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2년 말씀

나의 신령한 신분을 아십니까? (롬 01:01~0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12. 9.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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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을 한 해를 돌아보면 즐거운 일보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한 해가 저무는 12월 둘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음을 축하하는 성탄절에 앞서 1127일부터 4주간을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해서 대강절(待降節) 혹은 대림절(待臨節 Advent)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가족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달에 자기 위치와 신분을 더욱 잘 점검하십시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세상에 사는 동안 아래 4가지 질문에 대해 분명한 답을 할 수 있으면 성공한 인생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①나는 누구인가? 라는 존재에 관한 질문입니다.

②나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 라는 소속에 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가 아니면 세상에 속해 있는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③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라는 사명에 관한 질문입니다.

④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미래에 관한 질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런 질문에 어떤 신앙의 답을 할 수 있습니까? 답변 여부에 따라 성공의 삶이냐 아니면 실패의 삶이냐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로마서 서론인 01~07절 말씀을 중심으로 나의 신령한 신분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자기를 잘 돌아보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나의 신령한 신분이 어떠합니까?

 

0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 바울은 자기의 신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밝힙니다. 그런데 여러분 종이라고 하니 어쩐지 별로 좋은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가끔 곁에 있는 사람에게 궂은일이나 잔심부름시킬 때 그쪽에서 기분이 별로 안 좋으면 내가 네 종이가? 나를 종으로 취급하나? 라는 말로 응수해 옵니다.

교회에서는 종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종이라는 말도 자주 들으니 좋게 들립니다. 더러는 조금 좋게 호칭한다고 종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말은 아무래도 적합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신학교 졸업 후 일찍 목사 임직받은 젊은(28) 목사님이 나이가 많은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예배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저를 위해 기도할 때 젊은 종, 어린 종 그러는데 듣기가 좀 민망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나이가 드신 목사님이 답을 하십니다. 여보게, 그 말은 차라리 좋은 말이야. 우리 교인들은 나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노() , 늙은 종이라 한다네. 그럴 때는 정말 참을 수 없다네. 하고 답했습니다.

여러분 용어 신중해야 합니다우리 교인 가운데도 저와 이야기하면서 목사님은 늙었고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저야 부담 없이 넘길 수 있지만 신중해야 합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종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로마 제국의 참혹한 종의 제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노예 혹은 종이라는 말은 자기를 매우 비하하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종을 인격의 가치를 논할 필요가 없는 일종의 일하는 도구로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은 일할 때 주로 세 가지 도구를 사용합니다. 말을 할 수 없는 도구로서 연장이나 기계 반말 대상으로서 짐승 동물 그리고 말하는 도구로서 종입니다.

 

왜 종이 됩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잡혀 왔거나, 많은 부채를 지고 갚을 길 없어 팔렸거나, 종의 아들로 태어난 경우입니다.

사도 바울은 종의 신분이 되면 자력으로 해방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라고 표현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이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불릴 가치가 있습니다. 종은 3대 부정이 따라야 하는 신분입니다.

 

나는 주인이 아니다. 즉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인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처지입니다나의 소유가 없다. 다 주님의 것이고 세상을 떠날 때는 이 모든 것을 두고 갑니다. 인간관계에 금이 가고 갈등이 생기는 것 다 소유물 때문입니다.

나는 자기를 주장할 권리가 조금도 없다. 주인이 마음대로 나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그런 생각을 가집니까

교회 생활에서 세 가지를 부정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면 혼란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2. 나의 사명이 어떠합니까?

 

0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0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앞서 종은 주인의 소유물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종은 일할 때 안 됩니다. 라는 말 대신 복종만 있습니다. 신령한 면에서 종의 사명은 복음을 위해서 절대 순종입니다.

종에게는 주인의 말이 절대 법입니다. 주인이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 절대복종의 신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기면 마음 편합니다. 나는 죽은 자다.

 

조지 뮬러(George muller 1805~1898.3.10.). 고아의 아버지로 불린 뮬러는 나는 어느 날 죽었다. 조지 뮬러에 대하여 죽고, 세상 친구들 칭찬이나 책망에 대하여 죽었다.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5.21.~1905.6.3.). 중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 테일러 선교사는 하나님께 모두 바치니 번민할 일이 전혀 없다.

 

종은 모든 영광을 주인께 돌리는 존재입니다. 자기에게 특권은 없고 오로지 감당해야 할 의무와 책임만이 있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모든 것을 바치되 자기가 잘났다고 우쭐하면 안 되는 신분입니다. 착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주인에게 영광을 돌리고 겸손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생활에서 겸손한 태도를 보일 때 주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종은 나가서 일해야 하는 신분입니다. 종은 절대 충성만 있는 신분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신령한 면에서 종의 사명을 잘 유지합니까?

