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0년 말씀

믿음의 행적을 잘 남깁시다(벧후 02:06~08).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0. 12. 19. 01:31
728x90

투표로 한 나라의 공직을 받드는 대통령, 지방자치단체장, 국회의원, 지방의원을 선출합니다. 당선되면 좋지만 낙선한 사람은 대부분이 자신은 억울하다고 합니다.

물론 개인에 따라 억울한 분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뿌린 대로 거두는 법칙처럼 나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평가하고 또 누군가로부터 평가받는 때가 있습니다. 이왕이면 좋은 평가를 받아야 안 되겠습니까?

 

선출직 국회의원에 처음 도전하는 후보는 대부분 선거철이 되면 출판 전문업자에게 자서전을 부탁합니다. 돈만 좀 넉넉히 주면 전문 팀에서 알아서 잘 꾸며 줍니다.

드디어 출판기념회라는 형식을 빌려 자기의 공적을 과대 포장한 책을 공급합니다. 그럴듯하게 써놓은 내용을 읽으면 저분이 그렇게 대단하구나 하며 고개를 끄떡입니다.

그러나 이런 책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신실한 평가는 객관성을 상실한 자서전이 아니라 그 삶 전체를 담는 회고록에 있습니다. 그것도 그 인물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 나온 책이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도 책 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비록 책으로 나올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삶에 대한 가치를 알리기 원합니까? 사람에 의한 평가도 좋게 해 주면 기쁘겠지만 만일 안 좋게 해 주면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살아서 받는 평가는 받을 때마다 매번 널뛰기하듯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만큼 불완전한 문제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장례식장에 가서 보면 압니다. 사람들 나름대로 평가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장례식을 인도할 때 가능하면 고인의 명예를 잘 살려 줍니다(^^). 오늘 말씀에 롯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인물을 후대의 사람 베드로가 의로운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어떻게 해서 의인으로 평가받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말씀 제목을 「믿음의 행적을 잘 남깁시다.」로 정했습니다.

 

 

1. 의로운 자로 불리는 롯은 어떤 인물입니까?

 

0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δίκαιον) 롯을 건지셨으니.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롯을 대단히 높게 평가합니다. 얼마나 높게 평가합니까? 의인이라고까지 평가합니다. 놀라운 평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하였습니다(롬 03:10, 23).

그런데 롯으로부터 약 2150년 후의 베드로가 이 롯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과연 롯이 의인으로 불릴만한 인물이 되는지 그의 행적이 담긴 창세기를 보겠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형 하란의 아들입니다.

 

이 하란이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일찍 죽는 바람에 삼촌 아브라함 밑에서 자란 조카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약 1000km) 가나안으로 오는(약 600km) 먼 경로를 함께 이사하였습니다.

가나안에 와서는 같은 목축업을 하며 지냈습니다. 한 날은 아브라함과 롯의 수하에 있는 목자들이 비좁은 지역에서 목초지(牧草地) 문제로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런 덕스럽지 못한 일을 본 아브라함이 롯에게 제안합니다. 원주민들 앞에서 다투는 것이 좋지 못하다. 목초지의 선택권을 줄 테니 서로 편하게 헤어지자는 제안입니다.

 

창 13:0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0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정도 되었으면 롯이 삼촌에게 우리가 어떻게 헤어집니까? 제가 양보하면 됩니다. 헤어질 수 없습니다. 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제안이 현실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삼촌이 먼저 선택하십시오. 저는 삼촌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화답해야 합니다.

물욕에 대한 욕망이 좀 넘쳐도 삼촌 앞에서 체면상 양보의 몸짓 정도는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욕심을 앞세워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 모세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창 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선택권을 가지고 간 곳이 목축업을 하는 처지에서 보면 분명 좋은 곳입니다. 무엇보다 ➊물이 넉넉합니다. 물이 많다는 것은 풍족의 근원입니다.

