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0년 말씀

나의 믿음은 계속 전진합니다(히 10:35~39).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0. 12. 2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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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1973, 11, 16 우주정거장 설치를 위해 스카이랩(sky lab) 4호를 발사하였습니다. 목표는 우주 궤도에 8년 정도 체류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예상한 것보다 2년 빠른 1979년 7월 11일 대기권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온 세계가 우주선 스카이랩의 고장 난 파편이 지구 어디엔가 떨어질 것이라는 스카이랩 공포로 떠들썩하였습니다. 마침내 컴퓨터로 측정하니 스카이랩 파편이 호주의 한 땅에 떨어질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호주인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왔습니다. 한 부류는 스카이랩 파편이 자신의 재산과 토지 위에 떨어지면 큰 손실을 볼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또 한 부류는 스카이렙 파편이 자기의 땅 위에 떨어지면 오히려 훌륭한 우주의 기념품이 되리라는 생각입니다. 당시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일간지에는 누구든지 스카이랩 파편을 주워오는 사람에게 일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광고하였습니다. 결국, 긍정으로 생각하던 한 호주 청년이 그 파편을 발견하여 상금을 탔습니다.

 

긍정의 사고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유익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오늘 말씀은 온갖 고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전진하라는 응원가입니다. 믿음의 길에 들어선 이상 어떤 고난의 환경 앞에서도 굴하지 말라는 응원가입니다.

긍정의 사고를 바탕으로 믿음의 전진을 하라는 응원가입니다. 저는 이런 응원가를 바탕으로 「나의 믿음은 계속 전진합니다.」로 정했습니다. 김삼일 가족 모두가 믿음의 응원가를 통해 은혜받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믿음의 담대함을 포기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히브리서를 받는 기독교인의 처한 환경을 보겠습니다. 첫째 환경은 기독교인이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여러 국가와 도시와 민족과 인종의 거대한 집합체입니다. 이 제국을 이끄는 원로원 그룹은 어떻게 하면 로마 제국 내의 전 민족을 하나로 묶는가에 대해 고민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 황제숭배입니다.

 

히브리서가 전해질 당시의 황제는 기독교를 최악으로 박해한 네로와 쌍벽을 이루는 도미티안(Domitianus 8대 A.D. 81~96)입니다. 이 도미티안이 황제숭배를 합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모든 민족에게 황제숭배를 시행하기 위해 일 년에 한 차례씩 가이사의 제단 앞에 꿇어 엎드려 특별 고백을 하게 했습니다. 황제숭배 증표는 가이사는 나의 주님입니다(Caesar is my Lord). 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하면 원로원이나 각국에 파송된 총독은 황제숭배 의무를 하였다는 증서를 발급해주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기독교인은 황제숭배를 거부한 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님으로 예배하였습니다(Jesus Christ is my Lord).

 

둘째 환경은 유대인들의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는 유대교와 다른 새로운 이단이다. 로마가 추구하는 세계평화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황제숭배도 거부하는 자들이다. 라며 로마 당국에 고소하였습니다.

이런 고소로 유대인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려 하였습니다. 또 그 고소가 로마 지방 각 총독이 받아들여 즉시 기독교를 핍박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이 당하는 핍박을 보면 사회로부터의 냉대와 조롱과 직업과 사업에서 따돌림입니다. 감옥에 갇히고 유대인들로부터 가산 약탈당하는 일입니다. 거기다 생명의 죽음까지도 당합니다. 이런 상황에 부닥치다 보니 기독교인은 극도의 가난 속에서 지내기 일쑤였습니다. 그 증거가 오늘 본문 앞부분 34절에 나옵니다.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이것이 초기의 기독교인이 겪은 실상입니다. 이런 형편에 처하다 보니 기독교에 입문한 유대인 가운데 일부는 서서히 무너졌습니다. 가난과 박해와 미혹을 이기지 못하여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일도 더러 일어났습니다. 연약한 기독교인을 향한 유대인의 집요한 미혹은 예수님을 떠나 모세에게로 돌아가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진리에서 비진리로의 변질입니다. 그래서 35절은 이와 같은 핍박과 환난에 놓인 자들에게 우선 믿음의 담대함 가질 것을 주문합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지 율법이 아님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을 만나도 믿음의 담대함을 버리지 말 것을 주문합니다.

 

담대함(παῤῥησία)을 버리지 말라. 담대함이란 자기 확신을 말합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지라도 그것을 붙들고 나가야지 버리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담대함을 가진 자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의 거인 같은 모습 앞에서 담대함을 유지한 여호수아와 갈렙, 골리앗을 깨뜨린 다윗의 담대함, 느부갓네살의 협박 앞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으로 나아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산헤드린 공회에서 주님을 담대히 증언한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 죽음 앞에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던 무명의 순교자들을 보십시오. 믿음의 담대함이 세상을 이깁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2. 혹 나의 믿음도 뒤로 물러갈 수 있습니다.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성경에 네 번 나옵니다(38, 합 02:04, 롬 01:17, 갈 03:11). 이렇게 성경에 같은 말씀이 네 번이나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길을 안내하는 최고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잊어서는 안 될 절대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준에서 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엡 02:08, 09).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도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믿음이 침체하거나 뒷걸음을 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만나면 좋아할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새 생명을 얻은 사람, 믿음이 성장해가는 사람,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에게 낙심을 안겨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믿음의 사람이 뒤로 물러가거나 슬럼프에 빠지면 하나님이 제일 안타까워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주었느냐? 그런데 작은 일에 무너지느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데 무너지느냐? 라는 탄식입니다.

