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0년 말씀

나는 성전의 기둥입니다(대하 03:01~1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0. 12. 5.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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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 보목포구에는 매년 5월31일부터 6월 2일까지 자리돔 회 축제가 열립니다. 얼마나 맛있고 큰 생선이기에 축제까지 하겠습니까? 그런데 자리돔은  참돔처럼 예쁘거나 감성돔처럼 멋진 모습이 아닙니다. 길이가 10㎝ 정도 되는 작은 생선에다 색깔은 검은색이고 누가 봐도 별 볼품없습니다.

그런데도 제주 자리돔 회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자리돔 회를 소개하는 것은 독특한 이름 때문입니다. 왜 자리돔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자기가 태어난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계속 그곳에만 머물기 때문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각자 하나님께서 머물라고 한 자리가 있습니다. 삶의 현장과 예배와 봉사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기쁨으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면 은혜와 복을 베푸십니다. 사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특별 믿음을 주십니다. 승리의 열매도 맺게 해 주십니다.

문제는 지금 내가 교회를 잘 받들고 섬길 수 있는 그 자리를 잘 지키느냐입니다. 교회에서 기둥처럼 쓰임을 받고 있느냐입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 왕이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마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해 놓은 부분입니다.

 

그 기간이 칠 년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 그 앞에 두 기둥을 세우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오른쪽 기둥 이름은 야긴, 왼쪽 기둥 이름은 보아스입니다. 이 이름처럼 저도 오늘 말씀 대하 03장을 중심으로 「나는 성전의 기둥입니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은혜 나누는 귀한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 솔로몬이 성전을 모리아산에 건축하였습니다.

 

0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이스라엘의 성전 역사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솔로몬 왕 때 와서 이스라엘의 성막 중심이 성전 중심으로 바뀝니다. 솔로몬 왕이 7년간에 걸쳐 성전을 건축하였는데 이를 일명 솔로몬 성전이라 부릅니다. 훗날 바벨론에 의해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B.C. 721) 성전도 훼파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지어진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릅니다(B.C. 536.2~516.12.3). 건축을 시작하여 중단된 기간 16년까지 합하면 무려 21년 걸렸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헤롯 왕이 외형으로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을(B.C. 20~A.D.64) 증축하고 있었는데 헤롯이 증축하였다고 해서 일명 헤롯 성전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전 건축이 이루어진 터입니다. 의미 없는 땅을 성전 건축의 터로 삼은 것이 아니라 특별 의미가 있는 터를 정했기 때문입니다. 성전 건축에 관한 준비는 다윗이 하였고 건축은 솔로몬이 하였습니다.

성전 건축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성전 터입니다. 성전 터의 역사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성전 터를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01절을 보십시오.

본서 저자는 성전 건축의 터에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합니다. 모리아산과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나타나신 오르난의 타작마당입니다. 이 두 곳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❶예루살렘 모리아 산. 모리아 산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 할 때 소개된 산입니다(창 22:02).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산을 부를 때 시온산이라 부릅니다(왕하 19:31; 시 74:02; 사 10:32). 그런데 01절은 그 시온산을 모리아산이라 합니다. 모리아산은 어떤 산입니까?

창세기 22:01~14절을 보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 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 한 그곳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정해 주신 곳에서 제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하여 희생 제물로 드리려 할 때 장면 기억하십니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09~12).

 

❷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이 부분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삼하 24장을 보면 다윗이 전쟁이 없는 평안한 때를 만나자 그만 교만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지켜 주셔서 이렇게 태평성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20세 이상 남자 숫자를 조사하라고 군대장관 요압에게 명령하였습니다.

내가 이 엄청난 왕국을 만들었다. 나야말로 막강한 왕 아닌가? 라는 자기 과시를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요압이 반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안전히 지켜 주시는데 어찌 왕께서 군인의 숫자를 헤아리라 하십니까?

 

그런데도 다윗이 강하게 밀어붙여서 이스라엘이 팔십만 명 유다가 오십만 명, 총 백삼십만 명의 숫자를 파악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다윗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삼하 24:10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다음날 하나님께서 궁중을 출입하는 선지자 갓을 통하여 다윗에게 세 가지 징계를 전합니다. 첫째, 이스라엘에 칠 년 기근이 있을 일, 둘째, 왕이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 다닐 일.
셋째, 이스라엘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발생할 일. 
이에 다윗은 대적자로부터 쫓기는 일보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셋째 징계 사흘 동안의 전염병을 택합니다.

