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많이 사용하였던 말이 있습니다. Welbeing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한 단어가 더 붙었습니다. Welbeing에 이은 Welldying입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웰빙 웰다잉에 이어 또 한 단어가 등장하였습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고 잘 죽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이도 잘 먹는 Wellaging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웰빙이라 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죽은 것을 웰다잉이라 하며 사람이 사람답게 늙어가는 것을 월에이징이라 합니다. 2021년 농사에 실패하면 2022년에 잘 지으면 됩니다. 대학도 직장도 올해 떨어졌으면 재수해서 내년에 잘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인생은 한 번뿐인 생방송입니다.
녹화방송이 아니기 때문에 중간에 사고가 나도 수정하지 못합니다. 그대로 끝납니다. 되돌리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안타깝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Wellbeing, Welldying, Wellaging 살 수 있을까요? 그런 삶을 산 모델을 찾아 본받으면 됩니다. 성경에서 그런 삶을 산 사람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모세입니다. 모세의 삶을 돌아봅시다. 모세는 그만하면 사람답게 잘 살았습니다(웰빙). 사람답게 잘 죽었습니다(웰다잉). 사람답게 잘 늙었습니다(웰에이징).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 것 같습니까? 세상의 삶보다 신령한 세계의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비스가산에서 인생 마무리한 모세」로 정했습니다.
1. 하나님께서 모세를 느보산으로 부르십니다. |
0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모세 나이 120세입니다. 고령인데도 느보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렀다고 나옵니다. 느보산에는 세 개의 봉우리가 있습니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835m 정도 되며 중간은 790m 그리고 모세가 올랐던 비스가산은 710m 정도 되는 봉우리입니다.
느보산이나 비스가산은 모두 아바림 산맥(32:49)에 있는 고봉(高峯)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느보산을 비스가산 꼭대기로 언급합니다. 정확한 번역은(KJV) 모세가 느보산 곧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랐다는 뜻입니다. 이 비스가산 정상은 가나안 땅을 조망(眺望)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입니다(32:49).
모세는 40세까지 애굽의 궁중에서 학문과 문화를 익혔고, 40세부터 80세까지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일을 하며 세상 이치를 익혔습니다. 80세부터 120세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한 일에 전심전력하였습니다. 사람의 나이는 세상 나이, 건강나이, 정신 나이 신령한 나이 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정신과 건강과 열정에 따라 젊어 보일 수도 있고 폭삭 늙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지면 젊게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죽음이나 건강보다 재산 정리에 신경을 더 씁니다.
애지중지하게 형성해 놓은 부동산이나 은행 통장 숫자를 매일 쳐다봅니까? 그러면 통장 숫자보다 10배 정도 뻥튀기하십시오. 그래야 노후가 편합니다. 목사님 언제쯤 그런 뻥튀기 해야 합니까?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오늘 점심시간에 간식 들고 방에 앉아서 놀 때 10배 정도 튀기면 됩니다. 그러면 주위 분들 시선이 확 달라집니다. 특히 우리 교회 아들딸과 며느리 입이 얼마나 싼지 아십니까?
입이 간지러워 남의 어머니까지 돈 많다며 막 불고 다닙니다. 그러면 노후가 편하고 오늘 저녁부터 대하는 것이 확 달라집니다. 그러니 싼 티 내지 말고 좀 넉넉한 척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특별히 모세를 임종을 앞두고 비스가산에 오르게 하십니다. 이 산이 우리나라의 금수강산처럼 아름다운 곳입니까? 우리나라 금수강산은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비스가산은 전혀 그런 것과 다릅니다. 애굽에서 나와 맞닥뜨리는 시나이반도부터가 벌거벗은 산입니다. 비스가산 아무리 강한 자연인도 살 수 없습니다. 대부분이 바위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혹 우리를 산으로 부르신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이왕 부름을 받는다면 어느 산으로 부름을 받으면 좋겠습니까? 무척산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모세는 요르단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헙니다. 하나님 이왕 산으로 부르시려면 백두산으로 불러 주십시오. 왜냐하면 한민족의 정기가 서려 있는 백두산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산입니다. 이곳을 올라가는 곳이 북파 서파 남파 세 곳 있습니다.
저는 북파와 서파 두 곳으로 1월부터 12월까지 월별로 다 다녀왔습니다. 17번 이상 될 겁니다. 그래서 백두산 관광 안내는 해도 이제 직접 가지는 않습니다. 고생만 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비스가산으로 부르신 것은 세상 사람에게 무덤을 알리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모세의 무덤이 요르단 시내에 있다면 우상의 도시가 될 수 있습니다.
2. 장차 이스라엘이 들어갈 곳을 보게만 하십니다. |
01….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0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0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모세의 최고 소원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을 멀리서 바라보게만 하십니다. 저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 살지는 못해도 한 2박 3일 정도로 돌아보고 올 수 있는 배려를 해 주시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모세가 비스가산에서 바라본 가나안 땅 동서남북을 보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고센 땅에 살던 때를 제외하고 광야 생활하는 동안 파종할 수 있는 땅을 조금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동서남북 가까운 데서부터 먼 곳까지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지금 모세가 바라보는 곳은 사해(해발 -430.5m)로부터 1,200m 이상 높은 고지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황금 땅과 같습니다. 그 당시의 문화에서 보면 정말 아름다운 땅입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민수기 20장에 나오는 므리바 사건 때문입니다. 이 므리바 사건이 성경에 두 번 나옵니다.
