으로 포장되어 있고, 온갖 아름다운 열매가 사시사철 열리는 곳이다. 천국에 들어가면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이렇게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고는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천국 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 봐. 그러자 권종수 어린이만 빼고 다 들었습니다. 종수야 너는 천국 가기 싫으니? 아니요. 저도 천국 꼭 가고 싶은데요. 엄마가 교회 끝나면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으로 곧장 오라고 했거든요.

 

여기에 계신 분들 가운데 지금 천국 가고 싶은 분 손들어 보라고 하면 별로 손을 안 들 것 같습니다. 천국에 가고는 싶은데 살 만큼 살다가 마지막 죽을 때 가고 싶어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성령님의 감동으로 천국의 여러 모습을 보고 기록하였는데 그 기록이 신약성경 마지막 27번째 요한계시록입니다. 자세한 표현이 계 22:02~05절에 나옵니다.

생명수 강이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고,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고,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도 쓸데없고, 천국 백성은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과 함께 왕처럼 사는 곳입니다.

 

오늘은 사도신경 마지막 열세 번째 강론으로 몸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일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장차 부활할 때는 현재 우리의 방식으로 복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삶이 영생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죽고 살고, 또 죽고 살고, 또 죽고 살고 이런 식의 반복을 영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삶이 영생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세밀하게 살펴보기 위하여 나는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나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의학으로 볼 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영혼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떠나면 그것으로 삶은 끝납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는 교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주의 무덤만 화려하게 꾸며 놓았습니다. 죽은 종교의 증명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었을지라도 다시 살아난다고 선언합니다. 사도 바울이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던 고린도는 당시 인구 약 75만 명의 상업 도시로서 외국과 무역 거래가 매우 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선박 입출항이 많음으로 인해 사회 풍토도 매우 어지럽고 문란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가면 망가진다. 라는 유행어가 돌 만큼 타락한 도시의 상징이었습니다.

고린도에는 큰 신전들이 세워져 있어서 신화와 우상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사람은 죽을 때 육체는 소멸하고 영혼만 육체를 빠져 나와 천국에 들어간다는 영지주의 혼합 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육체는 세상을 살 동안만 필요하고 죽으면 전혀 필요 없다. 몸은 사람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과 같다고 인식하였습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자에게 바울은 이미 죽은 자는 주님 재림하실 때 부활하고 그때 살아 있는 자는 영화의 몸으로 변화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즉각 거부 반응이 나왔습니다.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런 혼합 종교의 부활과 기독교의 부활은 차원이 다릅니다. 복음의 영역 밖에 있는 사람은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저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다. 허무맹랑한 소리다. 우리보고 그런 소리를 믿으라고 하느냐며 반박하였습니다.

고전 15장은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느냐고 반문하는 그리스 철학의 질문에 바울이 변증하는 설교입니다.  사람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기초로 이루어진다는 안내문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육체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사람은 죽으면 몸이 분해되고 시간이 지나면 흙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그날에는 죽어 흙으로 변하여 형체를 잃었을지라도 그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바울은 성도의 부활에 대하여 설명할 때 예수님의 부활을 예로 듭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부활의 모형이라고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세상 삶이 전부가 아니라 더 놓은 하늘나라의 소망이 있음을 안내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세상의 삶만 있다면 우리가 제일 불쌍한 자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한 새로운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라고 안내합니다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 말로서는 부활을 외치는 사람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믿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체는 중요합니다. 더욱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육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나중에 부활할 때는 현재 몸이 아니라 영화의 몸이 되겠지만 기독교인은 지금 육체의 몸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지 않고 죽는다면 몸이 부활은 하되 심판을 받아 영생이 아닌 영벌의 세계에서 지내게 됩니다.

 

0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2.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0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이 두 말씀은 서로 연결되는 진행형입니다. 그리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는 말씀은 현재 완료형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성도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였다는 뜻입니다죽어보아야 천국이 있는 것을 알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연히 믿음 없는 사람의 소리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영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이런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세상을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지 못하면 신령한 기쁨도, 장래의 소망도, 담대한 믿음도 누릴 수 없습니다. 확신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01:0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사도신경의 마지막은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영생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영생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라고 목청을 높이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 가운데 좀 미심쩍은 사람이 있습니다영생을 간절히 구하면서도 영원하지 않은 이 땅의 아파트 평수에, 고급 승용차에, 자녀들 일에, 사회의 지위에, 교회의 직분에 목을 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세상 나라가 더 영원하기를 소망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나는 영생(αώνιον ζων)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에서 영생(永生)이 무엇입니까? 문자 자체의 뜻은 영원(αώνιον)한 생명(ζων)을 말합니다. 단순히 영원히 사는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상응하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알아 깊은 교제를 통해 누리게 되는 생명입니다(17:03). 더러는 영원한 생명은 죽어서 천국에 가야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24절을 보십시오.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영생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영생탑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지시로 북한 전역에 세워진 김일성 우상화 조형물인데 약 3천 개 정도 됩니다. 주로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 사망일(78)이나 생일(415)에 헌화합니다평양 시내의 영생탑에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런데 김정일이 죽고 난 후에는 영생탑의 문구가 김정은에 의해 다시 바뀌었습니다.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비록 김일성과 김정일이 죽었지만 지금도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가면 얼마나 가겠습니까? 백 년을 가겠습니까? 천 년을 가겠습니까? 머지않아 비싼 돈 주고 세운 저 영생탑이 무너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중국 연변 자치주 연길에 연변과학기술대학교가(2010.9) 있습니다. 이 연변과기대를 통해 중국의 크리스천 리더를 양성하고 선교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세워진 학교입니다.

그런데 이 학교의 총장 김진경 박사가 공산권 평양에서도 노력하면 선교가 가능하리라 여기고 모금 활동을 하여 평양시 락랑구역 보성리 승리동에 평양과학기술대학교를 세웠습니다.

500억 원의 외국 자본으로 선교를 겨냥하여 세운 학교입니다그러나 준공 후 선교는 불가능 수준입니다. 오히려 학교 내에 20m 높이의 영생탑을 세우고 이렇게 글을 새겼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런 글을 읽고 믿는다고 영생이 주어집니까? 그들은 영생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사실 세상에서 현재 우리의 삶을 영생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무리입니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시간의 차이일 뿐 이내 죽음을 맞이합니다. 안 갈 수 없습니다. 죽지 않는 존재, 영원한 존재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영생은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고 그분으로 인해서 우리에게도 영생이 주어집니다. 영생 얻는 비결을 같이 읽겠습니다.

 

0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사는 것을 사모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03:11).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영생 얻는 비결도 주셨습니다.

 

0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저는 영생과 영벌에 대한 선택이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길을 보여주실 뿐이며, 그 길을 가는 것은 내가 결정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심판이 있습니다(09:27). 모든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각자 행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20:12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이 따집니다. 선교사도 없고 믿을 방법도 없는 시대의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고? 성도 여러분은 그런 일에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남 걱정할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판단을 하시기 때문입니다(02:14, 15). 영생은 죽음 다음에 온전하게 맞이하지만 구원받은 백성은 지금부터 영생을 내다보는 생활을 합니다

영생을 품고 사는 성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고사리 인사를 나누는 삶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해합니다. 3가지 더 추가합시다. 감사합니다. 힘내세요. 아름다워요. 영원히 들어도 좋은 말을 하며 삽시다. 영생을 믿는 성도는 속 좁은 사람으로 살지 않고 김삼일 가족답게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