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1년 말씀

나팔 불지 말고 구제하십시오.(마 06:01~0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1. 12. 3.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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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Albert Schweitzer(18751965)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앞날이 대단히 촉망되었던 신학자요, 철학자요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그가 뜻한 바가 있어 박애(博愛)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의료 선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발표하였고(1905) 마침내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1913).

그를 돕기 위해 간호사 훈련을 받은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함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가봉(랑바레네)에 자비량 선교사로 건너가 선교활동을 할 때 누군가 슈바이처에게 당신은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말로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거창한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 말에 대한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 말은 죽은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신앙인도 말과 행동 즉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이 또한 실패의 인생을 산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도 말과 행동을 함께 보여 드려야 할 것이며, 사람 앞에서도 역시 말과 행동이 같이 가야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의 신앙의 삶은 이 두 가지 즉 말과 행동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 김해삼일교회 설립 16주년 기념주일로서 GUP 아나바다를 진행합니다. 삼일뷔페로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 330분까지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이웃을 향한 구제비로 쓰이오니 함께 협력을 하는 행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신앙인의 구제는 사람 앞에 보이려 마십시오.


0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여기 의라고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너희 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제자들의 의를 말합니다. 좀 더 넓게 적용한다면 이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은 나의 삶의 스타일과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종교적 3대 경건행위가 있습니다. 구제와 기도, 금식으로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 같은 행위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실천하였고, 예수님도 이 3대 경건 행위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인식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자로 인정받기 위해 고의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의를 행하자(23) 예수님은 이런 위선적 행위를 고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사람에게 보이려고 라는 말을 주의 해 보십시오. 그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사람에게 과시하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헬라어의 원 뜻은(θεαθηναι) 그 행동의 목적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임을 뜻하는 말로 이 말에서 영어의 theater(극장)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연극을 한다는 의미인데 예수님은 이런 일을 외식이라고 했습니다. 집밖에서 식사하는 外食이 아니라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 外飾 말입니다. 사람들은 거의가 남들이 보느냐, 보지 않느냐에 따라서 행동이 변할 때가 많으며, 직장에서도 상사가 옆에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차이가 납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본능이 있습니다. 소유욕으로서 가능한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욕심이고, 되고 싶어 하는 본능인데 명예적이며 정치적인 욕망이 여기에 속하며,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서 남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하며, 존경까지도 받고자 하는 본능입니다.

 

한 해가 저무는 12월이고 보면 국가적으로 이웃돕기 이웃사랑 모금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걷히는 곳이 어디일까요? 과거에는 TV3대 일간지 조중동이었으나 이제부터는 121일부터 시작된 종편(綜編. 케이블 TV와 위성방송, IPTV ) 4개 채널 즉 조선일보의 CS TV, 중앙일보의 JTBC, 동아일보의 채널 A, 매일경제의 MBN 등이 추가 될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액수가 모금되는데 이런 매체의 모금에 만약 얼굴이 비쳐지지 않고, 신문에 이름이 나오지 않아도 그런 액수가 걷힐 수 있을까요? 아닐 것 같죠?

 

몇 년 전 한 회사 사장 비서가 약간의 이웃돕기 성금을 서울 시내 모 일간 신문사를 찾아가서 기탁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성금을 낸 우리 사장님 사진을 신문에 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신문사에서는 신문에 얼굴을 낼 수 있는 성금의 한도액을 말해주며 어렵다고 하자 그러면 그 성금 돌려주십시오. 하며 되찾아 갔다고 합니다.
아무리 명예가 귀중하고 본능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기탁한 이웃돕기 성금을 다시 찾아갔다는 이 사실은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선물을 주면서 말을 많이 하면 안주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고, 또 유대인이 구제를 할 때에 뒤로 돌아서서 구제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돌아서서 구제한 이유는 구제 받는 사람이 누구에게 구제 받는지 알아 부끄러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고, 구제하는 사람이 자신이 누구를 구제하는지 알므로 그 사람에게 잘난 척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어떻습니까? 사람이 보지 않으므로 할 것을 안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지 아니면 반대로 사람들이 보니까 하는 척 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까?

 


 2. 구제는 조용하고 은밀히 하여야 합니다.


0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구제할 때에. 이 어구가 구제한다면 이라는 조건문(條件文)으로 기록되었으면 구제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되겠으나 직설적으로 구제할 때에 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예수님은 구제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말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유대인들은 기우제(祈雨祭) 때 나팔을 불어 백성이 모인 곳에서 구제하였고, 예루살렘 성전 내에서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성금을 모을 때와, 구제자의 성금 내력을 알리기 위해서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구제품이 든 조그만 바구니를 건네주곤 했는데 이런 행동들은 많은 사람을 자기의 증인으로 삼으려는 전시 효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실제로 나팔을 부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기의 선행을 자랑하지 말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에 더 무게 중심이 있습니다.