첫째 사건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이르러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곳에 마실 물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며 모세와 아론을 비롯한 가족을 돌로 쳐(출 17:01, 02) 죽이려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불러 세우고 호렙산에 올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한 반석을 치라. 이에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치니 과연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와 물 문제를 넉넉하게 해결했습니다.
둘째 사건은 민수기 20장 말씀입니다. 일명 가데스 므리바 사건입니다. 03절을 보면 백성이 모세와 격렬하게 다툽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무슨 말입니까? 물이 없다고 모세와 다투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과 지도자에 대하여 감사가 사라지자 그 순간 사탄이 틈을 탔습니다.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 생활을 한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불평과 원망을 청산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데스 므리바에서 40년 전과 같은 원망을 또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내 형 아론과 온 회중을 모으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백성들의 완악함을 알고 혈기를 내어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했습니다. 물 문제는 해결하였지만, 그 혈기 때문에 가나안의 꿈은 끝났습니다.
민 20: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광야 생활 마지막 40년이 끝나갈 무렵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시기에 모세가 혈기로 약속의 땅 가나안의 꿈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신 일은 상당히 난해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모세가 수고한 일이 얼마나 많으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에 있는 모세를 불러 쓰실 때는 언제고 혈기 좀 부렸다고 가차 없이 버리시는가? 라는 난제가 등장합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 영역에 속하니 우리가 더는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을 바라만 보라고 하십니다.
3. 하나님은 모세에 대한 우상 숭배를 막았습니다. |
0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0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 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어. 모세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한때는 애굽의 왕자로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나 그런 세상 화려함을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인 동족과 고난받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히 11:24, 25). 이 모세가 120세를 일기로 모압에서 죽었습니다.
무엇보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고 나옵니다. 모세는 마지막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모세의 장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만큼 살펴봅시다. 벳브올 맞은 편 모압 땅 골짜기로 나오는데 이곳이 어디입니까? 벧브올로서(בֵּיתּ פְּעוֹר) 모압의 신(神) 브올을 예배하던 산입니다.
많은 학자가 모세가 장사 된 모압 땅의 골짜기는 비스가산 근처의 한 골짜기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만 이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의 형 아론이나 누나 미리암은 장지가 있지만, 모세의 장지는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장 미가엘을 통해 모세의 시신(屍身)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장사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셨습니까?
유 01:0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만일입니다. 모세의 무덤을 요르단 땅 골짜기에서 찾았다고 합시다. 그것이 고고학으로 검증되었다고 합시다. 모세의 무덤을 구경하기 위하여 요르단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 것입니다.
이스라엘 이상으로 엄청난 관광객이 몰릴 것입니다. 그러면 산악지대에 있는 요르단,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요르단도 관광대국이 될 것이고 경제도 제법 든든해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면 성지순례를 하는 분들에게 이스라엘을 거쳐 요르단 모세의 무덤을 반드시 들리는 코스가 나옵니다.
그러면 저도 진작 다녀왔으니 여러분에게 모세의 무덤이 이렇다 저렇다 좀 실감 나게 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세가 죽었을 법한 곳을 멀리서 짐작 정도만 합니다.
어떤 분이 모세가 죽은 장소 거의 짐작되느냐고 묻더라고요? 이렇게 답했습니다. 모세의 묘지는 해수욕장에서 잃어버린 바늘 찾는 격으로 여기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장소가 알려져 있으면 오히려 전도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 말입니다. 모르는 게 좋습니다.
사탄은 모세의 무덤 만들기를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섬기는 것은 좋은 일 아니냐는 일로 미가엘 천사와 다툼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 모세는 이런 일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합니까?
십계명을 받고 시내산에서 내려 올 때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으나 나중에 알고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출 34:33~35).
하나님을 대하는 모세의 신관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만일 모세의 무덤이 있다면 어찌 되었을 것 같습니까?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이 그 무덤 표지판을 만져서 반들반들 닳아졌을 것입니다.
가톨릭 마리아상 발가락을 보십시오. 얼마나 만지고 빨고 입을 맞추었으면 닳아서 광이 나겠습니까? 이것이 모세의 무덤이다. 라고 적어 놓으면 모든 사람이 우상으로 섬길 것은 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감추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B.C. 1407년 11월 말경 모세는 120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그때 모습을 보면 그의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07). 모세 자신의 관찰에 의하면 당시 사람의 평균 수명은 70세였고 건강하면 80세였습니다(시 90:10). 모세는 그 시대의 사람이 세상을 마칠 나이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였습니다(행 07:30~36). 그러면 모세가 일반 사람과 비교해서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강철같은 체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특별 사명을 맡은 자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힘으로 살았습니다(사 40:31). 무엇보다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좋겠지만 못 들어간다고 크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천국의 모형이요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후손들이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쓰임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교회 일도 내가 주인공이 안 되어도 됩니다. 다른 사람이 영광을 받아도 됩니다. 나는 그 일에 표시가 안 나도 쓰임만 받으면 됩니다. 하늘나라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이 우리에게 가장 귀한 삶입니다. 우리 모두 바라보는 것이 세상 것이 아닌 신령한 천국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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