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1년 말씀

생명 운동에 해산의 수고를 합니까?(갈 04:12~20)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1. 11. 2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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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신병자가 밤에 몰래 백화점에 침입하여 밤새도록 장난질을 했습니다. 가격표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 붙여 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만원의 자리에는 백만 원 자리를 붙여놓고, 2백만 원 자리에는 5천 원 붙여놓고, 이런 식으로 마음대로 장난을 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백화점 문을 열자 손님이 왔는데 이상한 눈빛도 없이 그 가격표를 보고 그대로 물건을 사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어떤 사람이 현대인의 혼돈 된 가치관을 비꼬아 만든 이야기입니다
.

사람들은 뭐가 정말 중요하고, 뭐가 정말 가치 있는 일인지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주 가치 있는 것을 싸게 취급을 하고 쓸모없는 것이 정말 귀한 것인 줄 착각을 합니다. 그러면 이 엉터리 가격표 백화점에 와서 물건을 사 가지고 가는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만히 내 생활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나는 정말 아까운 내 인생을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정말 내가 귀하다고 붙잡고 있는 그것이 내 인생에게 귀한 것인가를.
물품의 혼돈은 좀 손해를 보면 됩니다만 손해를 보고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치관이 혼돈되어 있는 신앙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특별한 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그리스도의 형상
,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 등은 상당히 신학적인 의미가 담긴 메시지 아닙니까? 바울이 왜 이런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까요? 지금 갈라디아교회가 구원론에 혼돈이 왔기 때문입니다. 좀 변질 된 방향으로 흘렀다 할까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해산하는 심정으로 신앙의 지도를 다시 하겠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도 교회 안팎의 일을 챙기고 섬겨나갈 때에 다시 해산하는 수고의 심정으로 일을 한다면 얼마나 유익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또 전도의 영역으로 옮겨 생각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생명 운동에 해산의 수고를 합니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려 합니다. 함께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1. 갈라디아교회에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01:0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를 세워 성도들을 양육을 할 때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인해 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해 받는다는 내용으로 가르쳤습니다(02:08).

 

03:0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런데 갈라디아교회에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구원의 길은 율법을 잘 지키고 행동을 선하게 하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얼마나 실망이 되었고 마음의 충격이 왔겠습니까?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복음의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의 찰나입니다. 이에 바울은 이단자들을 향하여 영적 전쟁을 선포합니다.

 

01:0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주의자(유대주의자)와 율법 폐기론 자들로서 바울은 이들을 거짓 형제라고 규정하였습니다(02:04).


율법주의자들은 아마 예루살렘 공회에서 이방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15:05) 자들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우선 신자인 것처럼 가장하여 열심 있는 체 하였으나 실제로는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교란시키려 한 적대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교란을 합니까? 먼저 복음을 곡해하기 위하여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선동하면서(02:04, 05:02, 06:12,13) 율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합니다(03:02, 05:04).

 

율법 폐기론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율법은 다 끝났기 때문에 율법의 행함이나 도덕적 행동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덕적 방종주의에 빠져 아무렇게 행동을 하는 이들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영지주의자들이라 부르는데 바로 이들이 성도들을 미혹할 때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이탈하였습니다.

 

01:0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같이 속히 떠났다는 말씀으로 보아 바울의 깊은 탄식과 안타까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 갈라디아교회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즉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도 이상한데 의외로 빠르게 진리의 복음을 떠나는 모습들을 보았을 때 바울은 더욱 의아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하였던 것 같습니다.

 


 2. 신앙의 회복은 해산하는 수고로 돌보아야 합니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를 이루려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어머니의 심정으로 간곡한 당부를 합니다. 19절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너희 속에 자리할 때까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진리가 확신 될 때까지 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쉬운 구원의 복음이 율법주의자들 곧 거짓 교사들에 의하여 완전히 왜곡되어졌습니다.
일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라고. 이쯤 되자 바울은 신앙의 지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로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 라고 말합니다. 낳았지만 다시 낳아야 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양육의 수고를 다시 하겠다는 그런 말이에요. 생명을 낳는 일, 즉 전도를 하여 교회에 데려 와서 양육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당연히 고통이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 생명 구원하는 일을 산모의 해산하는 일에 비유하고 있는데 그만큼 전도하는 일 그리고 양육하는 일에는 큰 수고와 희생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출산을 해 본 여성들에게 가장 힘든 순간이 언제이었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해산할 때의 고통이었다고 말을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다시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열을 올리는 분들도 있고요? 그러나 그 고통도 잠시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아이를 갖고 싶은 것이 어머니들의 마음입니다. 한 생명을 얻는 기쁨이 해산하는 고통보다 더 크기 때문에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거지요?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 아닙니까?(16:26) 다시 구원의 진리를 가리켜야 하는 수고, 기초를 새로 놓아야 할 만큼 진리가 왜곡되어진 갈라디아교회, 그러고 보면 갈라디아교회가 신학의 위기를 만난 것은 틀림없습니다.
성도들의 심령상태가 율법주의로, 기독교적 영지주의로 변질되어진 이상 어떻게 수습해야겠습니까? 진리 문제에서 흔들리는 교회, 교회에 침투한 다른 복음, 거짓 복음의 영향력은 교회 전체를 흔들고 있는 이 때 안정된 처방전이 무엇이겠습니까?