사람이 물러가지 않고 자리 지키는 것을 부동(不動)이라 합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때 이를 요지부동(搖之不動)이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지부동의 믿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 우리가 믿음의 퇴보를 보입니까? 하나님의 근심거리 대상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어떤 상황에 놓여도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인내하면서 시험을 견디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면 내 삶의 전부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철저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우리가 이것 하나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목표가 확실한 이상 방황하거나 뒤로 물러갈 겨를이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런데도 뒤로 물러갑니까? 하나님께서 안 좋아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결과는 멸망을 만나고 맙니다(39). 멸망이란 깊이 가라앉는다는 뜻으로 회복 불가능을 말합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보십시오. 특정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히브리서의 수신자처럼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환경은 아닙니다. 현실 상황을 보면 외형의 박해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 사탄이 펼쳐놓은 시험의 올무가 보입니다. 고난과 박해의 전략 대신 우리를 무너뜨릴 시험의 지뢰밭도 보입니다. 믿음 생활은 신령한 모험이 따르는 일입니다.

담대한 모험이 없으면 믿음의 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악한 세력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세력이 알게 모르게 신앙인을 위협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반면 김삼일 가족은 시험의 지뢰밭을 능히 건너갈 수 있습니다.

 

약 0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3. 나의 믿음은 전진하는 믿음입니다.

 

39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라는 부분을 잘 보십시오. 믿음의 후퇴에 무게 중심을 둔 것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환경을 만나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반어법입니다.

히브리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만 바라보고 전진하라는 응원입니다.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졌다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미 자립하는 믿음을 가졌으니 유대인의 이간질과 로마 당국의 박해를 극복하자는 권면입니다. 세상에서의 고난과 박해를 피하려고 믿음을 양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마음을 다잡고 심기일전하여 믿음을 사수하십시오. 39절은 김삼일 가족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길에 들어섰습니까?

계속 믿음으로 전진하는 일이 바로 주님의 원하시는 일입니다. 믿음의 성도가 주춤거리고 뒤로 후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생각과 불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세계에 대한 믿음의 눈이 감겼기 때문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나아가는 길에 꽃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어느 순간에는 가시밭길만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만 보면 이해되지 않는 일이 계속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의 현장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앞세우면 얼마든지 능력의 현장으로 바뀝니다.

 

시 37:0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0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세상살이 많이 힘들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현실을 믿음으로 도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세상을 넉넉하게 이깁니다(요일 05:04). 김삼일 가족 여러분, 함께 신앙의 고백을 하나님께 합시다. 힘차게 따라 하시면 됩니다.

나는 물러가지 않습니다. 나의 믿음은 계속 전진합니다(아멘). 우리는 흔들림 없는 믿음, 뒤로 물러가지 않는 믿음, 다른 이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담대한 믿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믿

 

음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장차 큰 상을 받을 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히 11:06). 믿음은 담대하여야 합니다. 용기가 없는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믿음 생활은 신령한 모험이고 전투입니다. 따라서 담대함이 없으면 무기력해집니다.

담대함이 없는 믿음은 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만용이나 떠벌리는 일은 절제해야 하지만 믿음의 담력은 소리 내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용기가 있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또한, 믿음의 침체에 든 사람도 버리지 않고 일깨워서 사용하십니다.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도 붙들어주십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은 이제 믿음의 목표가 확실하기에 뒤로 물러가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고 그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나갔기 때문에 힘차게 일어나야 합니다. 혹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믿음 때문에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을 사수하기 위해 때로는 많은 것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것들 때문에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생각과 기준으로 보면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오직 의인은 믿음 때문에 산다는 말씀을 품으면 믿음 위에 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의 이야기 아시지요.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 나이가 아마 11세에서 14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끌려갔지만 담대한 믿음을 품고 있었기에 그 나라에서 총리가 되는 기적을 일구었습니다.

요셉도 일찍부터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꿈을 품었기에 노예의 신분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부터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믿음의 꿈을 가지게 하십니다(빌 02:13). 이 말씀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좋은 것을 가득 채워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십니다.

또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십니다(시 103:05). 아멘입니까? 김삼일 가족 여러분 어떤 상황 앞에서도 뒤로 물러가지 맙시다. 슬럼프에 빠지지 맙시다. 함께 믿음으로 전진합시다.

 

빌 0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