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1년 말씀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걸 때.(행 14:19~2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1. 11. 5.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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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말씀 중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후 모든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생각하여 제사하려 했던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의 행위를 그대로 묵인했더라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극진한 환대와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앞날의 선교 일정에 도움이 되는 많은 필수품과 여러 편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도자가 영광을 받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행위이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 행위이며,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죄악 인줄 알았기에 루스드라 사람들의 제사 행위를 적극 저지하였습니다. 

 

행 14: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그런데 진리에 서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변합니다. 인간관계만 보아도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친구로 삼기도 하고 대적으로 삼기도 합니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의 거짓이 되기도 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하며, 어제의 정의가 오늘의 범죄가 되기도 하는 가변적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치유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다가 이제는 죽이려 하는 모습을 19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변덕스러움이 우리를 조금은 당황하게 합니다. 어떻게 조금 전까지는 신으로 알고 모시려 하던 자들이 이렇게 죽이는 행동까지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성경으로 조명하면서 오늘의 메시지를 열어가려고 합니다.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사람들의 믿음은 상황 따라 잘 변합니다.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바울 선교 팀이 이르는
곳마다 성공적인 전도의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반면 유대교에 소속한 자들은 자신들의 교가 계속 위축되자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혼란한 마음을 사탄이 틈을 타자 루스드라의 사람들은 바울 선교 팀을 핍박하면서 심지어는 죽이려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 약 200Km,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까지는 약 38Km 떨어진 먼 거리인데 그 먼 곳에서부터 유대인 폭도들이 바울 선교 팀을 해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악하고 잔인한 생각을 가지고 찾아왔겠습니까?

무리를 충동하니. 어떤 악한 일에 상대방을 끌어들인다는 뜻인데 충동이라는(πείθω, 페이도) 이 말이 일상적으로는 설득하다, 선동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아마 그 먼 곳에서 온 유대인들이 루스드라 시민들에게 이렇게 설명을 하였을 것입니다.

 

①이 두 사람은 마귀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을 한다. ②루스드라 사람들이 섬기는 종교를 파괴한다. ③그러므로 저 두 사악한 사람은 죽여야 한다.


이런 선동자들의 말에
자기 주관과 분별력도 없이 동조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을 보십시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이 강림한 것으로 알고 황소와 꽃다발을 드려 제사까지 하려 했던 자들 아닙니까?
루스드라 시민들은 바울 선교 팀을 해하려는 유대인들의 거짓 흉계를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그만 그 선동에 동조하고 말았습니다.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근시안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상황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변덕을 잘 하며, 심지어는 추한 모습도 잘 보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이란 조변석개 같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음을 알고 처신해야 되겠지요?

 

잠 0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루스드라 시민들의
변덕스러움으로 인해 바울 선교 팀은 대단히 큰 핍박을 받았는데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이 얼마나 돌에 심하게 맞았습니다. 모두가 죽은 줄로 알고 끌어다가 시외의 구석진 곳에 끌어 던져 버렸다고 했을 정도이니까요?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시내에서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얼마나 흥분하였으면 돌로 쳐서 죽은 정도가 되게 했겠습니까. 그날 바울은 전도하다가 돌에 맞고, 몸이 부서지고, 찢어지고, 상처가 커서 죽은 것과 같은 기절을 하였습니다.
또 무리들이 시외 즉 성밖에 바울을 내다 버렸다 했는데 이는 거짓 마술사로서 사악한 교를 전한다고 해서 그 시체를 개나 짐승에게 주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환영하다가 이내 배척하고 죽이려 달려드는 반응은 예수님에게도 나타난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호산나라고 외쳤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마 21:0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7: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 하나님께서 바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상황이 얼마나
급변했으며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까? 바울은 돌에 맞아 몸이 부러지고, 찢어지고, 피가 나고 상처가 대단히 컷을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옛날 자신이 스데반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일을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고대시대 좀 미개한 시대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복음을 듣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돌을 던지는 자리에서 돌에 맞는 자리로 옮겨지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20절에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라고 나오죠? 여기 둘러선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바울 선교 팀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바울이 기절한 것을 알았으면 빨리 응급처치를 하였을 것인데 아예 목숨이 끊어졌다고 보고 장례를 집행하려고 의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바울이 건강하게 일어섰습니다. 폭도들이 죽인 바울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앞으로도 바울을 통하여 하여야 할 일이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의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바울에게는 복음의 불모지를 개척하고 로마를, 더 나아가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한 큰 사명이 주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명자는 그 일을 다하기 까지는 결코 그 생명을 거두어 가지 않으며 위태로운 지경에 처할지라도 계속적으로 안보하여 주시는 은혜가 따릅니다. 바울은 이때 당한 상황을 고후 01:08,09절에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고후 01:0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0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 바울이
겪었던 고난을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육신은 돌을 맞아 죽을 만큼 고난을 겪었고,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고난도 있었지만 이 모든 고난을 무난히 극복하였는데 그 힘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바울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능력 때문이요, 바울이 위대해서 고난을 겪은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가지고 있는 복음 때문에 겪은 것입니다.
복음의 일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마치기까지는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명자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께만 맡기십시오. 바울 선교 팀은 위기의 현장들, 죽음의 순간들을 맞이할 때마다 자신들의 몸을 기꺼이 던질 수 있는 각오와 열정이 있었기에 사명이 위축되지를 않았습니다.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3. 중단 없는 복음의 생명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바울 선교 팀은 일상적인
사고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갑자기 눈을 뜨고 움직이는 것 아닙니까? 바울이 다시 정신을 차리자 제자들이 피를 닦고 응급 치료를 한 후 그를 부축하여 일으키니 다시 성으로 들어가자고 하는데 이게 될 법이나 하는 겁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 중에 더러는 싸움을 하는 때가 있죠? 싸움을 하고 또 감정이 격해지면 그 사람이 보기 싫고, 그 사람이 있는 데는 도무지 가고 쉽지를 않습니다. 더구나 주먹다짐을 하면 더욱 그 장소나 그 사람이 있는 곳엔 안 갑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요?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나서 다른 곳도 아닌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있는 그 성으로 들어갔다고 했으니 대단히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 자기를 돌로 쳐서 죽인 사람에게 다시 들어가는 이것이 복음의 정신입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지만 사랑한다면 또 만나는 것 이것이 참된 복음의 열정입니다.

