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4년 말씀

나는 거룩한 제사장입니다.(벧전 02:04~09 )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4. 12. 2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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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님(함안군, 1902,6,3~1950,9,28) 하면 여수의 애양원에서 나환자들을 위해 평생 목회를 하신 분으로 떠오르실 것입니다. 일본 강점기 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셨고, 해방 후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는 두 아들을 좌익 폭도들에게 잃었습니다. 나중에는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이는데 주동 역할을 한 안재선이라는 사람을 용서하고 대신 아들로 삼았으며, 625 때는 피난가지 않고 나환자들을 돌보다가 공산군에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 분의 호()가 산돌입니다. 이름은 태어날 때 지어주지만 호는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미로 짓습니다. 그래서 호에는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의 호를 왜 산돌이라고 했는지, 언제 산돌이라고 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호를 산돌이라고 정한 이상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더욱 힘을 쓰셨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돌이 많이 등장합니다. 05,06절에는 산돌이 나오고, 6절에는 모퉁잇돌, 07절에는 모퉁이의 머릿돌, 08절에는 부딪치는 돌과 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 등입니다. 어떻게 보면 수석 집과 같은 느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여기서 산돌을 제외하고는 모두 구약성경의 돌에 대한 수식어를 한 자리에 모은 것으로서 이 돌들은 모두 예수님을 상징하는 용어들입니다. 이 돌들의 영적 교훈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산돌이 되어, 09절 말씀처럼 거룩한 제사장이 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지를 살피면서 나는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산돌이신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0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이 말씀을 기록한 저자가 누구입니까? 베드로입니다. 이 베드로가 우리에게 예수님께 나아갈 것을 권하면서 특별히 예수님을 은유[隱喩]적 표현으로 산돌이라 소개합니다. 베드로가 어느 성경 기자도 예수님을 산돌이라 하지 않았는데 유독 자신만이 예수님을 산돌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그 배경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열두 제자의 멤버로 부르시고 새로운 이름을 주셨을 때 이름이 무엇이죠? 베드로입니다.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시몬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새 이름 베드로(반석), 이 명칭이 당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시몬은 서서히 믿음의 베드로가 되어갔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황혼기를 맞아 하나의 편지를 적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자가에게 주신 이름을 생각하며 이번에는 자기도 예수님을 돌이라고 표현합니다. 돌을 수식하는 산돌(livingstone). 더러는 하필이면 돌이야, 하실 분도 있겠지만 저는 예수님을 산돌로 표현한 베드로의 영적인 감각이 아주 멋있어 보입니다.

 

04절에서 이름을 딴 세계적인 선교사요 탐험가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어떤 인물인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스코틀랜드,1813,3,19~1873,5,1.), 곧 산돌이라는 뜻인데 이름이 아주 고상하지 않습니까?

돌의 특징은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입니다. 만일 돌이 물렁물렁하다면 돌이라고 할 수 없겠죠? 우리는 가끔 돌처럼 굳은 사람이라는 말을 합니다. 차갑고 냉정한 사람을 수식하는 말인데, 이런 돌이 생명체가 있어서 살아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간혹 예술의 세계에서는 돌이 살아 있다는 표현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의미를 그렇게 부여한 것일 뿐 돌은 원래 생명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산돌로 표현을 합니다. 베드로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을 산돌로 표현을 한 것 같습니까? 어떻게 해서 살아있는 돌이라고 하는 지, 그 영적 의미를 잠깐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적인 사건들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쓸모없는 돌멩이 수준으로 낮추었습니다. 거기다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희롱을 하다 마지막엔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이런 일들을 놓고 성경 저자들은 예수님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과 같은 격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버린 돌과 같은 예수님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굴려내어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구원의 돌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살아서 꿈틀거리는 강력한 힘이 용솟음치는 돌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산돌이신 예수님께 나아오는 우리도 강력한 힘을 받게 됩니다. 살아있는 믿음 말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이 살아있는 생명의 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옴으로 인해 살아있는 돌이 되었다는 비유를 충분히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05절에 너희도 산돌같이 되라고 강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제부터는 예수님께로 나아오기만 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산돌이 되고, 살아있는 믿음, 기초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2. 산돌처럼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05 너희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우리가 산돌이신 예수님께 나아오는 목적을 우선 세워지기 위함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세워져야 합니까?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여기 세워지고 라는 동사의 형태를 보십시오. 세우다 는 말은 본래 건축자의 건축 행위 아닙니까? 그러나 세워지고 라는 이 수동적인 형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말씀하신 동사와 동일합니다(16:18).

베드로는 사람들이 단지 교회에 나아왔다고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산돌이신 예수님과 영으로 연합되어야만 그리스도인이 됨을 밝힙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가치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자들과의 연합을 통해서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데 있습니다(12:01; 15:16; 고전 03:16).

