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에서 들으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말 하나가 있습니다. 너는 죽는다. 라는 말입니다. 남을 향해서는 예사로이 하는 말이지만 누가 나를 향하여 너 곧 죽는다. 이 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태어난 이상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제가 설교하는 이 순간에도 죽음은 서서히 다가옵니다. 그러면 이 죽음에 대하여 나름대로 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냥 지나가려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족을 모아 놓고 믿음의 유언을 한다면 이라면 매우 귀한 일입니다. 저는 묘비에 이런 글만 새겨주면 됩니다. 행석(幸石) 목사 이일기. 제 블로그의 닉네임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내세울 것 조금도 없는 것이 저 자신입니다. 그런데도 거룩한 나라에 참여하여 많은 영광을 받았으니 이만하면 복 중의 복을 받은 삶입니다.
주님은 산돌이라 하셨는데(벧전 02:0) 저는 자신을 행복한 돌이라 부릅니다. 이제 10월, 11월은 네 번째 짓는 예배당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다 마친 후에는 하나님께서 데려가셔도 덜 섭섭할 것 같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구약에 나오는 왕들 행적을 자주 읽으십시오. 간단하지만 그들의 생애와 최후에 대한 여러 모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다 왕국의 5대 왕 여호람의 이야기도 볼 수 있습니다.
여호람이 삼십 이세에 왕의 자리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대하 21:20).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수 있는 행적입니다. 우리 모두 곧 세상을 마칠 때가 옵니다. 후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여 보십시오.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형태를 종말론의 삶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7월 25일에 전한 아마샤 왕의 집권 전반기에 이은 후반기의 행적입니다.
전반기의 삶은 나름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웃 나라 세일과 전쟁에서 승리하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보다 자신을 과신하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동시에 우상 섬기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말년의 삶이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신하에게 칼에 찔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아마샤 왕이 어떻게 해서 이런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그 통치 일정을 열람하면서 그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따라서 말씀 제목을 「우상 중심으로 다스린 아먀샤 왕」 이렇게 정했습니다.
1. 아마샤는 에돔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우상 주의로 돌아섰습니다. |
14 아마샤가 에돔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한지라.
아마샤는 왕권 초기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힘썼습니다. 0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나옵니다. 정적을 제거하는 일에도 그 후손까지 멸하지는 않았습니다.
왕권 초기 군주로서 포용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남방을 침략한 에돔과의 전쟁을 치를 때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선지자의 조언을 받고 사람의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결과 불안한 국방 문제를 잘 해결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마샤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승리하였으면 하나님께 크게 감사를 올려야 하지 않습니까?
당시 아마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에돔을 정복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전쟁은 승리하면 상대 진영의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아마샤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전리품으로 가지고 온 것 중에서 에돔 사람이 섬기는 여러 우상을 가지고 온 일입니다. 그것을 물품 창고에 보관하다 어느새 전 안에 세우고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 배척하는 일입니다.
경배하며(שָׁחָה 샤하). 몸을 구부리다, 절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무엇 때문에 절합니까? 이방인들처럼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거기다 분향(קָטַר 카타르)까지 하였습니다.
분향이란 희생 제물을 불살라 그 연기(향기)를 올려보낸다는 뜻입니다. 아마샤가 제정신 아닙니다. 거기다 자기 혼자만 그렇게 섬깁니까? 우상을 설치하는 과정과 섬기는 과정에서 모든 신하까지 동원하여 섬겼습니다. 먼저 14절을 통해 혼동할 수 있는 지명 하나를 정리하겠습니다.
에돔과 세일이 교차하여 나오는데 이는 같은 의미입니다. 세일은 에돔을 가리키는 별명이기 때문입니다. 사해 남쪽 아라바 동쪽의 고산 지방에 에서의 후손들이 거주함으로 붙은 별명입니다.
아마샤가 에돔과 전쟁하여 전리품으로 가지고 온 우상의 특징이 무엇이며 어떻게 섬깁니까? 이에 대해서는 저자가 설명을 생략하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모압이나 암몬 사람에 관한 글에서도 에돔은 성경 외의 다른 문헌 자료와 고고학 자료에서 거의 전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문헌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우리는 이 신의 이름을 코스(Qos, Qaws)라고 짐작합니다.
