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 나라 사람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 덕담을 주고받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 이 덕담이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2021년은 날마다 코로나19 안부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무서우니 조심하라는 배려의 인사는 아무리 나누어도 듣기 좋은 말입니다.
신약성경 대부분 서신은 상대에게 복을 빌어주는 덕담 인사로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야고보, 유다 등이 이런 인사였습니다. 오늘 살펴보는 요한이서는 13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01~03절과 마지막 13절이 복을 빌어주는 인사입니다. 덕담으로 시작하여 덕담으로 마치는 인사입니다.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남긴 본서를 점심시간에 한 번 더 읽어보십시오. 덕담과 안부를 전하는 인간미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본서의 저자 사도 요한이 자신을 장로(Ὁ πρεσβύτερος 호 프레스뷔테로스)인 나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베드로도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하였습니다(벧전 05:012).
본서의 저자 요한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장로라고 호칭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치리(治理) 장로가 아닌 나이가 많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장로는 구약 시대에서부터 시작된 호칭으로(출 03:16, 24:09. 민 11:16) 신약 시대에 와서는 말씀 사역자와 감독에게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딤전 03:01, 딛 01:07).
그래도 구분한다면 감독은 직분의 성격이 강하며 장로는 신분의 측면이 강합니다. 장로에 관사 Ὁ(호)가 있는 것은 요한과 수신자 간에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는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수신자가 누구입니까? 문자 자체로 보면 정숙한 부인(κυρίᾳ)과 그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여기 부인은 교회를 지칭하는 상징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향한 메시지로 받을 수 있습니다(13). 따라서 제목을 「은혜와 긍휼과 평강의 복을 받읍시다」로 정했습니다.
1. 사도 요한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선언합니다. |
0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03절은 요한이 선포하는 ㅇ리종의 축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임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가운데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아론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향해 선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민 06:27). 이 내용을 신약 시대에 와서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 바울이 그대로 선포하였습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는 덕담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은혜와 긍휼과 평강입니다.
우리의 일상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사모해야 합니까? 잘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믿음의 눈을 덮어버리면 분별력이 떨어집니다.
은혜(χάρις 카리스). 감사, 친절, 돌봄 등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첫째 표현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은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김삼일 가족은 이 은혜 때문에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을 때 가장 행복하고 입술에는 아름다운 반응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때 우리가 사람답게 보이고, 행복을 누립니다.
사람의 힘만 가지고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복된 길에 이르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은 운이 따라야 한다. 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입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심을 믿습니까? 아멘.
엡 02:0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0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긍휼(ἔλεος 엘레오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죄인의 용서도 하나님의 은혜도 모두 아버지와 아들의 긍휼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심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긍휼을 거두시면 구원도 소망도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 베푸는 참으심(딛 03:05)과 고통 중에 있는 자를 향해 동정심으로 대해(눅 17:13, 18:38) 주시는 것이 긍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멸망하지 않고(애 03:22) 지냄을 아십니까? 김삼일 가족 여러분, 아멘으로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아멘. 믿습니까? 아멘.
히 0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평강(εἰρήνη 에이레네). 평강은 안전, 행복, 건강, 번영, 평안 등의 다양한 의미를 뜻합니다. 단순히 전쟁(불화) 없는 적막한 평화가 아닙니다. 평강은 세상 모든 사람이 원하는 복 중의 복입니다.
이 평강이란 단어는 상대 개념으로 평강을 깨뜨리는 세력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평강은 기쁨과 복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놀라운 은혜를 동반합니다.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임하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성격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열두 제자를 찾아오셨을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제자들을 선교의 현장으로 파송하실 때도 너희에게 평강(εἰρήνη)이 있을지어다(21). 제자들이 계속되는 두려움 속에서 문을 굳게 잠그고 있을 때도 예수님께서 그 현장을 찾으시고 하신 첫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εἰρήνη)이 있을지어다(26).
김삼일 가족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평강 베푸심을 믿습니까? 아멘. 믿습니까? 아멘.
2.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 임합니다. |
0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요한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임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진리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입니까? 먼저 진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진리(ἀλήθεια).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판결하기 직전 심문 과정에서 진리가 무엇이냐 하고 물었습니다(요 18:38). 그러나 묻기만 하였지, 답은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진리에 대한 말은 하였지만, 관심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대인 대부분이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러고도 유대교 지도자들은 진리를 잘 안다고 자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 0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진리라 할 때 무엇이 떠 오릅니까?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그 진리라고(요 14:06)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진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진리입니다. 또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이 말씀은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찌르기까지(히 04:12) 합니다.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본서를 구성한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성경으로 이단자들의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여 물리치라는 명령입니다. 진리의 가치는 분별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전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절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비슷한 상대 진리는 따로 없습니다. 진리에 대해 눈이 어두워지면 그때는 비 진리인 불법이 판을 칩니다.
