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0년 말씀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요 11:01~1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0. 11. 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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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로 돌았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과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 난치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 나는 직접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빼앗기고 옥살이하였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고 하지 말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이순신 장군의 어록 중에 있는 글입니다. 그분은 평생 좋은 일이 따르기보다는 궂은일이나 불편한 일, 고통스러운 일과 더불어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평보다는 현실의 고통을 수용하면서 자기를 국가를 위하여 아낌없이 던짐으로 역사의 인물로 세움을 받고 존경받는 인물의 자리에 들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도 원치 않는 일이지만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상황을 돌파하고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해결되는 기적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기적이 꼭 일어나야만 할 우리의 처지이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도 성도를 위하여 기적을 베푸시나 때로는 하나님의 예정표로 인해 그 응답이 지체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응답이 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신앙인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까? 그래서 말씀 제목을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로 정했습니다.

 

 

1.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가 어떤 곳인지 보겠습니다.

 

0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성경에 베다니는 두 곳이 나옵니다. 하나는 요단강 건너 동편에 있는 베다니이고(01:28) 또 하나는 감람산 자락에 있는 베다니입니다.

나사로가 사던 곳은 감람산 자락의 베다니입니다. 이 베다니 동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실 때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 정도의 가치가 있는 향유 한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이 있습니다(26:07, 14:03).

 

이런 고가의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린 일로 인해 베다니에는 잘 사는 사람이 사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베다니가 그렇게 부유한 동네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동네에 거하는 주민 대부분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부촌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안에 있습니다. 그에 비해 베다니는 소외된 빈촌(貧村)입니다. 그러면 베다니가 왜 빈촌인지 어떤 동네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 시대는 레위기 신체 정결법(13:01~46)이 시행되던 때입니다. 이 법은 주로 나병환자와 이와 비슷한 유의 병자를 공동체에서 분리하는 법입니다.

전염을 막기 위한 법이니 좋은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 병은 제사장이 진단해서 격리를 명하고 또 제사장이 다 나았다는 진단을 한 후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레 13:45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나병환자가 스스로 취해야 할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나병환자는 사람이 2m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먼저 나는 나병환자입니다. 하고 크게 알려야 합니다이렇게 하는 것은 위생학 측면에서 감염을 막고 종교의식에서 부정하게 됨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진 밖에서 살다가 이후 병이 나으면 제사장이 진단해서 격리를 해제하고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그러면 예루살렘 성내에서 나병환자가 발생했을 때 어디로 가서 머물러야 합니까? 부정한 존재로 규정되었으니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신세로 머물 곳이 바로 베다니입니다.

 

베다니의 뜻이 가난한 자의 동네, 아픈 자의 마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가복음(14:01~11)에 보면 나병환자 시몬도 베다니에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음성나환자촌 같은 곳으로도 보입니다. 예루살렘 남쪽 1마일 앞에 벳바게 마을이 있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감람산 동산이 있고 그 아래 베다니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2km 거리에 베다니가 있는 것은 이런 병에 걸린 사람이 나아서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임시로 머물던 장소인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복음 10:30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 매우 위험한 곳임을 밝힙니다.

이 위험한 코스에는 마을이 거의 없고 예루살렘을 벗어나면 바로 베다니가 나옵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서 일을 보시고 나오셔서 숙소로 사용하던 동네입니다.

 

유대교 랍비들 성경 해석인 미드라시(midrash)에는 나병이 바람에 의해서 전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 반경 4큐빗 이내로 지나가는 것을 금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서쪽 지중해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에 나병환자의 동쪽으로 지나쳐 걸어가는 것조차 피하였습니다(Lev. R. 16:03).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에서 나병환자가 발생하면 예루살렘의 동쪽 베다니 주변으로 옮기도록 조처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국 베다니가 그렇게 정결한 마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2. 절박한 일에도 예수님의 특별하신 뜻이 있습니다.

 

0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01절에서 어떤 병든 자라는 말이 나오고 이름을 나사로라고 밝힙니다. 이는 나사로라는 사람보다 그의 병이 더 중함을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당시의 의술로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자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병의 치료를 요청합니다(03).

그런데 06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시한부 생명 소식을 들으시고 오히려 이틀을 더 지체하십니다. 이후 베다니가 아닌 반대쪽 유대로 가자고 하십니다(07).