앗수르의 왕들이 에돔을 파괴하고 조공을 받은 기록에 의하면 디글랏빌레셀 (B.C. 745∼727)과 산헤립(대하 28:20 B.C. 705∼681년) 때 에돔 왕의 이름이 코스말락이었습니다. 코스 신은 왕이라는 의미인데 모양이 뿔이 달린 진흙 여신상으로 그 규모는 웅장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문제는 왜 우상을 가지고 왔습니까?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외형을 섬깁니다. 아마샤는 보이는 신이 더 믿음직하고 감동을 준다고 여겼기 때문에 우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예로 광야 시절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고서 이것이 하나님이라 명한 일이 있습니다.
출 32:08….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아마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우상의 화려함과 웅장함이 더욱 든든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마음의 위안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다 왕국에 이런 우상을 도입하여 하나님 대신 세웠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에돔을 물리치게 해 주신 일을 그만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밀어낸 셈입니다. 모세가 광야 시절 이스라엘에 특별히 내린 법이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그 십계명 가운데 제3계명을 기억하십니까?
출 20: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2. 아마샤는 에돔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 교만에 빠져버렸습니다. |
17 유다 왕 아마샤가 상의하고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오라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
아마샤가 상의하고. 모사를 구하거나 조언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에돔을 치러 가기 전에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인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면 어떤 조언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까?
이스라엘과 한판 하자는 조언입니다. 이스라엘과는 솔로몬 왕 이후 나누어진 국가로서 형제국가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와 전쟁을 한다는 말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에돔 나라의 우상을 도입한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이스라엘과 전쟁하자고 하니 도무지 미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행동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전쟁을 위한 사신을 보냅니다.
오라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 정식 선전 포고문입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샤가 에돔과의 전쟁에서 선지자의 말을 듣고 은 백 달란트의 막대한 금액을 포기하고 이스라엘 용병 10만 명을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군이 화가 나서 사마리아에서부터 벧호론까지 여러 성읍을 약탈하고 사람도 삼천 명을 죽이며 많은 물건을 노략질해 갔습니다(10). 이스라엘군이 왜 이런 일을 벌입니까?
어마어마한 돈을 피도 안 흘리고 벌어들였는데 말입니다. 이는 에돔과의 전쟁에서 이겨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스라엘과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아마샤의 입장에서 아무리 마음이 상해도 이스라엘과 전쟁을 선포하는 일은 절제해야 합니다. 군주 시대에서는 힘이 없으면 자존심을 굽혀야 합니다. 자존심 앞세우다 나라가 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마샤는 에돔을 물리친 결과를 하나님 은혜가 아니라 자기의 능력으로 믿었습니다. 이쯤 되면 교만이 하늘에 도달합니다. 한 나라의 군주가 교만에 빠지면 온 백성이 고통당합니다.
유다 왕국 아마샤 왕의 교만은 망국의 길입니다. 교만에 빠져 있는 아마샤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아마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에돔 사람이 섬기는 우상을 도입하여 섬길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진노란 응징(시 06:01)과 징벌(삼하 06:07)의 표현입니다. 15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셔서 한 선지자를 보냅니다. 선지자가 왕에게 충고합니다. 에돔 사람이 섬기던 그 신이 자기 백성도 구원하지 못했는데 왕은 어찌 그 신들을 가져와서 섬깁니까? 라는 충고입니다. 이에 대한 아마샤의 반응을 보십시오.
16 선지자가 아직 그에게 말할 때에 왕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왕의 모사로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하니….
아마샤가 선지자에게 하는 말을 보십시오. 우리가 너로 왕의 모사(謨士)로 삼았느냐? 이 문구의 의미는 어찌하여 네가 우리의 일을 간섭하느냐? 라는 뜻입니다. 아마샤는 지금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돔과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기고만장해 있습니다.
아마샤가 에돔을 치러 나갈 때는 하나님의 선지자 말을 따랐고 은 백 달란트의 비용도 포기한 과감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이놈 자식 너 좀 맞을래 입니다.
