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0년 말씀

[맥추감사] 통곡의 현장에서도 감사하는 욥(욥 01:13~2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0. 7. 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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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성도일수록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언어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은 은혜를 따라 감사를 표현하여야 합니다.

2020년 코로나19를 맞은 상황에서도 2020년 전반기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이 역시 은혜입니다. 건강한 성도는 7가지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 결과는 좋지 않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감사합니다. 그러나 감사. 감사할 수 없는 환경이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감사. 과정이나 결과와 상관없이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감사. 지금은 감사하지 못하는 결과지만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도 감사. 마음의 소원과 간구대로 되지 않더라도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감사. 여러 조건 때문에 좋은 결과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 소원대로 되지 않더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선하심이 있을 줄 믿고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은 구약시대의 인물 욥의 감사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이 욥은 실제 인물로서(겔 14:04, 20, 약 05:11) B. C 20세기경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때는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로 추정됩니다. 당시 족장들은 전능자 하나님 호칭을 많이 사용하였고 또 가문의 대표로서 제사장 역할을 하였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의 생활이 족장들 생활과 거의 흡사합니다. 특히 욥의 가정환경, 사회환경, 믿음 환경을 보면 신앙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은 거의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도덕과 윤리 면에서 거의 흠 잡을 수 없을 정도의 생활이었습니다. 그의 재산도 대단합니다. 양이 칠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소가 오백 겨리, 암나귀 오백 마리인데 당시의 상황에서는 환산이 안 될 정도의 재산입니다.

 

거기다 슬하에 7남 3녀까지 두었습니다. 이렇게 큰 재산을 가졌고 다복한 욥이 하나님의 허락하신 훈련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절망의 자리로 추락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감사 생활 하나로 모든 고난을 회복합니다. 회복의 근거가 감사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곡의 현장에서도 감사하는 욥」 이렇게 정했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욥의 현재 형편은 감사할 조건이 못 됩니다.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욥은 엄청난 부자에다 열 명의 자녀까지 둔 만인이 부러워할 만한 인물입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욥에게 큰 재앙이 몰아쳤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그 모든 재산을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이 노략질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모든 것을 태워버렸습니다(15, 17). 열 명의 자녀도 한꺼번에 죽고 말았습니다(19).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 셈입니다.

 

욥은 이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내던져졌습니다.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며칠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 엄청난 일을 갑작스레 당할 때 어찌해야 합니까? 심호흡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어찌해야 합니까? 욥은 며칠 동안 진행된 재앙 앞에서 계속 침묵하다 마침내 반응을 보입니다.

 

겉옷을 찢고. 이해하기 어려운 극심한 환난 앞에서 욥이 침묵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겉옷을 찢습니다.

겉옷은 당시 귀족이 입던 외투 종류입니다(삼상 24:05). 그런 옷을 찢는 행동은 극심한 비탄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창 37:34; 수 07:06; 삼하 01:11; 에 04:01).

머리털을 밀고. 이 일 역시 갑작스러운 재난에 대한 애통의 표현입니다. 고대 문헌을 보면 이런 행위는 당시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널리 행해진 이방 풍속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머리털 미는 행위를 금했습니다(레 19:27; 신 14:01).

 

그런데도 이스라엘에서 종종 이런 일이 언급되는 것은(레 13:33; 14:08) 관례상 허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방인 사회에서는 겉옷을 찢거나 머리털을 미는 일 외에 극심한 슬픔을 나타낼 때 자신의 몸을 베거나 찢는 행위도 하였습니다(레 19:28; 신 14:01).

그러나 욥은 이런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이방 사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믿음의 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욥기는 문학 형태상 긴 산문시(散文詩)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장 기법과 용어 사용이 매우 간결합니다. 특히 주어나 목적어 없이도 그 뜻을 충분히 전달합니다.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라는 부분을 보십시오. 목적어인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자가 생략하였습니다. 그래도 욥의 중심에 들어있는 목적이 잘 나타납니다. 욥에게는 갑작스럽게 당한 절망의 순간입니다.

그런데도 욥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자기의 모습을 낮춥니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어버린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현입니다. 욥의 이런 반사작용은 그 역시 연약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자신에게 임한 재앙과 극도의 충격을 이겨내기가 힘들다는 표현입니다. 그래도 절망의 현장에서 욥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이미 욥은 참담한 일과 큰 슬픔 때문에 겉옷을 찢고 머리털까지 밀었습니다. 큰 슬픔 앞에서 통곡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큰 슬픔을 당할 때는 실컷 울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예수님도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그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3~35). 믿음의 성도는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실컷 울고 슬퍼한 후에는 예배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예배의 기본 의미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올리는 일입니다. 욥이 예배하였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다는 뜻입니다.

참담한 현실 앞에서 욥은 지난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복을 생각했습니다. 열 명의 자녀를 주셨고, 부자로 살게 하신 일을 생각하니 그것만 해도 족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자리에 섰습니다.

 

 

 2. 욥은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 가을 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하고.

 

욥이 처한 현실은 아무리 보아도 이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닙니다. 재산을 다 잃었으니 이 일 역시 큰일이지만 재산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일이 자식 잃은 일입니다.

