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0년 말씀

기적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요 11:38~4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0. 11. 13.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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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꼭 일어나야만 할 우리의 처지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계속 성도들을 위하여 기적을 베푸시나 때로는 그 기적을 보류하실 때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지난 주일(117)에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을 내리면 내가 정한 시간표 보다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시간에 이어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은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 가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사로가 누굽니까? 죽었다가 나흘 만에 주님께서 살린 사람으로 이미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린 나사로, 그가 어떻게 해서 살아났는지? 그 기적의 단계를 예수님의 말씀과 그 주변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기적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로 정했습니다.

 

 

1. 기적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나타납니다.

 

41 돌을 옮겨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성경을 읽을 때 복을 사모하는 눈으로 보십시오. 항상 하라는 적극적인 말씀과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 가져오기만 하면 나와 가정과 교회가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복을 받는 은혜는 사람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나타내시기 전에 하라, 가라, 보라, 던지라 등의 말씀에 도전하게 하십니다.

 

순종하면 놀라운 일을 체험할 줄 믿습니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절대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안될 것이라는 부정적 사고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하라, 가라, 보라, 던지라는 말씀들을 만날 때는 적극적으로 도전하여 응답의 축복을 소유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놓으라 하시니.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문을 열어 놓으라는 전능자의 말씀입니다주님께서 나사로를 통한 기적을 나타내기 전에 먼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명하십니다.

 

이에 마르다가 못마땅한 반응을 보입니다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 말씀의 전후 문맥을 좀 더 세밀히 살펴봅시다.

마르다는 오빠 나사로의 죽음을 세상 이치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문상을 오신 예수님께서 무덤 문을 열어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오빠가 죽기 전에 오셔서 고쳐 주실 일이지 이제 일 다 끝났는데 왜 무덤 문을 열어 놓으라고 하십니까? 지금 보면 무엇합니까? 라는 퉁명스러움입니다.

마르다의 다소 불평처럼 보이는 대꾸 이전에 예수님과 마르다 사이에 나눈 대화의 내용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이 말씀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7절을 보면 마르다가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놓으라 하시자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5)라는 말씀을 미래의 말씀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현재 죽은 오빠가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르다는 비록 믿음은 확고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은 합니다마르다는 섭섭한 마음과 믿음의 약함으로 인해 원망은 하면서도 돌문을 옮겨놓는 일을 합니다.

이것이 마르다의 믿음입니다. 마르다는 자기의 마음이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아마 40절 말씀 때문인 것 같습니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2. 기적은 예수님의 음성이 임할 때 일어납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평범한 기적 육신의 삶에 관한 능력은 주님의 일차 명령에 순종하면 거의 일어납니다(, 고기를 많이 잡은 일, 각종 병자를 고친 일 등).

그러나 생명에 관한 신령한 차원의 기적은 주님의 일차 명령인 순종의 단계를 넘어서 전능자의 위대한 음성이 임해야 일어납니다. 이 사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놓으라 하시니…. 41 돌을 옮겨놓으니….

 

일차 순종으로 나사로가 살아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이차 명령, 전능자의 음성이 다시 임해야 합니다. 43, 4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전능자의 큰 음성이 지금 임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자를 산 자처럼 불러내시는 음성 앞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나오는 자가 나사로임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만일 그에게 베로 동인 것이 없이 나왔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 것 같습니까? 아마 주위 사람들이 나사로의 유령이라고 생각하여 불신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묘지에서 나사로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저 나오라고 하셨더라면 묘지에 묻혔던 모든 시체가 다 일어나 나왔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오라고 말입니다. 어디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까? 물론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여기 나사로 대신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따라 합시다. 일기야 나오라. 주님께서 나오라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슬픔과 원망과 좌절과 낙심과 염려의 무덤에 머물지 말고 나오십시오. 역하고 냄새나는 추한 것들에서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그것이 진정 새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모두 이름을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부르십니다. 내가 갇혀 있는 무덤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전능자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민족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교회가 살아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심령이 살아납니다.