 

예수님께서 왜 치유의 기적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지체하십니까사람을 보내어 빨리 와 달라고 절박한 호소를 하였음에도 주님은 어떻게 해 주시겠다는 답변도 해 주지 않고 날짜만 다 날리고 모른 체 하십니까예수님과 나사로의 관계가 어디 보통 관계입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 라는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김삼일 가족 여러분께서 주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애타게 호소할 때 응답이 없는 것으로 비교해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을 만날 때는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0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자기의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기회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특별 프로그램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겪는 질병은 세상 이치를 따라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병이 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질병을 악령이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질병을 죄와 연관시킬 필요가 없습니다그러면 예수님은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늑장을 부립니까?

만약 나사로가 죽은 바로 다음 날 살리셨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짐작이 가십니까? 예수님을 시기하는 많은 사람이 나사로가 완전히 죽지 않았다. 라며 입방아를 찧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헛소문을 크게 퍼뜨렸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흘 동안은 그 사람의 죽은 영혼이 공중에 떠돌다 혹 천사가 은혜를 베풀면 그 사람의 시신으로 돌아온다는 헬라의 사상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일찍 나사로를 살리셨다면 어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권능을 부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죽음이 완전하게 증명되고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한 때에 나타나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이 병에 걸리고 세상을 떠나는 일을 자주 보아 왔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혹 낫지 않고 죽음을 맞는다면 그 죽음이 주님 품에서 평안히 안식하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면 남은 자들이 그 믿음을 본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를 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처할지라도 하나님 영광이 나타날 것을 믿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면 그것이 진정한 신앙의 가치입니다.

 

 

3. 예수님은 결국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알고 동정하십니다.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사람은 누구나가 결국은 죽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했든지 간에 누구나 죽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인에게는 죽음이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부활의 사건을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증명해 주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지체하심으로 결국은 나사로가 죽고 말았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예수님께서 장례식이라도 해 주시면 위로가 되었을 것인데 그런 은혜도 받지 못하고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사람 죽는 일이야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정마다 다 겪는 일이라 별반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어디 자기만 죽습니까?

 

그러나 나사로의 죽음을 보면 당사자가 아직도 젊은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자입니다(03). 그래서 다소 의문점이 일어납니다.

젊은 사람이 꿈도 활짝 피워 보지 못하고 죽는 그 자체가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슬픔이 예수님을 잘 믿는 성도의 가정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친구 나사로를 내가 깨우러 간다는 예수님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국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알고 동정해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말합니다. 주님,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너무 아파 지쳐 잠이 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제대로 알아듣도록 다시 말씀하십니다.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이 말씀이 희망으로 들리는 말입니까? 절망으로 들리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의 현장을 가시면서 하신 말씀이기에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내가 그 현장에 없었으니 오히려 너희를 위하여 더 좋은 일이다. 너희가 누구입니까? 열두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려는 프로그램을 계획하셨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열두 제자의 믿음도 더욱 굳건해지는 기회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게는 기쁜 일이라고 하십니다. 성도의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을 예수님은 좋아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열두 제가 가운데 디두모가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오해하였습니다. 어떤 오해인지 16절을 보겠습니다.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디두모가 누구입니까? 도마라고 하는 제자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의심 많은 제자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로 가자 하신 말씀은 나사로의 무덤입니다.

도마는 그 말씀을 예수님을 박해하는 예루살렘으로 가자는 말로 오해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가서 죽음을 각오해야 하지 않느냐는 대답입니다. 우둔한 말이지만 의리 있는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1990년 노벨 평화상 후보까지 올랐던 엘레나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 헌신하고 중국으로 가서 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힘써서 일하는 중 폐결핵으로 인해 각혈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어째서 내게 이런 병을 주십니까? 하는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제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고 기도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넓은 불모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개간해서 농사를 지었고 거기서 수확한 돈으로 중국 선교사들에게 선교비를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산물을 탈곡하던 중 탈곡기에 손이 끼어들어 가는 바람에 손이 부러져 오른손을 잘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어찌해서 이런 일이 있는 겁니까? 하지 않고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하고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농사를 멈추고 그 땅에다 양로원을 짓고 노인들을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크게 확장되어 세계에서 유명한 양로원이 되고 그는 노인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결코 여건을 탓하거나 원망치 않고 주여! 무엇을 원하십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맥클라맨이라는 영국의 설교자는 요한복음 11장을 두고 말하기를 나사로의 가족에게 예수님이 더디 가신 것은 사랑의 지연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지연하신 것이라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나사로의 가정에 예수님께서 늦게 가신 것은 그들의 가정에 대한 또 다른 사랑을 보여주시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응답의 시기를 사람 편에서 정한 후 그때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응답의 시기는 주님께 맡기고 기다림이 제일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