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4년 말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민 13:25~33, 14:01~2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4. 12. 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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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상황을 바꾸려 할 때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사고(思考)의 틀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주어진 고정 틀 안에서 이것저것 바꾸는 게 아니라 틀 자체를 바꾸는 것을 가리켜 패러다임의 전환의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미국의 한 구두 회사가 새로운 시장을 찾아 아프리카에 조사단을 파견하였는데 얼마 후 현지에 간 조사원의 보고가 왔습니다. 현지 사람들은 거의가 맨발이며 구두 같은 것은 신고 있지 않다는 보고입니다. 본사에서는 이 보고를 받고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그 조사원을 철수시켰습니다.

 

같은 시기쯤에 경쟁 회사에서도 아프리카에 조사원을 파견시켰습니다. 얼마 후 현지에 간 조사원의 보고가 왔는데 그 사람의 보고 역시 먼저 파견되었던 조사단의 보고처럼 현지 사람들은 거의가 맨발이며 구두 같은 것은 신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일한 내용의 보고임에도 조사원을 나중에 보낸 회사는 맨발의 사람들은 훌륭한 고객들이다. 판매의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고 결국 잠재적인 시장을 개척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창조적이며 또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느냐를 시사 한 내용입니다.

 

교회설립 19주년을 맞은 저는 비장한 각오로 오늘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모든 생각들을 믿음으로 전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 되었으니 바꾸어 봅시다. 앉은뱅이 믿음을 탈출하여 나도 살고, 교회도 새롭게 도약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로 정했습니다.

 

 

 1. 사람의 생각에 초점을 맞춘 보고를 보겠습니다.

 

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와 바란 광야에 잠시 머물고 있을 당시의 상황을 먼저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때 각 지파의 두령들이 모세에게 나아와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약속의 땅이지만 무턱대고 나아갈 수 없지 않습니까? 가나안을 정탐하여 효과적으로 정복할 수 있는 대안을 냅시다. 하며 모세에게 요청을 합니다(01:21~23).

그러자 모세는 백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각 지파에서 대표자 한 명씩 열두 명을 선발(13:01 ~16)하여 사십일 동안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보활동을 하도록 사명을 맡겼습니다. 그리하여 열두 명이 제각기 정보활동을 하고 돌아와 보고를 하는데 이때 르우벤 지파의 대표자 삼무아가 앞장서서 보고를 합니다.

 

처음에는 대단히 희망적인 보고를 하였으나(26,27) 28절에 와서는 이스라엘의 희망을 끊어버리는 것과 같은 절망적인 보고를 합니다. 28절의 시작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에서부터 문제가 감지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며 안 된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절망적인 동요를 일으킵니다. 이번에는 삼무아 외에 다른 지파의 대표자 9명이 또 합세를 하여 더 부정적인 말을 하는데 한 번 볼까요?

 

31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33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왜 이런 보고를 합니까?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주시겠다는 거듭된 약속(17:08; 50:24; 03:08,17)이 있음에도 불신앙으로 사람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삼무아를 비롯한 열 명의 정탐꾼은 현실의 불가능처럼 보이는 것만 보았지 배후에서 역사하시며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 사로잡히면 안 되는 것만 생각하고, 부정적인 것만 보며, 늘 소극적인 자세로 패배 의식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사물을 좋게 보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불평의 말을 쏟아내기 때문에 그 말을 듣는 사람까지도 서서히 부정적인 생각으로 오염이 됩니다.

 

삼무아를 중심으로 한 열 명의 보고를 여러분의 사고로 분석해 보십시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많이 체험하였습니까? 그럼에도 인간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해보지도 않고 적의 외형 앞에서 우리는 약하다, 싸워 보았자 안 될 것이다. 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열 명의 보고처럼 이스라엘이 정말 약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힘을 실어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힘을 실어주실 것입니다.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하시는 사람으로서 출애굽 후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한 세계 최고의 지도자입니다. 이제 불신앙의 결과가 어떤지를 좀 살펴봅시다.

 

14:0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0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0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0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2.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 보고를 보겠습니다.

 

14:0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이 절망 되도록 부정적인 보고를 한 자들에 맞서 긍정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자 여호수아와 유다 지파 대표자 갈렙입니다(14:06). 이들의 보고를 눈여겨보십시오.

현실이나 자신들의 약한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경으로 한 번 도전해 보자. 그러면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사고입니다. 앞서 열 명의 정탐꾼들 보고를 무조건 부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도 꼭 같이 가서 보고 왔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만 보면 승산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나안으로 전진하자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면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경으로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부정적이며 절망적인 보고에 맞서 과감하게 믿음으로 외치는 말을 다시 봅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대단한 고백입니다.