즉시 징계가 실현되어 하루에 칠만 명이 죽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잘못했는데 왜 백성이 죽어야 하는가? 라는 가책으로 하나님께 자기를 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즉시 징계를 거두어들이셨습니다. 이에 갓 선지자가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오르난(삼하 24:18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 지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즉시 오르난의 소유로 된 타작마당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오르난이 왕께서 이곳 언덕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다윗이 온 이유를 밝히자 오르난은 제사에 필요한 것을 다 제공하겠다고 고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특별한 제사를 지내는 일에 값을 치러야 한다며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서 제사를 지냅니다. 바로 그 장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2. 성전 두 기둥 이름이 야긴과 보아스입니다.

 

17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15절을 보면 성전 앞에 별도의 기둥 둘을 세웠습니다. 그 높이가 삼십오 규빗(Cubit)이고 각 기둥 꼭대기 머리가 다섯 규빗입니다. 반면 왕상 07:15에는 18 규빗으로 나옵니다.

성경 필사자가 어느 쪽이든 오기(誤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오기인지 점검해 보겠습니다. 성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가 삼십오 규빗이고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는 다섯 규빗이라는 15절을 보십시오.

기둥 둘의 높이가 합하여 35 규빗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둥 꼭대기의 머리는 각 5 규빗이라고 본체의 기둥과 달리 분리해서 표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 기둥 높이는 17.5 규빗입니다. 그래도 왕상 07:15의 18 규빗과는 0.5 규빗 차이가 나는데 이 차이는 성경 필사자가 왕상 07:15에서 17.5 규빗을 18 규빗으로 오기한 것 같습니다.

 

규빗(Cubit)이란 단어가 좀 이해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규빗은 구약 성경에서 팔을 의미하는 암마를[אַמָּה] 개역 성경에 옮긴 단어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그 방주 규격에 처음 나옵니다(창 06:15). 신약 성경에도 한 차례 나옵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 성의 성곽을 천사가 측량할 때입니다(계 21:17). 규빗은 고대의 서양이나 근동에서 쓰이던 길이의 단위로 성인의 팔꿈치에서 중지(中指) 끝까지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팔의 길이가 다르지 않습니까? 규빗의 길이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길이가 조금씩 다르게 적용되다 현대에 와서는 편의상 1 규빗을 약 45cm로 비공식 동의합니다.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솔로몬 성전 앞에 세워진 두 기둥의 외형을 보십시오. 놋으로 만들었습니다(왕상 07:15). 높이가 18 규빗 둘레가 12 규빗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건축 수준으로는 거대한 기둥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이 두 기둥의 육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세운 것 같습니까?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야긴(יָכִין)과 보아스(בּוֹעַז)라는 기둥에 붙여진 이름 때문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오른쪽 기둥을 야긴, 왼쪽 기둥을 보아스라 명명(命名)하였습니다. 

야긴의 뜻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의미이고 보아스의 뜻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튼튼하게 된다, 민첩하다는의미입니다. 두 이름의 의미를 볼 때 솔로몬의 의미심장한 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전의

 

두 기둥을 통해서 다윗의 왕조를 세우시고 든든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성전을 출입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이 놋 기둥을 볼 때마다 성전을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든든하게 하신다. 이런 생각 했을 것입니다.

만일 두 기둥의 외형만을 바라보고 와, 웅장하구나. 비용이 많이 들었겠네. 이런 정도의 감동만 받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때로는 신령한 상징이 필요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오늘 두 기둥을 통해서 우리의 사업과 생업을 세우시고 든든하게 해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령한 상징을 주실 때 깨닫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3. 나는 성전의 기둥입니다.

 

17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우리는 교회 생활에서 가끔 특정인을 놓고 교회의 기둥이라는 말을 합니다. 교회의 기둥이라는 소리 듣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나 들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나름 믿음의 내공이 꽉 차 있어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이왕 믿음의 자리에 왔으니 기둥 같은 일꾼이라는 소리 들어야 안 되겠습니까?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복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 중심을 알아주시지만, 세상 사는 동안은 사람의 인정을 받으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둥같이 쓰임 받는 일꾼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충돌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특징이 있어야 신령한 공동체 생활이 즐겁습니다.