종은 목장에 가서 일하고 농장에 가서 일하고 포도원에 가서 일해야 하듯 나도 주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자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종이 아닙니다.

종의 삶은 교회에서도 열심히 일하여야 하지만 사회에서도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공직자도 공복(公僕) 정신을 가지고 일하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되겠습니까?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주님의 종으로서 일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고전 04:0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0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종은 나가서 일하고 들어오면 또 섬기는 일을 하는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나가면 일하고 들어와서도 일하는 것 이것이 종의 역할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나는 찬양대 합니다. 교사합니다. 안내 맡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은 못 합니다. 식사 당번도 못 합니다. 청소 당번도 못 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종의 삶은 겸손임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밖에서 일하고 안에서 섬기는 일 대단합니다. 나를 몰라준다고 투정할만합니다

그리고 좀 수월하신 분과 비교하면 대단히 귀한 일을 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입니다. 종의 자세는 겸손과 복종입니다. 종은 공치사(功致辭) 받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과대평가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분이 종이기 때문입니다.

 

눅 17:0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08 도리어 그더러 내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3. 나의 믿음 소속이 어디입니까?

 

0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06절 말씀을 보면 나의 소속이 어디인가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속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살전 02:12). 그러면 이제 우리는 주님의 사람이요 주님 나라의 일꾼입니다.

주님께서 영원히 거하실 세계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입니다. 바울은 영원한 세계에 소속된 것을 최고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모든 것을 그 나라를 위하여 아낌없이 드리고도 즐거워하였습니다.

 

빌 0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예수님께서 칠십 제자를 파송한 후 그들이 전도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할 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바울의 생애를 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당하는 환난과 고통을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기뻐하였습니다.

또 마지막에는 순교까지 하였습니까? 바울은 세상의 삶은 잠깐이며 후에는 영원한 세계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소망이 그의 마음에 넘쳤기 때문입니다.

 

딤후 04:0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이 말씀에 아멘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기진 사람입니다(01:08). 이제부터 천국 시민으로서 영원한 세계를 향한 꿈을 이 땅에서 실천하십시오. 분명히 삶의 가치관이 새로워지고 활력도 솟아날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히십시오. 세상의 것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영원한 영광의 세계 천국을 바라보십시오. 소망의 기쁨으로 남은 세월을 사십시오.

 

스데반. 신령한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하늘 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행 0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사람은 세 종류의 친구가 있습니다. 첫째는 재물 친구입니다. 이 친구는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친하게 지내며 도와주기도 하는데 생명 떠나면 함께 떠납니다.

둘째는 친척 친구입니다. 이 친구는 세상에서 서로 교통하며 영원히 잘 지낼 것 같은데 역시 내 생명 떠나면 장지(葬地)까지만 동행해 주고는 그만 떠납니다.

셋째는 믿음 친구입니다. 이 친구는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함께하면서 바른길 가게 하다가 내 생명 끝난 후에는 주님 앞에까지 동행하여 줍니다. 스데반은 셋째 친구를 잘 둠으로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 육신으로는 고통이지만 순교라는 복 중의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0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종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신령한 면에서 이해한 것이지 세상 기준으로 종에게 붙이는 호칭은 종놈입니다. 천대하는 용어입니다그러나 신령한 면으로 받으니 이 호칭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말씀을 맺으면서 04절 주라는 의미를 당시의 배경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종과 대칭되는 주님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에게 생사가 걸린 단어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유럽과 중동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로마 황제를 가이사라고 불렀습니다. 또 로마시민은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황제 신전에 가서 분향하며 가이사는 주님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했습니다. 싫어도 해야 하는 억지 강요입니다.

 

그리고 황제를 주로 고백한 사람에게는 증명서를 주었습니다. 이런 증명서가 있어야 물건을 매매하거나 어떤 특권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현대식으로 한다면 로마 황제가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신용카드나 은행 계좌를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주님을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라 부르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또한 황제 신전에 가서 가이사가 주님입니다. 라는 고백을 거부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당시 가이사가 주님이라는 고백을 거부하였다고 원형 극장으로 끌려가 굶주린 사자에게 물려 죽은 그리스도인이 무려 6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 형태의 불이익을 견디다 못한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위하여 물질세계를 포기하고 지하로 산속의 굴로 숨어들었습니다종이라는 신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내 던지는 결단입니다그러나 우리는 그런 환난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마음 놓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자유가 있을 때 마음껏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