앞서 열 명의 보고자들은 하나님이 없는 불신앙적인 보고만 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면 가나안 원주민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확신의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같은 상황을 보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은 이렇게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예수님도 겨자씨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운다고 하였습니다(11:23).

 

14:0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경으로 가나안 원주민 일곱 족속을 점검해 보고 난 후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까지 고백을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에요.

먹는 일처럼 즐거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결과를 우리의 먹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전쟁에 대한 승리의 확신입니까? 그러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부정적인 현장에 맞서서 긍정적으로 보고한 그 용기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오랜 세월 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조상들에게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약속을 심령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7:0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는 이스라엘에게는 미래의 꿈을 가지게 하는 말씀이요, 자자손손이 전해져 오는 말씀입니다. 모세와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이 말씀을 따라 나왔고, 요셉도 애굽에서 총리로 지내다 임종할 무렵 가나안을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주실 것이라 고백하였습니다(50:24). 이제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가 진행되는 동안 주위의 분위기는 아주 살벌하여져 갔고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합니다.

그렇다고 그 발언을 취소하거나 굽혔습니까? 아닙니다.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담대하였으니 이런 용기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나오는 것이며,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11:38). 위기의 순간이 진행되는 숨 막히는 현장이요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상황을 만나자 마침내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십니다.

 

14: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12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3. 열두 명의 보고 이후의 그들의 인생길을 보겠습니다.

 

14: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불신앙의 보고를 한 열 명의 정탐꾼들, 지도자 모세가 그들을 보낸 뜻을 헤아리지 못한 그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 줄도 모르고 비관적인 보고를 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선언을 하십니다.

불행한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 상대적으로 비교를 하여 메뚜기와 같다 라며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두려움은 판단력이 흐려지며 영적인 시각도 흐려집니다. 그 약속의 땅에서 정보활동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높은 성벽만 보고 온 것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사로잡히고 확신이 올 때 담대한 신앙인이 되며,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고 기대가 없을 때 신앙의 자리에서 이탈됨을 알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한 지파의 대표자들, 대표자라는 이름값도 못하고 말았으니 차라리 대표자로 안 뽑히는 것이 제게 좋을 뻔 한 일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 멤버로 부름을 받은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주님을 배반하여 팔고 떠난 후에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놓고 그 직분을 상실한 자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0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의 사람들, 부정적인 보고에 편승하여 모세를 돌로 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던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광야에서 재앙으로 죽고 말았습니다(14:36,3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청지기로서 여러 직분들을 맡겨 주실 때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는가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믿음의 눈으로 높은 성벽 보다는 자신들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와서 믿음의 보고를 하였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역사의 주역이 됩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이런 복된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지 간단히 살펴봅시다. 지도자 모세가 열두 명에게 가나안을 정보활동을 하게 한 목적은 어떻게 하면 그 험난한 산지를 공략하여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한 방법을 찾기 위함입니다.

양자 간에 비교 우위론을 내세워 상황에 따라 포기하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은 모세가 자기들을 가나안에 보낸 그 깊은 뜻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정보활동을 하고 믿음으로 보고를 한 것입니다.

 

항상 역사의 주역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 나름대로 독특한 사고를 가지고 그 시대의 사람들과는 좀 다르게 살았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다수가 안 된다고 낙심할 때 그것은 가능하다고 외치면서 그 가능성을 찾아 일을 성사시키는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꿈을 꾸는 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1492년까지 스페인이 통치하고 있었던 지브랄 탈 해협(대서양과 지중해 만남)에는 네어, 블루스, 울트라라는 세 글자의 라틴어로 된 작은 표지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어로 NO MORE BEYOND 즉 이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당시 스페인과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곳이 지구의 끝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이 지구의 끝을 용감하게 박차고 넘어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는 저 건너편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지구의 끝, 참담한 벼랑만이 기다리고 있다던 그 곳에는 새로운 미지의 대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표지판에서 첫 글자 NO를 제거했는데 NO라는 단어가 빠지니 이제는 MORE BEYOND 그러니까 저 건너편에는 많은 것, 놀라운 것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믿음생활에 NO제거하고 삽시다. 나의 적극적인 사고와 행동 그리고 NO를 제거한 믿음의 말에 의해서 성공은 다가 올 것입니다. 이미 김해삼일교회에 심어졌으니 이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으십시오. 이제부터 우리교회 역사를 새롭게 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믿음으로 앞날을 개척해 나갑시다. 우리 모두가 20주년의 놀라운 역사를 내다보면서 큰 믿음과 사명으로 교회를 세우고 지경을 넓혀가는 일에 잘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