 

가을에는 철새들이 하늘을 많이 지나갑니다. 하늘을 뒤덮을 만한 새들의 이동은 때로는 장관을 이룹니다. 하늘에 나는 수많은 새를 보십시오. 한 가족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창공을 날면서 다투거나 싸움질로 인해 충돌하지 않습니다. 바다의 물고기 떼도 정한 코스를 가고 오고 합니다만 한 마리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사람만 충돌이 일어납니다. 신분이 상승할수록 더욱 일어납니다.

교만 때문에 일어납니다. 조금 전 기둥 같은 일꾼은 충돌하지 않는 특징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꾼으로 인정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좋아하며 충돌할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나는 성전의 기둥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변함없는 성전의 기둥이 되기 위해 자기 선언을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따라 합시다. 나는 성전의 기둥입니다. 한 번 더, 나는 성전의 기둥입니다. 또 한 번 더 나는 성전의 기둥입니다. 세 번 복창했으니 자기 고백이 된 줄 믿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 모두가 성전의 기둥 같은 일꾼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바나바, 디도와 함께 복음의 센터 예루살렘 교회를 세 번째 방문하였을 때 일입니다(A.D. 49).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만나 악수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때의 감정을 상기하면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 게바 요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갈 02:09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기둥같이(στυλοι) 여기는. 바울이 야고보 게바 요한에게 기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만큼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는 어떻게 하여야 기둥 같은 일꾼이 될 수 있습니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으로 선택해서 너는 내 것이다. 하고 불러 쓰시는 경우와 내 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일입니다.

김해삼일교회에는 기둥처럼 쓰임 받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습니다. 기둥 없으면 건물 당연히 무너집니다. 기둥이 약하면 건물 쉽게 무너집니다. 반면 아무리 큰 세파가 밀려와도 기둥만 떡 버티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기둥 같은 일꾼으로 쓰임 받으려면 신령한 일에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교회의 기둥처럼 쓰임 받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색클턴[Sir Ernest H. Shackleton. 1874.2.15.~1922.1.5.]이 대원들과 함께 남극을 탐험하는 중 아주 위급한 상황을 맞았습니다.

그는 대원들과 함께 임시 대피소를 만들었으나 식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마지막 건빵을 한 봉지씩 대원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과연 대원들을 데리고 안전지대까지 갈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졌습니다. 극도로 지친 대원들은 모두 잠이 들었으나 색클턴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때 누군가가 움직이는 인기척이 들립니다. 가만히 보니 한 대원이 다른 대원이 다 잠들었는지 살피고는 건빵을 훔쳤습니다. 실눈을 하고 그 모습을 지켜본 색클턴은 기가 막혔습니다.

 

나는 생사를 초월해 너만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의지했는데 이제 절박한 상황이 벌어지니 동료의 마지막 남은 건빵까지 훔쳐 가는가? 저런 사악한 인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계속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잠시 후 오히려 큰 감동을 하였습니다. 옆 대원의 건빵을 훔친 대원은 훔쳐 온 건빵의 봉지를 열더니 자기의 봉지에서 건빵을 꺼내어 동료 대원의 봉지에다 채웠습니다.

그리고 채운 봉지를 다시 슬며시 밀어 대원의 머리맡에 올려놓았습니다. 밤에 일어나 동료의 봉지에 건빵을 넣는 행위는 건빵 하나가 귀한 시기에 참으로 귀한 행동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 사랑입니다(마 06:03). 이 사실로 인하여 대장은 큰 감명을 주었고 대원들 간에는 공고히 뭉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남의 봉지에 채우는 건빵 사랑이 정말 진하게 느껴지는 사랑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랑을 품은 일꾼을 필요로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봉사가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기둥처럼 쓰임 받는 일꾼은 무거운 짐을 짊어질 각오를 합니다. 일이 있으면 일꾼이 먼저 짐을 집니다.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은 하나님 교회에 자리를 폅니다. 믿음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일꾼에게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계 03:12). 이 말씀 붙들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