➋여호와의 동산 같습니다. 물이 넉넉한 데다 에덴동산을 연상할 만큼 완벽한 조건과 환경을 갖추었다는 의미입니다. ➌애굽 땅과 같다는 말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롯은 기근으로 인해 애굽 땅으로 피신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롯은 그곳에서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애굽 문명의 편리함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보이는 요단이야말로 행복이 보장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요단 들판이 어떤 곳입니까? 소돔과 고모라를 중심으로 한 비옥한 땅입니다.

겉으로는 매우 그럴듯하게 보이는 도시입니다만 하나님의 언약과는 함께 머물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행복을 보장해 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겉만 화려하다고 해서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럴듯한 곳은 대부분 불신앙의 함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유혹은 롯에게만 있겠습니까? 우리의 현실에도 날마다 다가옵니다. 우리가 주거지를 선택할 때 많은 행복과 불행의 가능성이 같이 주어집니다. 그 터전을 선택하는 것은 내 몫이기에 더욱 신중하여야 합니다.

 

 

2. 롯은 불의한 환경을 이기려고 몸부림칩니다.

 

0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무법한(ἀθέσμων) 자들. 양심의 법조차 무시하는 부도덕자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어 나오는 음란한 행실은 동성연애자를 가리킵니다(창 19:04~11; 벧전 04:03).

소돔성의 환경을 보십시오. 롯은 이미 죄악의 환경에 갇혔습니다(창 13:10~14; 19:06, 08). 세상의 환경으로는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입니다. 재물과 쾌락이 넘치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소돔과 이웃 성 고모라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도시입니다. 이런 곳을 좋다고 롯은 삼촌 아브라함과 사이에 인륜의 의리마저 저버리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이것 하나는 아십시오. 죄악으로 가득한 환경은 사람을 죄악으로 잠식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롯이 죄악에 얼마나 물들어 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롯의 여러 행적을 볼 때 죄악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살았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롯을 의로운 자로 호칭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의인이라 칭합니까? 그 평가 기준이 무엇입니까? 의인의 기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 롯의 믿음 정도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롯을 의인으로 언급한 이유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습니다.

 

외경(外經)의 전승을 따른 것으로 짐작됩니다. 외경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외경이란 히브리 정경에(canon) 들지 못한 15권의 책을 말합니다. 일명 구약의 제2 경전이라 부르는 데 주전 2세기 말부터 주후 1세기 사이에 쓰인 신구약 중간기 산물입니다. 문학 가치는 있으나 성경 가치는 전혀 없는 문헌입니다.

 

개신교는 외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합니다. 분류하면, ➊역사문학 4권으로 마카비 상. 하, 에스드라 상. 하 ➋교훈서 2권으로 집회서, 솔로몬 지혜서 ➌소설류 2권으로 토비트, 유딧 ➍예언서 1권으로 바룩 ➎성문서 6권으로 예레미야 서신, 므낫세의 기도, 에스더 첨가서, 아자리아의 기도 세 젊은이의 노래, 수산나, 벨과 용(뱀) 등입니다.

 

교훈서에 속하는 지혜서 10:06에 롯이 의롭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이 의는 아브라함을 기준으로 한 의로움의 의미가 아닙니다(창 13:01~13).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사람과 비교해서 의로웠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롯이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의 호색과 변태 성욕의 죄악에 빠져들지 않고 구분되어 살려 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심령에 고통이 왔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기준으로 롯을 의인이라 했지만, 롯에 대한 우리의 불신앙 같은 선입관을 해소하기에는 아무래도 소명(疏明)이 부족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롯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소돔을 멸하실 때 그것에 살던 롯의 가족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창 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베드로가 소돔에서 구원을 받은 롯을 거론한 특별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 베푸시는 은혜로 의인이라 불림을 전하려 함입니다. 롯은 무법한 자의 죄악을 보고 너무 괴로워서 늘 심령이 상했다고 전합니다. 롯은 나름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살려고 무척 애를 썼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롯은 믿음 감각이 살아 있음을 지금도 전합니다.