 

요 0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내 심령이 죽었습니까? 생기가 들어가야만 살아납니다. 내 믿음이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처럼 되지는 아니했습니까? (37)

믿음이 소생하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만나야 합니다. 죽은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고, 죽은 믿음으로는 홍해를 건널 수 없고, 죽은 믿음으로는 심령이 살 수 없고, 죽은 믿음으로는 교회가 부흥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혁신의 생기가 들어 와야 합니다.

 

 

3. 기적을 체험하면 헌신의 삶이 나옵니다.

 

요 12:0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본서 저자 요한은 11장의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 이후에 특별히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 남매의 봉사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12:03은 나사로의 가정이 예수님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고 난 후에 주님을 위해 헌신과 믿음과 기쁨으로 봉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이 향유의 가격이 굉장합니다. 삼백 데나리온(12:05) 정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데나리온은 유대인의 화폐단위입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안식일은 쉬어야 했으니 연봉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순전한 나드 한 근이라 했으니 상당한 고급의 향유입니다. 당시에 유명한 인도산처럼 향유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아마 마리아가 부모님으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이든지 아니면, 그녀의 결혼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준비한 자신의 최고의 것입니다.

 

마리아는 무슨 생각으로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을까요? 가룟 유다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액수에 해당하는 물품을 말입니다. 달리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주님께서 삼 년 동안이나 자기들 가정을 사랑해 주신 일은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습니다.

위로의 말씀 은혜의 말씀 받은 것도 크고 마지막에는 죽은 오빠도 살려주셨습니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사랑과 은혜를 생각할 때 목숨이라도 드린들 그것이 아깝겠습니까? 가진 모두를 드려도 전혀 아깝지 않아서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왔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하여 감사의 잔치를 할 때, 오빠 나사로가 잔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는지,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는지,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 무슨 선물하는 지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님께 무엇을 드릴까? 이것만 생각하다 마침내 자기의 가장 귀한 것 향유 나드 한 근의 옥합을 깨어 주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그 귀한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는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26:07, 14:03 머리에 부음).

 

당시 사회에서 여자의 머리털은 여자의 상징입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묶어 다녔으며 만일 풀어 헤치고 다니면 창녀와 같이 취급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머리털로 발을 닦으려고 해보세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몸을 최대한 낮추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하인처럼 가장 낮은 자세로 취했습니다. 이는 향유를 붓는 사람의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하인처럼 겸손한 자세로 섬기며 헌신했다는 의미입니다.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의 가정에 믿음의 향기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헌신의 향유 냄새가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내놓으면 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열심을 냅니까죽는 일입니까? 아니면 사는 일입니까?

우리의 육신은 어디까지나 영혼을 담는 그릇입니다. 영혼을 담고 있기에 귀합니다. 그런데 영혼은 보지 않고 흙으로 돌아갈 육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요 12: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12:11 말씀을 나사로 대신 자기 이름을 넣어 읽어봅시다. (일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음이러라.

이 말씀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처럼 내 심령이 오늘 회생하면 그것이 기적임을 믿으십시오.

기적이 없는 믿음,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믿음이야말로 기름 없는 등잔과도 같습니다. 기도가 살아야 신앙 인격이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나사로 집은 초상집이었으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잔칫집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집에서 기쁨의 집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적 체험하기를 원합니까? 나와 예수님 사이에 막혀있는 돌문을 옮겨놓아야 합니다. 사람과의 사이에 막은 담도 옮겨놓아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돌문은 제거해야 합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생각과 고집과 편견을 멀리 옮겨놓아야만 기적을 누립니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Churchill, Winston) 경이 죽어 런던에 있는 성 바오르 교회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을 거행할 때 나팔수가 종탑 위에서 나팔을 두 번 불었다고 합니다. 요즘도 국장(國葬) 같은 경우에는 군인들이 예포로서 총이나 대포를 쏘기도 하죠.

첫 번째 분 나팔은 취침나팔로서 고이 잠들라는 것이고, 잠시 후에 다시 분 나팔은 기상나팔이었다고 합니다. 일어나라고 부는 것이 기상나팔 아닙니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기적이 일어났으니 이제 새롭게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 번 때 나팔처럼 새롭게 믿음으로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