 

0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 오직 구원의 믿음 하나만 붙들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새롭게 나야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한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15:19,20 29).

 


 3. 나는 영혼을 얻기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합니까?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산모는 모두가 고통 없이 새 생명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래서 많은 여성들은 출산 때의 고통을 제하기 위해 여러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그거 다 산부인과 의사들 배만 불리는 겁니다.
또 그런 방법을 통하여 해산을 한다 하더라도 사후에 더 큰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해산의 후유증으로 인해 더 많은 시간들을 요양하며 보내야 합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 되어도 해산의 고통은 새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며 성경에 그렇게 말합니다.


0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는 생명이 잉태되는 일이 없다는 말하고 좀 통하죠? 우리가 금년 한 해 동안 물댄 동산 같은 교회를 표어로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달려왔는데 돌아보면 우리에게 여러 일로 아픔들이 많았습니다. 이제 다음주일은 설립 기념주일입니다. 금년의 마이너스 현상을 다음 주일까지는 만회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해산의 수고가 따라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수고와 고통
, 아픔, 애씀 등 해산하는 수고와 같은 복음의 열정이 있어야 생명이 잉태되고, 생명이 태어나지 않겠습니까? 생명을 탄생시키는 수고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은 여러 가지로 변명을 하면서 이유를 갖다 됩니다. 교회의 어려운 문제는 자신과 상관이 없고 대신 불평이나 비판하는 일은 자기 몫으로 알고 앞장을 선다면 이제는 그런 옛 사람의 생활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

성도 여러분, 주일날 새로운 분이 등록했다 즉 한 생명이 출생했다면 이는 어느 누군가가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누군가가 해산하는 것과 같은 희생을 해야만 생명이 탄생하는 법 아닙니까? 누군가가 고통을 받아야 하고,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만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지는 이 진리 앞에 우리는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해산하는 수고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실제로 그 수고가 어떤 수고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대단히 힘들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뿐이죠. 이 자리에 있는 남자 분들 모두가 그 고통이 어떤지를 저처럼 짐작으로 아는 것 아닐까요? 어떤 산모는 해산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비명을 지르다 못해서 시어머니를 향해서 혹은 그 자리에 없는 남편을 향해서 욕설을 퍼부었다고도 합니다. 앞으로 출산하실 분들 그리 하세요.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 해산하는 수고를 다시 한다는 얘기는 전에도 그런 수고를 했지만 다시 낙심한 자를 찾아가고, 축 처져 있는 사람을 붙들어주고, 전도 대상자를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가겠다는 그런 각오입니다.

가라지의 요소가 성도들의 심령에 침투하여 실족을 시키고, 내 마음에 품은 전도 대상자를 흔들어 놓았다면 이번 주간 그들을 내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심정으로(15:08),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으로(15:04) 다가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산과 들 어느 곳이든지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 잔치 집을 채우라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14:23). 내가 믿는 기독교는 정체되어 있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을 재 출생시키는 종교입니다.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이것이야말로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기에 여기에 자기의 인생을 걸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생명을 살리는 복된 자리입니까? 아니면 생명을 살리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도 못하는 자리입니까? 나의 에너지는 생산적인 곳에 투입됩니까? 아니면 파괴적인 곳에 투입됩니까? 어느 편입니까? 나로 인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유익을 얻고 있느냐? 내가 생명을 살리는 쪽에 얼마나 삶의 에너지를 쏟느냐를 기준으로 자신의 신앙 수준을 확인하십시오.


옛날 조선시대 때 사용하던 말 중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나 아주 막강한 권력을 설명할 때 이런 말을 쓰는데 주로 정승이나 판서 혹은 왕실의 측근 중에 힘이 센 자를 비유할 때 쓰는 문자지요.

요즘에 이런 말을 쓰면 어울리지 않지만 아무튼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린다는 것은 당시의 문화 수준에서 보면 분명히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일이 있습니다. 떨어진 새를 다시 날게 하는 겁니다.
만일 이런 힘이 있다면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런 힘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해산하는 것과 같은 수고를 하여서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바로 떨어진 새를 날게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요
?

이제 우리에게 있는 힘을 어떤 곳으로 향하여야 하겠습니까
? 날아가고 있는 것을 떨어뜨리는 쪽으로 우리의 힘이 동원되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떨어진 것을 다시 날게 하는 쪽으로 우리의 힘이 동원되어야 하겠습니까?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리는 힘이라면 그것은 죽이는 힘 세상적인 힘이고, 떨어진 새를 날개 하는 것은 분명히 살리는 힘 즉 영적인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