사랑(ἀγάπη). 신약성경에는 두 가지 사랑 형태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아가페와 필레오(φιλέω)입니다. 아가페는 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사용되는 용어로서 생명과 관계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을 뜻합니다.
필레오는 인간의 사랑, 조건이 붙는 사랑, 친근하고 우정을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이 용어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 가운데 나옵니다(요 21:15~17).
초대교회 시절 교회에서 친교의 인사를 나누는 입맞춤이 바로 이 아가페(ἀγάπη)입니다(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1, 살전 05:26, 벧전 05:16). 따라서 03절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대부분 축도의 내용이 은혜와 평강 선포였습니다. 이에 비해 요한은 은혜와 평강에다 긍휼을 추가하여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처럼 선포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하여야 받을 수 있는지까지를 밝힙니다. 축도했다고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 안에 거할 때 임합니다.
이 세 요소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확증되었습니다. 진리와 사랑이 없는 곳에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거하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반드시 진리와 사랑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진리와 사랑이 있는 곳에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머물 수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이 말하는 윤리와 감성과 이성의 터전에는 이런 신령한 것이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성경 말씀이 있는 곳에 임합니다. 세상 사람은 이런 은혜를 아무리 사모해도 받을 수 없습니다.
3. 우리 모두 진리를 행하는 기쁨을 누립시다. |
0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십시오. 요한은 01~03절에서 인사를 끝낸 후 먼저 나는 심히(λιαν) 기쁜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기쁜 일입니까? 요한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자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 진리의 말씀에 바로 선 자들이 교회에 있다면 기쁨의 근원이라 하였습니다.
심히 기쁘도다(χαίρω λιαν). 기쁨은 좋은 일입니다. 요한은 기쁨의 근거를 04절에서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성도가 교회에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많은 성도에게 기쁨을 줍니다. 즐거움을 선물합니다. 이런 신령한 기쁨이 바로 행복입니다.
전도자 바울의 일상을 한번 살펴봅시다. 기독교인치고 그만큼 고난과 박해를 받은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살전 05:18). 바울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외치던 때가 언제입니까?
돈이 좀 넉넉할 때입니까? 아닙니다. 세상 즐거움이 넘쳤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알아주던 명예 때문입니까? 이 역시 아닙니다.
바울은 이런 세상의 것으로 기쁨을 삼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이 믿음으로 서고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 자신이 순교의 제물이 될 수 있다면 그런 일을 기쁨의 요소로 여겼습니다(빌 02:17).
04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요한이 누리는 기쁨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보는 것이 기쁨의 근거라고 말합니다. 여기 행하는 자(περιπατέω 페리파테오)의 뜻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문자 자체로 보면 물건을 사기 위해 시장 구석구석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는 의미입니다. 행한다는 말의 의미가 잘 정리되지 않습니까? 진리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순례자처럼 다닌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요한이 기록한 요한삼서를 보면 가이오를 향해 같은 표현을 하였습니다.
요삼 01:0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성도가 진리의 말씀 따라 복음을 전하는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의 가족이 행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지 결론이 나옵니다. 복음을 들고 동서남북으로 다니는 일입니다.
발로 다녀도 되고, 차로 다녀도 되고, 인터넷으로 다녀도 됩니다. 그래서 현대는 방송 선교사, 전파 선교사라는 용어도 사용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알면서 행하지 않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는 일입니다. 바울은 전도자가 가는 길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 10:15).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 01:0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평소 두터운 우정을 자랑하던 두 친구가 함께 여행을 나섰습니다. 외진 산길을 걷고 있었는데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걸은 탓에 고단해진 두 친구는 잠시 휴식을 취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수풀 사이로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보고 다가가 보니 금덩이가 하나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친구는 그 금덩어리를 주워 친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기뻐서 큰 소리로 말합니다.
이건 금덩어리 아닌가? 우리 횡재했네. 횡재야. 그러자 금덩어리를 주운 친구가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지면서 친구에게 말합니다. 이보게, 우리라고 하지 말게 주운 사람은 나니까 말이야.
그리곤 두 친구는 어색한 상태로 다시 여행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요란한 소리에 뒤를 보니 금덩어리를 잃은 산적들이 금을 찾기 위해 두 사람을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금덩어리를 가진 친구는 다급하게 친구에게 말합니다. 이걸 어쩌나! 저 산적들에게 잡혀서 금덩어리 있는 것이 발견되면 우리는 정말 죽게 생겼네. 그러자 친구는 무표정한 채로 말합니다. 우리라고 하지 말게. 금덩이를 주운 사람은 자네 아닌가?
예, 김삼일 가족 여러분, 함께라는 공동체 의식이 없으면 이런 친구의 관계가 됩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가꾸며 섬기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함께 마음을 모아 일을 하고 받들어 섬기는 진리와 사랑의 공동체에 은혜와 긍휼과 평강의 복이 임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은 나 혼자 일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일도 나 혼자의 일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일합시다. 진리를 따라 행하는 일도 우리 모두의 일임을 가슴에 품고 믿음으로 전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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