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와 노인까지 합쳐 2백 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을 모두 없애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몽골제국을 건설하였고 한 때는 중앙아시아 지역과 인도, 유럽, 중국 등을 거의 정복하였던 역사의 인물 칭기즈칸(Chingiz Khan, 1167~1227)의 고백입니다. 세상에 있는 고난이라면 다 겪었다고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인물입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성도 아닙니까?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의 환경이 있을지라도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 함께 고난의 일들 때문에 고통할지라도 주님을 바라봄으로 극복해 나가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중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을 배경으로 열 가지 재앙을 체험한 후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합니다. 이내 바로 왕은 애굽의 병정을 보내 추격해 오고, 이스라엘 앞에는 홍해가 놓여 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떨면서 모세를 막 원망합니다(출 14:11).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가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안전하게 건넜고 마침내 애굽의 바로 왕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출 14:29,30)
이어서 시나이 반도 남쪽으로 행진을 계속해 나갔으나 무려 사흘 동안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없음으로(22) 큰 고통을 맞이합니다. 그럼에도 며칠 전 누렸던 구원의 감격을 간직한 채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 행진해 나가는 중 드디어 쉴만한 장소와 함께 물을 발견합니다만 안타깝게도 식수로 사용 할 수 없는 쓴 물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마라의 현장이 우리의 인생살이에도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인생길에 마라도 만납니다. 라는 제목으로 강론하려 합니다.
1. 우리 모두가 마라와 같은 환경을 만납니다. |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그토록 마시고 싶어 하던 물을 찾았지만 먹을 수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낙담이 됩니까? 이런 쓴 물은 약속의 땅을 향하는 이스라엘에게는 생존권까지도 위협하는 극한 고통입니다. 이런 환경이 꼭 이스라엘 민족뿐만 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찾아오는 환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이 쓴 물은 식수로서는 전혀 가치가 없는 물이며, 먹는 날에는 구토를 일으킬 것이고 보면 그 갈증과 고통은 오죽하겠습니까?
지금 마라에는 사람도 있고, 짐승도 있고,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금은보화가 넉넉하지만 그것들이 타는 목마름을 해갈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신앙으로 적용한다면 이 세상의 물질은 그 어떤 것이라도 영적 목마름을 채울 수 없음을 암시하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라의 현장을 단면적인 신앙으로 판단할 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의 손길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가는 그 길은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으로 더욱 넓고 푸른 초장의 오아시스가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다 싱싱한 과일과 채소도 풍성하게 있어야 하고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를 못하니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요,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이런 일들이 우리의 의문점이요 숙제거리입니다. 또한 우리의 살아가는 현실도 사실 그렇게 뜻대로 잘되어지지 않고 있는데 여기에 현대인의 고민과 한숨이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일들이 내 맘과 뜻대로 잘되기만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관을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가 있고, 건강할 때가 있으면 병들 때도 있듯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성도에게도 때로는 고난의 때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길이 비록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일지라도 어려움을 만날 수 있고, 믿음 생활을 잘하는 직분자라고 해서 문제가 없거나 시험이 없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환난을 만날 수도 있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병으로, 어쩌면 사업의 실패로, 나의 능력이 모자라서 행하는 일들에 마라와 같은 난관을 만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은 분명히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또 결국은 좋은 축복의 길로 인도해주실 줄 믿음으로 결코 요동치 않는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
2. 마라의 현장을 만날 때 원망을 제하여야 합니다. |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이스라엘 백성의 입술에서 나오는 원망, 이 원망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이 원망이 축복의 문을 가로 막음에도 이스라엘은 원망과 불평의 자세가 좀처럼 제거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계속되는 이 원망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중 출애굽 1세대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하루에 수만 명이 죽는 징계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 아래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광야생활 초반에 저들에게 연단의 과정을 주셨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실패하고 맙니다.
민 20: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리스도인에게 내재하는 옛 사람의 속성 중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원망이며 이 원망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요롭고 능력 있는 삶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 생활 초기 단계에 연단의 과정을 허락하시고 그 연단의 과정 속에서 옛 사람의 속성인 원망이 뿌리째 뽑히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원망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하시며? 원망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의 벌까지 내리셨으며? 원망이 무엇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꼭 뽑아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원망이란 변화되지 못한 자아, 거듭나지 못한 자아, 반드시 죽어야 할 자아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축복된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24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쓴 물이 솟아 나오는 마라에 도달했을 때 그 실망의 환경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물을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도달한 곳에서 먹을 수 없는 물이 나오자 즉시 지도자 모세에게 원망의 반응을 보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원망하기 시작했다고요? 목이 마르고 자신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만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이유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사흘 전 홍해를 건넌 후 시나이 반도의 한 오아시스에서 물을 마셨고, 또 언제 오아시스를 만날지 모르기에 물을 넉넉히 준비하여 떠나왔습니다. 그리고 사흘 길을 걸어서 시나이 반도 남쪽으로 행진을 하였는데 이때는 아쉽게도 오아시스도 우물도 전혀 발견하지를 못했습니다. 대신 애굽을 떠나올 때 함께 가지고 온 소와 염소, 양 등 가축들과 패물들만 있을 뿐입니다.