바울 선교 팀은 이튿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처 난 육신과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며 또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어디로요. 동남쪽 약 30Km에 위치한 더베라는 곳입니다.정말 이들이 무엇에 사로잡혔나 봅니다.
그렇게 죽도록 돌에 맞아 죽게 된 지경이었는데도 다시 새로운 곳으로 전도지를 옮겨서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30Km나 되는 거리를 교통편의 편리를 받지 않고 걸어서 간다는 것 이게 가능할까요?
예,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면 그때는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건강만 주시면 하룻밤 사이라도 안 좋은 일은 다 잊어버리고 새 힘으로 일을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런 것을 은혜라고 하고 또 사명자의 힘이라고 합니다.

한 때 미국의 유명한
시사 잡지 타임지가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 1위가 여성 토크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였습니다.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시청자가 어림잡아서 천만 명 쯤 되며 그녀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야말로 대단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녀가 가난한 보육원을
방문하여서 그곳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10초만 이야기하면 다음날 수 십 억 원의 기부금이 들어오는 때도 있었고, 그녀가 어느 책을 읽었다는 말 한 마디만 하면 다음날 그 책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라이프 스토리를 알면 더욱 놀라게 됩니다. 그녀는 사생아입니다. 할머니에게 맡겨져 학대 속에 자라면서 아홉 살 때 성폭행을 당했고, 열네 살 때 사생아를 낳았으며 마약도 했습니다. 그러다 다행히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인생이 변했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조롱합니다. 당신 사생아지? 마약도 했다며? 사생아도 낳았다지? 그러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소. 그게 바로 오프라 윈프리요.
그러나 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은 위대하십니다. 멋진 대답입니다. 그녀의 자서전 이것이 사명이다. 는 인생철학이 담겨 있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①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②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③남보다 설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④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이것이 보냄을 받은
자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를 통하여서 보이고, 나를 통해서 확장되기 위해 나를 세상에 사명자로 보내셨음을 믿으십시오.여러분 사명이 무엇입니까? 나를 통해서 내 자녀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며, 나를 통해서 직장 동료와 상사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바울 선교 팀은 순교를 각오하고 나왔기 때문에 죽음의 현장일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중단하지 않고 복음의 전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로잘린드 고포드라는 사람은 고난의 길을 가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주님, 이 길이 바른
길입니까? 어둔 구름이 더 짙게 덮여 오고, 돌쩌귀 길은 험하고 거칠어지는데 한 고개를 넘으면 더 험한 언덕이 나옵니다. 갈수록 길은 밝아지고, 태양은 더욱 빛나고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줄로 알았는데 주님, 정말 이 길이 바른 길입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그 길이 바로 내가 지나간 길이란다. 내게도 검은 구름이 짙었고 돌쩌귀 길이 그때도 험했고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믿음으로 볼 수 있었단다. 그렇지만 태양 빛이 다 사라지고 나면 영원히 밤이 없는 곳에 다다르리라 이 땅의 불같은 싸움이 그치면 즐거운 마음이 쉴 수 있는 안식처가 있단다. 이 길이 바른 길이니 이 길로 가라.

시 126:0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0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갈 06:0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바울 선교 팀이 이렇게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게 완전히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