 

0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베드로는 먼저 롯에 대해 의인으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07절에 의로운 롯을, 08절에 이 의인이 이렇게기록하였습니다. 심령이 상함이라(ἐβασάνιζεν 바사니젠). 고통을 당하다 의 미완료 능동태로 계속 내부에서 고통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마 8:06, 계 09:05). 롯은 소돔에 살면서 죄에 물든 성민으로 인해 날마다 고통을 겪었습니다.

스스로 믿음의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였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곳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이 일만이 답입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롯은 소돔성을 버리고 나가는 계획은 세웠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일은 쌓아놓은 인맥과 재물과 인간관계 대부분의 상실을 감수하여야 합니다. 롯이 날마다 의로운 심령을 상했다는 말은 여러 생각으로 인해 갈등했다는 의미입니다.

롯의 이런 중심이 바로 믿음 감각이 살아 있다는 증표입니다. 믿음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무법한 자들 속에서 고통당하는 롯을 보셨습니다.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롯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시면 그때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때는 살길이(창 19:04~11; 전 07:20) 있습니다.

동시에 믿음의 몸부림치는 자를 박해하는 자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임합니다. 결국, 음란과 패역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불심판(창 19장; 눅 17:28~29)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세상 쾌락과 욕망이 목적인 그들의 말로입니다. 악의 쌍둥이 도시 중 소돔(Σοδόμων)에서 나온 부끄러운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남색(男色) 즉 동성애를 뜻하는 sodomy입니다. 부끄러운 단어를 생산한 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위치가 어디쯤일 것 같습니까? 그 현장이 궁금합니다만 외형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있다면 죄악에 대한 경고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 사해 남단 아스팔틱 호수(Asphaltic Lake) 아래 매몰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이곳도 언젠가는 발굴될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날마다 의로운 심령이 상하게 된 롯의 믿음 감각입니다. 이 감각은 믿음의 최후 보루로서 이것을 잃으면 불신자가 됩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냄새를 맡는 후각이나 맛을 느끼는 미각이나 아픔을 느끼는 신경이이 마비되면 어떨 것 같습니까? 육신 생활은 불행입니다. 이런 육신의 감각기관보다 중요한 기관이 바로 심령에 자리 잡은 믿음 감각기관입니다. 이 믿음 감각이 마비되면 결국 불신자가 됩니다.

 

엡 0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굳었다는 말은 믿음 감각이 마비되었다는 뜻입니다. 믿음 감각이 마비되면 자신을 방탕에 던져버려 더러운 욕심의 길로 갑니다(엡 04:19). 베드로는 무법한 자들 속에 거하면서도 믿음 감각이 살아 있는 롯을 의로운 자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의인 한 사람만 있으면 교회를 살리고 나라도 살립니다(렘 05:01). 김삼일 가족도 이 믿음 감각을 잘 관리하십시오. 이 믿음 감각이 살아 있으면 의롭다는 호칭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갈 0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어떻게 하여야 의인이 됩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됩니다. 우리는 이미 의인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이 근거입니다(엡 02:08).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매우 허물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우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 장사 데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상황을 따라 임기응변으로 거짓말과 비겁한 짓을 한 인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을 의로운 자라 인정하였습니다.

 

창 15:0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롯이 멸망의 성 소돔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의 행동으로가 아닙니다. 행동은 오히려 징계를 받을 정도입니다. 또 의로운 자라는 호칭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롯을 의롭다고 인정하기까지에는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롯을 놓고 중보기도를 한 아브라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창 18장). 그래서 시편 기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32:0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0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때가 되면 다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 길을 갑니다. 사람은 사후가 중요합니다. 어떤 믿음의 흔적을 남겼느냐가 중요합니다. 롯은 약 4천 2백 년 전의 인물입니다.

그가 남긴 흔적은 베드로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베드로후서가 기록된 이상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롯은 믿음 감각이 살아 있는 의로운 자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롯뿐만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믿음의 가문을 세우고 믿음의 행적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가는 후대 사람이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후대에 복된 믿음의 행적을 전하라고 부르십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할 일은 믿음 감각을 회복하여 믿음의 행적을 남기는 일입니다. 롯과 같은 의로운 믿음 하나 잘 남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