그런데 꼭 같은 날에 다 죽었습니다. 욥이 이런 끔찍한 재앙을 당할 때 그럴 만한 무슨 죄를 지은 것이 전혀 아닙니다. 욥의 고백을 다시 봅시다. 어머니 뱃속에서 알몸으로 나왔으니 마지막에는 알몸으로 당연히 돌아가야 한다는 고백입니다.

 

며칠 동안에 날아간 재산과 자식도 결국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인생의 도를 통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욥은 단순히 태어나고 죽는 일에 관한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닥친 급작스러운 고난에서 도피하기 위해 죽음을 갈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솔로몬이 남긴 메시지와 사도 바울이 남긴 메시지를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전 05:15 그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자기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06:0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0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잘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02, 03)을 주신 것처럼 그분은 주신 것을 회수해 갈 자격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물질과 혈육이 끊어짐에 대해 하나님께 조금도 항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런 믿음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 뜻에 따라 결정이 난다는 고백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단순한 자연 현상이나 종들의 부주의로 인한 인재(人災)로 보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재앙의 원인을 하나님의 섭리로 깨달았습니다. 욥은 이런 믿음을 잘 유지하고 있었기에 환난 앞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균형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이런 고백은 불신자에게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말입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고백할 수 없는 말입니다.

이런 고백은 모든 재물과 자신의 생명과 가족들의 생명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권 사상의 결과입니다. 즉흥으로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중한 것을 취하신 일에 대하여 원망을 합니다. 그러나 욥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 주신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모든 것은 때가 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져가시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욥은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느껴질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조금도 잘못되시는 분이 아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 하나만은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떠돌이 신앙인은 무엇이라도 생겨야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반면 붙박이 성도는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주실 줄 믿고 찬양합니다.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누리게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찬양의 자리를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3. 욥은 원망의 현장을 감사의 현장으로 바꾸었습니다.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22절을 잘 보십시오. 두 개의 대등한 절(節) 범죄하지 않았다. 원망하지 않았다.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반면 히브리 원문은 접속사 없이 한 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나쁜 행위로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문장입니다. 여기서 나쁜 행위(תִּפלָה 티플라)란 도덕면에서 책잡힐 만한 부끄럽고 파렴치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욥은 지극히 짧은 시간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12~19). 그런데도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믿음으로 다듬고 있습니다.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욥이 왜 까닭 없이 고난과 시련을 겪습니까? 이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욥의 믿음을 테스트하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욥이 믿음이 넉넉한 물질 때문에 좋은 것이지 물질과 다복한 자녀를 제하면 욥의 믿음도 무너질 것이라는 사탄의 장담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기대와는 달리 욥은 극도의 시련 앞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조금 전 말씀 드린 대로 욥은 온갖 고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예배하였습니다.

제가 예배하였다는 말을 하나님께 감사를 올렸다. 감사의 자리로 나아갔다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욥은 세상 환경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원망의 자리가 아니라 감사의 자리를 지킵니다.

 

시편 150편 대부분을 다윗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이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시에는 하나님께 감사 올리는 장면이 많습니다. 그런데 감사 올리는 시의 대부분이 환난과 고통 다음에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윗은 생명의 위기를 하나님 은혜로 극복하고 나면 반드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고난의 현장을 만나면 감사합니다. 로 시작합니다(시 138편).

김삼일 가족 여러분, 내가 처한 환경이 죽음과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현장을 감사의 현장으로 전환하기를 원하십니다. 중단하지 않는 감사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 일반 피조물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창 01:04, 10, 12, 18, 21, 25).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31).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제사와 감사와 찬양입니다. 일반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감상하시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아름다운 우주 만물을 감상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며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 하나 기억하십시오. 양은 양을 낳고, 소는 소를 낳습니다. 불평은 불평을 낳고 원망은 원망을 낳습니다. 그래서 심은 대로 거둡니다. 또한,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사도 바울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남겼습니다(갈 06:07). 원망과 불평은 불행의 시작임을 아십시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할 일을 몰고 다닙니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감사의 영향을 끼칩니다. 불평과 원망은 모든 질병의 바이러스이고 감사는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다이돌핀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일이 잘 안되고 꼬일 때가 더 많습니까? 하나님께 감사를 올림으로 문제를 수습해 봅시다. 감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힘입니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신앙인의 성숙도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감사입니다.

 

살전 0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William Law(영국 1686.9~1761.4). 기도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이분이 세계 최대의 성자는 기도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요, 금식을 많이 한 사람도 아니요, 자선을 많이 베푸는 사람도 아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성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싹이 잘 트는 씨앗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사탄이 뿌린 불평과 근심과 원망의 씨앗입니다. 이 씨앗은 어떤 마음에 떨어져도 바로 싹이 납니다. 이 불평과 근심과 원망의 씨앗 때문에 세상은 분쟁과 재앙이 그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탄의 씨앗이 절대 자라지 못하는 한 곳이 있습니다. 감사의 마음입니다. 이 감사의 공간을 통해서 온갖 불평과 근심과 원망이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성도는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현장에서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 모두 욥처럼 감사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