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0년 말씀

(추수감사주일)감사하며 살겠습니다.(골 02:06~0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0. 11. 21.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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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흑인 청소부가 미국의 한 거리를 빗자루로 썰면서 온갖 불평과 욕설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곳을 지나던 흑인 지도자 고 마틴 루터 킹(1929,1,15~1968,4,4) 목사님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젊은 청소부를 향해 외쳤습니다.

여보시오, 젊은 형제 무엇이 그리 못마땅해서 그렇게 욕지거리를 하면서 청소를 하고 있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청소부의 답변이,우리는 인간이 아니요? 왜 우리는 백인들이 어지러 놓은 거리나 쓸어야 하고 백인들이 사용한 사무실, 화장실이나 청소를 해야 합니까? 더러워서 못해 먹겠소. 하면서 더욱 흥분했습니다. 그때 킹 목사님이 형제여, 당신은 지금 백인들의 길거리를 쓸고 있다고 생각지 말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라고 말하고 그 길을 지났습니다.

 

생각의 차이는 삶의 즐거움을 더할 수도 있고 감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모든 환경들을 대할 때마다 생각이 바뀌면 환경도 바뀔 수 있다는 관점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십시오. 오늘 우리는 2010년도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립니다. 금년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복에 감사드리는 이 예배에 놀라운 축복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골 02:0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0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고 믿은 자들 아닙니까? 이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감사를 넘치게 드릴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에게 감사할 일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감사의 제목들을 일일이 나열한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빠뜨린다면 그것은 감사의 의미가 그다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그는 참으로 곤고한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환난과 핍박을 늘 달고 살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감사함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이토록 감사를 외치게 하였습니까? 나 같은 죄인이 감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일이야말로 은혜 중의 은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성경에 감사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남긴 구약시대의 다윗 왕과 비교할 만한 분입니다.
지금 바울이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로마의 감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골로새서를 가리켜 일명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중에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구원의 은혜가 넘치고 있었기에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감사하라고 강조하는 겁니다(골 03:15~17).


바울이 감사의 생활을
강조할 수 있었던 그 근본적인 동기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의 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회복하였습니다.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서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을 이어 받을 사람들이기에 감사함이 언제나 넘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옛날 중국인들은 요. 순 임금의 백성 됨을 자랑하고, 영국인들은 대 주인 됨을 자랑하며, 그리스인들은 자유인임을 자랑하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희랍인들의 3대 감사에 대해 말하기를 ①금수로 지음 받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과, ②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과, ③그리고 야만인이 아닌 희랍인이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은 것 보다 더 감사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감사의 생활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천국 백성의 그 무리 가운데 속하여 있음을 깨달을 때 저절로 울어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은총을 아무 조건 없이 값없이 허락하심을 확신할 때 감사의 생활이 넘쳐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기록한 시편 중에서 자기의 영혼을 깨우치며 하는 말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02).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은 그 큰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감사함을 잊지 않고 늘 감사합니다. 를 고백하며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모든 일에 넘치도록 주실 줄 믿고  감사합니다.

 

고후 09:0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어떤 생각, 어떤 마음의 자세로 감사를 드리기 원합니까? 우리 인간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자이기에 우리의 먼 미래까지도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눅 0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바울의 생활을 보면 그의
생활 자체가 감사가 끊어질 날이 없었고,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감격이 사무쳐 있었습니다.
따라서 매일 매일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면서 감사를 표현하였는데 어떻게 이처럼 감사의 생활을 할 수가 있었으며 그 감사의 원인이 또 어디에 있었느냐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매사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적절하게 채워 주신 줄 믿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채워 주실 줄 믿고 감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고후 09:0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우리는 흔히들 모든 것이
다 평안하고 환경이 좋아야만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꼭 좋은 환경이나 편안한 생활 때문에만 감사한 것은 전혀 아님을 고후 11:23~27절에서 밝힙니다.


고후 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은 로마에 가서도 대부분 감옥에 있었으며, 일생은 거의 핍박과 환난과 곤고의 생활이었음에도 풍성한 감사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놀라운 감사의 비결이 어디 있었다고 봅니까? 하나님께서 매사의 생활에 필요한 영적 육적인 것을 적절하게 채워 주신 줄 믿었고, 앞으로도 계속 채워 주실 줄 믿었기 때문에 진정한 감사가 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빌 0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즉 육신과 물질의 외형적인 것만을 보지 않고 그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기 때문에 언제나 감사가 넘쳐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몸이 건강하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만 이렇게 병들고 몸이 괴로운데 무슨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을 합니다. 또 사업이 잘 되어서 많은 흑자를 내게 되었으면 하나님 앞에 감사드릴 수 있지만 사업이 그만 부진하여서 많은 손해를 보았는데 무슨 감사를 할 수 있습니까?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감사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의 몸이 건강해서, 혹은 그의 사업(장막)이 잘 되어서 감사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는 겁니다.