나팔을 불면 당연히 구제를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할 것이고, 주변 사람들은 칭찬을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선한 일을 하고도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기위해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자기 상, 자기 영광이라는 보상을 다 받은 것이므로 천국에서는 더 받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사람의 칭찬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그렇게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요?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는데요. 진정한 구제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런 구제를 예수님은 진정으로 인정하십니다.

오늘 말씀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믿음을 떠난 인간적인 중심의 구제 스타일을 비유로 들어서 제자들을 믿음 중심의 구제자, 하나님 중심의 구제자로 훈련시키는 모습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거의가 상대방을 잘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모습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그런 사람들을 아주 엄하게 자주 책망을 하셨는데 제가 성경을 인용하겠습니다.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15, 16, 23, 25, 27, 29,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면 참된 구제는 어떤 것인지를 뒷받침하는 03절을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0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구제란 불우한 이웃
, 불행에 처한 이웃을 돕는 행위로서 다른 말로 자선이라고 하며, 이런 구제의 특징은 조건 없이, 소리 없이 거저 주어야만 합니다. 믿음의 성도는 구제를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며, 이런 구제의 삶이 진정 이웃을 향하여 마음의 창문을 여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을 의식하면서 좀 조용하고 시끄럽지 않게 하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눈에 잘 보이는 것은 그 순간뿐이지 지나고 나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선행을 하다 혹 위선자로 변질되기보다는 대신 삶의 태도를 바뀌어 자신을 감추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5:0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

 

그렇다고 일부러 하나님 눈에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여 드리지 않아도 다 보고 계시며, 우리가 보고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못 보실까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3. 믿음의 구제는 천국의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0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은밀하게 하라. 구제의 과정에서 소리 내지 말고, 또 모든 절차나 행동을 꼭 숨어서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 자랑거리로 내 세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앞서 살펴 본 03절에서 주님은 구제의 행위를 놓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자기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를 수 있겠습니까? 일종의 과장법으로서 그만큼 은밀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 생색낼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흔적을 남긴다면 이 얼마나 복된 일이겠습니까?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의 행하는 일들 즉 구제하고 기도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아셔서 적절하게 보상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어떤 의로운 일이 있다고 합시다.
그 일에 대하여 내가 잊어버리면 잊어버리는 만큼 하나님은 그것을 주목하실 것이며, 반면 우리가 그 의로운 일을 높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은 그것을 무시하실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보신다, 아신다는 말처럼 감동적이고 위로 되는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이야 뭐라 하던
,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던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만 주신다면 그보다 더 큰 은혜와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선행이 꼭 은밀하게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본의 아니게 선행이 알려져 칭찬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는 주님, 제가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칭찬받을 게 무엇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고전 15:10).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고든(Gorden. C. G). 영국 정부는 전후 33회나 적진을 누비면서 국가적으로 크게 공헌을 한 고든 장군의 공적을 치하하고 명예를 보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를 건립하려고 하는데 마지막에 고든 장군이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작위(爵位)를 수여하고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하여도 이를 거절합니다.

어떻게 하던 영국 정부는 기념을 하고 싶어서 조그마한 금메달에 그 공을 기록하여 증정했는데 그 후 장군이 죽은 후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금메달이 안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궁금해서 수소문해 보았더니 가슴 뭉클한 사연이 숨어 있었습니다.
맨체스터에 대 흉년이 들었을 때 장군은 그 금메달을 녹여 팔아서 굶주리는 자들을 구제하였는데 장군의 일기장에는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던 선물을 그리스도께 바쳤다.
그렇지요. 우리의 선행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성도 여러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0:3037)를 알고 있습니까? 그 사건이 만일 후미진 여리고로 가는 골짜기가 아닌 예루살렘 거리의 한 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것을 보고 그냥 지나갔겠느냐 말입니다. 사람들이 안보는 곳이었기에 모른 척하고 지나갔지 만일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더라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도와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정(假定)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행과 구제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축복의 기회는 내 곁에 항상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도와 줄 기회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시려고 이런 기회를 주셨구나 생각하고 그런 기회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보상은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 이 현세에서 칭찬을 듣고, 박수를 받고, 보상을 받는다면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상을 이미 받아 버린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에 그것이 연극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하여라. 그것이 멋진 연극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너희를 지으신 하나님은 박수를 보내지 않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