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사용되는 조크(joke) 중에 뿌려지는 크리스천(Sprinkling Christian)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평생에 세 번 정도 교회와 연결됨을 말합니다.
①어린 시절 유아 세례식 때 물이 뿌려지고, ②결혼식을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설 때 쌀이 뿌려지고, ③장례식의 하관식 마무리 절차에서 치토(取土) 시 흙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유럽에선 네 바퀴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네 바퀴만 타고 교회 오는 신자란 뜻으로 ①유아 세례식 때 유모차를 타고 교회에 오고 ②결혼식 때 네 바퀴 자가용 타고 교회 오고 ③죽어서는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네 바퀴 영구차를 타고 교회에 온다는 뜻이지요.
일생에 세 번만 교회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교인이기는 하나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나안 교회 성도를 비유하는 말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이는 일에 등한히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현실만 보아도 모이는 생활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의 교회 예배에 대한 모임에 열정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자가 예배 모임을 등한히 하면 이는 신앙의 위기에 빠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속히 고치지 않으면 신앙의 파선에 이릅니다. 그래서 제목을 「예배드리는 일에 올인합시다.」로 정했습니다.
1. 정보 매체의 발달로 소망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1세기는 정보 매체(媒體)의 발달과 더불어 인스턴트 시대가 되었습니다. 영성이 없는 사람들은 영성이 없는 예배를 집에서 바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웬만한 소식은 즉석에서 해결되기 때문에 굳이 희생과 수고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많은 사람이 매너리즘에(mannerism) 빠져 있습니다. 신자들에게 편리주의가 찾아왔습니다. 꼭 교회에 수고롭게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집에서도 스위치만 누르면 예배드릴 수 있는 환경입니다. 사실 Radio, Video, T. V, Computer 등 예배할 수 있는 매체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무엇보다 무교회주의자들의 영향이 우리를 찾아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꼭 예배당에 가야만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나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지 않느냐? 정 바쁠 때는 교회 안 나가도 다 이해하신다.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십일조는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주의 산물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아니냐?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구원 주신다는 성경 구절이 어디 있느냐? 하며 억지 해석을 가져다 붙입니다. 이런 현대의 신앙 분위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한 마디로 힘써 모이자고 정의합니다(25).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2. 진리가 심령에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예배 모임은 주님께서 주신 지상 명령의 출발점입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은 신자가 세상에 사는 동안 실천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예배의 모임을 통하여서 교제를 나누라 하셨습니다. 은혜를 받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신앙의 본거지를 이탈하지 말고 모임에 힘쓰라는 명령입니다. 신앙의 모임이 없으면 주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인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주님의 지상 명령 실천에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믿고 안 믿고는 상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바로 이런 일들을 진행하기 위한 첫 단계가 예배의 모임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예배 모임 친교의 모임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 모임이 잘 안된다는 사실이 우리의 고민거리입니다.
당시 상황을 추정해 보면 신앙인의 모임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을 가지는 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 학파들은 자기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공적 모임을 경시하고 오히려 방해까지 하였습니다.
신비주의 계통의 신자들은 자기들은 깊은 진리를 터득하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모임을 아주 경멸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성도들의 모임이 등한히 되었습니다. 신앙인의 열정이 점점 식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진리의 혼돈이 옵니까? 그 진리를 바로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럴수록 믿음의 공동체 모임을 사모해야 합니다. 모이는 일에 더욱 진력해야 합니다.
상황이 좀 안 좋고 이유가 좀 있다고 예배의 모임을 등한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마지막은 파멸과 지옥의 길밖에 더 있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생활도 더러는 교회에서 의견 충돌이 생깁니다. 의논이 맞지 않으면 가나안교회 교인으로 돌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보십시오. 모두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모두가 정상의 신앙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가 심령에 자리 잡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2.5.~1899.12.22)에게 한 청년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주일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무디가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요지가 무엇입니까? 청년은 예배 참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일 성수를 잘못 해도 그 마음에 열심을 품고 있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무디는 마침 난로에서 잘 타고 있던 조개탄 하나를 불집게로 집어 꺼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한동안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들고 있던 조개탄은 곧 시커멓게 꺼지고 말았습니다. 무디는 조개탄을 청년에게 보여 주며 보이는가? 이후 젊은이는 깨닫고 돌아가서 좋은 성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신앙이 미지근하여도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기도하면 신앙생활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예배 생활을 등한히 하여 교회 밖으로 나가면 신앙은 저절로 식어버립니다. 노력 없이 요행을 바라는 일은 죄입니다. 믿음의 가족은 일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3. 주님께서 예배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
요 0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신자가 건강한 믿음 생활을 유지하려 하면 교회 중심, 예배 중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자는 주님을 머리로 하는 천국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 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복과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서 좋은 것을 찾으려고 예배를 등한히 하는 헛수고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야말로 복중의 복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배를 통한 은혜와 기쁨의 생활이야말로 신실한 신자의 표시가 아닙니까? 우리는 예배의 방관자나 구경꾼이 아닙니다. 예배의 참여자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런데 왜 사소한 구실을 찾고 찾아서 예배에 빠지려 합니까?
손님이 왔다고요? 아이가 아프다고요? 거래처 고객이 왔다고요? 물론 만나야지요. 너무 피곤하다고요?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배와는 바꾸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왜 그렇게 핑계하여야 합니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는 개인의 일을 후 순위로 미루는 결단을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을 주실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되는 삶이 무엇입니까? 불신자의 삶은 육체의 향락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반면 신앙인의 삶은 신령한 영적 삶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임은 항상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누가 어려운 환경에 있는가? 서로 협조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폈습니다. 그리고 도우며 구제할 방법 마련에 힘을 기울이다 보니 신령한 은혜 생활을 잘 누렸습니다.
나의 예배관이 어떠합니까? 조금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안 나오지요? 속상해도 안 나오고, 마음에 안 맞아도 안 나오지요? 육신의 일거리만 생겨도 안 나오는 그런 습관을 고칩시다. 이런 일들이 과연 바람직하다고 여겨집니까?
하나님께는 근심거리가 됨을 기억하십시오. 목회자에게는 기도 거리가 되고요. 건강한 신앙인의 증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배를 생명처럼 여기는 일입니다.
예배관이 정립되지 못한 분들은 사소한 일에도 예배를 등한히 여기고 빠집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열심히 모임에 나오십시오. 예배의 모임이야말로 하나님을 직통으로 만나는 길입니다.
출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회막과 성전을 짓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와 만나기 위해서 이 집을 지었으니, 여기에 나오라. 이런 뜻입니다. 우리의 제일 큰 복은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는 것입니다.
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과 만남에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풀어갈 수 있는 은혜를 받습니다.
교회를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불러 모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영적 건강은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를 통하여 말씀 듣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믿음 생활에서 우선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신성한 본분입니다. 마땅한 의무입니다. 거룩한 목적입니다. 예배는 신자가 하나님께 부여받은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여기에서 인생의 보람과 가치와 존귀성을 인정받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존귀성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그 본분도 의무도 포기하는 일입니다.
믿음이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지요. 하나의 연극 무대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완전하지는 않아도 신실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에 예배에 대하여 얼마나 진실이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정성이 있느냐를 보십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분은 정상의 신앙 성장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아십시오. 예배 생활을 바로 할 때 자기 신앙이 성장할 수 있으며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배 생활을 등한히 함은 축복을 상실할 줄 명심하십시오. 예배 생활에 깊은 정성을 기울여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암 0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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