고후 12장을 보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육체 가운데 찌르는 가시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아 그가 분명히 심한 육적 고통을 당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고후 12:07~09).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도 그가 병이 나서 다른 곳에 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전도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울은 몸이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건강하기 때문에 그가 감사와 기쁨의 생활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리 몸이 건강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러나 적어도 바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순간순간의 모습들을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은혜로 볼 줄 알았으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3. 감사는 물질로도 나타내어야 합니다.


고후 09:0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그러니까 추수감사절의
절기가 제정 된 그 근원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하며 지내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하여 광야생활 40년을 거쳐 가나안에 들어갔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의 은혜로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아서 그 땅에 씨를 뿌리고 때가 되어 수확을 함으로 하나님께 눈물과 정성으로 감사의 절기를 지냈습니다(신 06:21~24).

만약 추수감사절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여 지킨다면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첫 수확한 잘 여문 벼를 골라서 이 자리에 가지고 나왔어야 합니다.그런데 우리 가운데 벼를 가져오신 분들은 한 분도 없지 않습니까? 꼭 농사를 지어야만 추수감사의 예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법 민법 제 253조에는 이런 조항이 있습니다.

①유실물의 습득(拾得). 유실물을 주웠을 때에는 경찰관서에 제출하거나 유실자, 소유자 등에게 급속히 반환하여야 한다. 경찰관서에 제출되었을 경우 경찰관서는 이를 공고하여 그 소유자가 밝혀지면 그것을 반환한다.
반환받은 자는 습득자에게 그 물건 값의 100분의 5내지 100분의 20의 범위 안에서 보상금(報償金)을 주어야 한다(유실물 법 04조).
물건을 찾아 준 사람에게 5~20퍼센트의 한도 내에서 사례를 하지 않으면 법에 저촉되는데 이럴 경우 물건의 주인이 처벌을 받게 되는 죄목은 감사하지 않은 죄에 해당합니다.


하물며 세상의 법에도
자신에게 유익을 끼친 사람에게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생명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다면 이는 얼마나 큰 허물이요 죄가 되겠습니까?

 

미국의 어떤 흑인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흑인들의 예배는 매우 열정적으로서 그들은 찬양을 부를 때도 그냥 입으로만 부르지 않고 온 몸을 다 사용한다고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여 조금만 은혜가 된다 싶으면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큰 소리로 화답을 하는데 어느 주일날 목사님께서 설교 중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앉은뱅이처럼 앉아만 있습니다.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화답을 해 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이어서 목사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교회가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일어나서 걷는 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뛰어가야 합니다. 교인들은 너도나도 신이 나서 맞장구를 치며 화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뛰어가야 합니다.

목사님은 더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세상은 너무나도 넓습니다. 우리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 그러자 모두가 동시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리는 날아가야 합니다. 날아갑시다.
목사님께서 흐뭇한 모습으로 교인들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시대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이 시간 구체적으로 작정을 해서 하나님께 헌금을 합시다.

그러자 조용해지면서 아무도 화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한 사람이 용기를 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로 하여금 예전처럼 다시금 앉아있게 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행여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 어떠한 희생과 헌신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더 큰 은혜, 더 큰 복을 내리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절로 감사함이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주고받는 말 중에서
서로 간에 기분 좋은 말이 무엇입니까? 여러 말들이 있겠지만 감사합니다. 또는 고맙습니다. 는 말일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외적인 형식과 더불어 내면의 자세이며, 그 내면의 믿음을 엿볼 수 있는 외적인 표가 바로 감사의 생활입니다. 작자 미상의 시 한 편이 좋아서 소개합니다.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깎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정부에 대한 불평불만의 소리가 많이 들리면 그건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데다가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질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 몸이 뻐근하고 피로하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이 메일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면 그건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모임을 하고 나서 치워야 할 게 너무 많다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나에게 불만을 토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래도 그가 내게 친구로 가까이 있음이 아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