절대 할 수 없는 상식에 반하는 말입니다. 이쯤 되면 답이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답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막가파 아닙니까? 이런 교만이 이스라엘 왕에게도 알려졌습니다.
19 네가 에돔 사람들을 쳤다고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 도다. 네 궁에나 있으라 어찌하여 화를 자초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3. 하나님 앞에 우상과 교만은 심판이 임합니다. |
20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들이 에돔 신들에게 구하였으므로 그 대적의 손에 넘기려 하심이더라.
심령이 굳어진 아마샤는 선지자의 예언(16)을 무시하고 계속 우상의 길로 달려갑니다. 전혀 돌아올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심판 내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라는 말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마샤가 강퍅한 마음을 품을 때 내버려 두셨다는 뜻입니다. 아마샤의 교만과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면 이건 심각한 일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할 때 하나님께서 그대로 두셨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완악해진 아마샤의 앞길은 선지자의 예언(16)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만납니다.
21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유다 왕 아마샤와 더불어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22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유다 왕국 아마샤 군대가 왜 이렇게 허무하게 패전하고 말았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인 곳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에서 24km 떨어진 헤브론에서 욥바에 이르는 길에 있는 평지입니다. 이런 곳을 거점으로 군대를 몰아가면 유다 중심부를 칠 수 있는 전략 요충지가 됩니다.
이런 곳을 전쟁터로 잡은 것만 보아도 요아스는 상당한 전략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샤의 유다 군대는 에돔 정복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이스라엘군과 한판을 벌입니다. 그러나 아마샤가 에돔을 정벌할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에돔과 전쟁을 할 때는 아마샤에게 놀라울 정도로 용기가 있었습니다. 아마샤가 담력을 내어 소금 골짜기에서 세일 자손 만 명을 죽였습니다(11). 또 만 명을 바위 꼭대기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기까지 합니다. 한 마디로 대승입니다(12). 그러나 이번 전쟁은 그런 용기가 아마샤에게 없습니다.
이스라엘군에 의해 아마샤마저 포로로 잡히고 군은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아마샤가 처음에는 비교적 정직히 행했지만 우상 숭배에 빠지고 자신을 책망하는 선지자를 무시한 끝에 동족 전쟁을 일으킵니다.
결과는 대패입니다. 아마샤는 29년 동안 유다의 왕으로 통치하다 아버지 요아스와 같이 반역한 무리에 의해 죽고 맙니다(왕하 14:19, 대하 25:27).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잠시 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빨리 죄에서 돌이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도자가 잘못된 길 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손길을 통해서도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를 실기(失期)하면 안 됩니다. 인생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무리는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시작하는 날이 있으면 마치는 날도 있습니다. 우리도 죽습니다.
아직은 살아 있으니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날이 속히 돌아올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마무리를 명예롭게 하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아마샤처럼 되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왕하 14:07 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또 전쟁을 하여 셀라를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아마샤의 군대는 에돔의 수도 셀라까지 점령한 뒤, 그곳 이름을 욕드엘이라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정복된 곳이라는 뜻입니다. 아마샤도 이런 기적 같은 승리가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자세가 이내 사람의 생각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승리를 벌써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이내 교만에 빠지고 맙니다. 아마샤의 교만한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다시 볼까요?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감히 이 건방진 놈아,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말을 하느냐? 죽여 버리기 전에 입 닥치고 사라지라는 협박입니다. 얼마 전 아마샤는 에돔을 공격하려고 이스라엘 용병을 마음대로 고용했을 때 자기를 찾아온 하나님의 사람에게 책망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겸손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용병의 도움 없이도 에돔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아마샤는 에돔과의 전쟁에서 이긴 교만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교만은 죽음의 길입니다. 아무도 꺾을 수 없는 패망의 병입니다. 아마샤의 말년은 비참했습니다.
한때는 아버지 요아스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말년에 교만함으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27). 한때는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성공하기 전에는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공한 후에 자만에 빠졌습니다. 물질주의가 마음 깊숙한 부분까지 잠식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영혼을 구원해 주지 못함을 망각하였습니다. 사람은 권력을 쥐면 권력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자기가 권력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높이 오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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