출 12: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사흘 동안 물 없는 광야를 지나는 중에 가축들이 하나씩 둘 씩 쓰러지기 시작했고 갖가지 소지품들, 무거운 금은보화들은 가지고 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물이 없으므로 목도 말랐지만 그보다는 지쳐서 자신들의 소유물들을 광야에 버리고 가야 할 처지에 이르자 쓴 물 앞에 선 백성들은 모세를 크게 원망한 겁니다.
목마름보다는 사흘 동안의 시간들을 돌아볼 때 잃어버린 소유물들, 쓰러진 가축들, 무거워서 버린 것들에 대한 미련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건강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죽음의 사선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넘었기 때문에 모세에 대한 원망과 불평보다는 또 다른 기적을 기대하면서 감사와 찬양을 돌리지 않았을까요?
3. 마라의 현장을 이기는 방법은 부르짖음입니다. |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간절히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물이 없어 고통당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모세가 더 답답하고 괴로웠을 것이며, 그 많은 백성을 사흘 동안 물 한 방울 먹이지 못했으니 지도자로서는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변명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함께해 주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만 바라면서 오직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이에 모세에게 한 나무의 가지를 꺾어 물에 넣도록 처방전을 제시하십니다. 나뭇가지가 무슨 신비한 능력이나 효험을 가지고 있어서 물에 넣으라고 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순종을 통해서 이적과 능력이 나타남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심과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도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도 하나님께 대한 기도와 순종에 있음을 일러주시고자 함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이스라엘 앞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던짐으로 쓴 물이 즉시 달아지는 이적을 나타내었는데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영적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①첫째는 쓴 물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백성들은 원망했지만 모세는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원망은 문제를 더 얽히게 하는 요소지만 기도는 문제를 푸는 열쇠이며, 원망은 저주와 징계의 조건이 되지만 기도는 용서와 축복의 조건이 됩니다.
②둘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한 나무를 던졌습니다. 아무 나무나 던진다고 해서 쓴 물이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슬프고, 괴롭고, 한심스러운 삶에 제 아무리 감미로운 세상의 향락과 안일을 설탕 치듯 친다고 해서 그 삶이 치료되겠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고침을 받고 단물처럼 맛있고 가치 있는 삶을 소유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야지 다른 길이나 묘약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 나무는 마라를 고치고 치료하는 매개체이지 그 자체에 특별한 효험이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님을 조금 전 말씀드렸습니다.
26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26). 우리가 진실로 고침 받고 치료받기를 원한다면 모든 것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도 내 영혼을 고치시고 쓰리고 아픈 환경을 능히 고쳐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매사에 불평과 원망만 하던 출애굽 제 1세대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그 누구라도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쓴 물을 단물로 고치신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한 그들이 계속 행군하여 엘림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곳엔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시원하게 솟는 물 샘 열 둘과, 종려나무 칠십 주가 우거져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그들이 조금만 더 참고 행군했더라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치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걷는 인생길에도 마라와 같은 고통이 있습니다. 쓴 인생이 있고, 쓴 사건이 있고, 빈곤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근심이 있고, 절망도 있습니다. 마라의 쓴 물처럼 있기는 있는데 먹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겪는 고민의 순간도 있겠지만 불신하고 원망하면 안 됩니다.
오직 모세처럼 기도하고 그리고 엘림을 향하여 전진을 하여야 합니다. 엘림까지만 가면 그곳엔 시원한 생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고 나무숲이 있습니다. 마라의 고통을 겪은 사람일수록 엘림의 축복이 더 값지고, 감사할 것 아니겠습니까?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도 마라의 현장과 같은 고난의 환경을 혹 만났습니까? 모든 아픔과 고난은 보다 좋은 유익을 낳는 씨앗이다. 는 말이 있으며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 본 경험이 없고 자기 침대에 앉아서 울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가져 본 경험이 없는 이는 하늘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행여나 닥쳐오는 고난의 현장이 있습니까? 그 모든 것들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품안에서 해결함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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