 

그러면 신령한 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어떤 집으로 세워지는 것을 말합니까? 요즈음 주택 건축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잘 짓는지 모릅니다. 잘 지은 집과 좀 조잡하게 지은 집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은 결코 세상적인 집이 아니라 믿음의 집, 신령한 집입니다. 이 신령한 집의 재료는 세상적 요소가 아니라 신령한 요소이어야 합니다. 05절을 잘 보십시오. 너희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집을 짓는 설계도와 그 건축 자재가 산돌이신 예수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재미있는 돌 시리즈를 잠깐 봅시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식 이름으로 예수님이 시몬에게 붙여준 칭호입니다. 베드로도 나중에 예수님을 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당신은 돌이다 하면 기분 좋아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머리 나쁜 사람을 가리키는 일종의 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산돌이라 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 역시 산돌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대해 좀 기분이 나쁩니까? 나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단의 중, 고등, 대학부를 sfc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sfc 동기수련회의 명칭을 알돌 수련회라고 부릅니다. 이는 산돌이신 예수님을 알아가자는 의미인거죠. 부르고 듣기에도 참 좋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비유하는 돌, 사람들에게는 버린바 된 이 돌을 가지고 그의 나라를 위하여 신령한 집을 지으셨고, 지금도 계속 지으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인을 제사 직에 연결시키고 있음을 유의해서 보십시오.

베드로가 우리에게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라 하는 그 집은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56:07; 11:17). 개인을 위한 집이 아니라 신령한 공동체를 위한 집, 말입니다. 건축자에게는 쓸모없어 버려진 돌 같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신령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심같이(118:22), 우리도 신령한 집을 지어져 가는 공동체의 기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0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어느 정치적인 모임에서 나온 건배사의 이야기입니다. 술 한 잔씩을 들고 축배를 올리며 선창하는 이가 외쳤습니다. 주전자. 주전자가 무엇이냐면 사람들은 주체 의식이 있어야 하고, 전문지식이 있어야 하고,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도 산돌이신 예수님을 기초로 신령한 집이 세워지려면 역시 주전자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주체의식이 있어야 하고, 믿음의 전문지식이 있어야 하고, 믿음의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과대평가하면 교만이고, 반면 자기를 과소평가하면 비굴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정확히 평가하는 것은 자부심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의 자부심으로 신령한 교회를 잘 세우도록 합시다.

 

 

 3. 예수님 때문에 거룩한 제사장이 됩니다.

 

0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 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율법을 잘 지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계획 아래서 하나님과 열방 사이를 중재하는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19:06).

그러나 육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서 그 특권을 상실하였고(11:20), 이제 이 특권은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산돌이신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왔기 때문에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 직을 수행하는 제사장의 길이 열렸습니다(12:01).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천지개벽의 소리입니다. 구약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로 이어지는 제사장들만이 제사장인 줄 알았는데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 하니 정말 온천지가 놀랄 수밖에 없는 뉴스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을 해 봅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세례 받았다고, 교회에 몇 번 나왔다고 저절로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과 내가 만남으로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제사장이 될 지니라 하면서 제사장이 될 것을 권합니다. 이제 우리는 베드로가 권하는 말을 따라 제사장이 되었으니 그 신분이 어느 정도인지 09절로 확인하겠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왕이라고 했으니 이는 높은 특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특권 중의 특권이 왕이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 분을 섬기는 일입니다(10:19).

이제 우리가 신령한 집, 신령한 교회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았으면 어떻게 생활을 하여야 합니까? 무엇보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신령한 제사란 성령님의 감동을 입어 드리는 영적 제사로서 그 제물은 바로 자신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신령한 집에서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역할을 잘 감당합니까?

 

제사장 말이 나왔으니 좀 더 제사장에 대한 용어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제사장은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bridge maker). 끊어진 두 지점, 반드시 연결해야 할 곳을 연결시키는 역할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된 우리는 누구와 누구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합니까?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입니다. 제사장의 목표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는데 있고, 제사장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에 있습니다. 바울의 제사에 대한 견해를 볼까요?

 

12:0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사장 나라 백성답게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진 사람을 하나님께로 올려드리는 제사장의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길 잃은 양을 찾기 위하여 세상을 다녀야만 합니다. 제사장의 삶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에서 그저 묵묵히 일만 하면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한 청년이 한 날은 모퉁이에서 목사님을 만나 목사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담뱃갑이 툭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목사님도 한참이나 담뱃갑을 쳐다보고, 이 청년도 담뱃갑을 주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얼른 주워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모퉁이 짚단 더미에서 무릎을 꿇고 담뱃갑을 쥐어뜯으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담배를 끊지 못해서 목사님 앞에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뿐만 아니라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끊을 수 있도록 제가 그 역할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다짐을 하고는 열정을 품고 수고를 하여 은단공장을 세웠습니다. 또 세상 모든 사람들의 건강을 돕기 위해서 비타민 C를 개발해서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고려 은단 창업자 조규철 회장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그의 아들 조창현 장로님이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이분이 고려은단, 비타민 C를 팔아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 가문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보여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많은 생각 속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을 다니면서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소중히 여기신다고, 보물 같은 존재들이라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이디어를 하나 내었습니다.

고속도로를 차로 달리면서 잘 보이는 높은 언덕에 광고판을 크게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Jesus loves you.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한때는 전국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는 Jesus loves you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리의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서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서야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 그리고 직장에 산돌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십시오.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해 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