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2:01~22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 왕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블레셋 군대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런 빅뉴스를 접했으면 속히 추지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수하의 부하들과 그에 따르는 식솔들 그리고 소유하고 있는 가축을 이끌고 유다 땅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사울이 죽었으니 다윗에게 왕이 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계속 블레셋 영역 시글락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용사가 다윗에게 계속 모여들므로 그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습니다(대상 12:01~22).
다윗은 사울 왕의 사후(死後) 자기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는 정세를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 뜻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제가 유다의 한 성읍으로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묻는 형태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입니다(삼상 22:10). 범인(凡人) 같으면 왕의 자리에 하루 속히 오르려고 온갖 사람의 지략을 동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뜻을 존중하고 그 뜻에 자기 생각을 맞추었습니다. 내 계획 내 시간표보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시간표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때를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때와 사람의 때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때와 사람의 때를 잘 헤아리지 못한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동족을 돌아보고자 하는 좋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 마음을 사람의 생각으로 추진하다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왕자의 신분에서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모세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로 정하고 오늘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모세의 시간표를 보겠습니다. |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모세가 누구입니까? 바로 왕이 신생 남아를 죽이라는 특별 산아 정책이 실행되던 때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레위 지파의 아므람과 요게벳입니다(출 01:08~10).
이 모세가 하나님의 특별 섭리로 바로 왕의 공주 하트셉수트(Hatshepsut, B.C. 1508~1458)의 양아들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하트셉수트는 훗날 애굽 제18왕조 5번째 바로(섭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모세는 그녀의 양아들이니 처신만 잘하면 바로의 자리에도 오를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 전도자 스데반이 모세의 왕궁 생활을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행 07:22). 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지혜란 문법, 역사, 수학, 의학, 기하학, 천문학과 무술 병법 등을 말합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모세는 출애굽 후 광야 생활의 지도자가 되었고 훗날 모세오경도 기록하였습니다.
11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부분을 스데반은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라고(행 07:23). 표현하였습니다. 모세의 인간애가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권력자지만 노예 신분으로 추락한 동족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형제로 알고 다가갔습니다. 형제애 이거 매우 좋은 일입니다.
만약 모세가 때를 엿보며 권력투쟁으로 방향을 틀기만 하면 애굽의 바로 왕이라는 타이틀에 근접할 수도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런 세상 욕심보다는 동족 돌아보는 마음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모세의 마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 칭함받는 것을 거절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렇게 전합니다(히 11:24, 25).
11….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나가서(יָצָא 야차). 모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왕궁을 살짝 빠져나왔다는 뜻입니다. 이는 모세의 외출이 고통당하는 동족의 근황을 살피기 위함입니다(행 07:23).
고되게 노동하는(סְבָלָה 세발라). 무거운 짐을 지다, 고통스럽게 짐을 나른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평범한 의미의 노동이 아닌 혹독한 노역입니다.
보더니(רָאָה 라아).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학대받는 동족의 비운을 주의 깊게 지켜본다는 뜻입니다. 이때 모세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한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 구타하는(נָכָה 나카) 것을 보았습니다. 단순한 구타가 아니라 긴 막대기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혹독한 매질입니다. 이어지는 12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 관리를 죽일 만큼 울분이 폭발합니다.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궁중에서 익힌 권법으로 한 방에 날려 보냈습니다. 이 장면 얼마나 후련합니까? 정의의 사자다운 모습에 스트레스가 확 풀립니다. 이어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그 시신을 모래 속에 파 묻어버립니다. 그리고 모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궁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모세는 다시 그 현장으로 왔습니다. 범죄심리학에 따르면 범인은 반드시 범행현장에 다시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여전히 고생하는 동포들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13….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רָשָׁע 라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이번에는 어제와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동족끼리의 싸움입니다. 노예 생활의 처지로 전락한 동족끼리 싸우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감독관에게 모진 매질을 당하는 사람끼리 잘하면 얼마나 잘했다고 싸우는 겁니까? 이것을 본 모세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모세가 두 사람을 뜯어말리면서 그 중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고 책망합니다. 여기서 잘못하였다는 말은 아주 죄질이 나쁘다는 의미입니다.
모세가 나무랄 만합니다. 그러자 그 사악한 사람이 모세에게 말합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14). 이 순간 모세가 절망에 빠집니다. 이어서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 되었도다. 이 독백은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탄식입니다.
함부로 놀린 입 때문에 모세의 화려한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셈입니다. 왕자의 신분을 활용해서 이스라엘을 해방하려는 모세의 인생이 물거품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밀고로 무리에게 잡힐 당시 현장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 중에 열성으로 앞장을 선 한 사람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종 말고입니다. 이를 본 베드로가 의분에 찬 나머지 말고의 귀를 즉각 칼로 쳐 버립니다(요 18:10, 11). 그러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요 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모세는 독립운동을 하나님 뜻이 아닌 자기의 시간표대로 추진하다 살인자 블랙리스트에 오릅니다. 하루아침에 왕자의 신분에서 광야로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4….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2. 하나님의 시간표를 보겠습니다. |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 된 지라.
모세가 바로의 추격을 피해 도망쳐 온 곳이 어디입니까? 미디안 광야입니다(15). 이 미디안 광야는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가 낳은 넷째 아들 미디안이 사는 곳입니다.
오늘날 아카바만 동해안 북부 아라비아와 이집트 사이의 넓은 광야에 해당합니다. 미디안 족속은 주로 국경 없이 이동하며 목축하는 베두인입니다. 르우엘은 이들로부터 갈라져 나와 시나이반도에 자리 잡은 무리의 제사장입니다. 모세가 도피한 장소 미디안 뜻을 볼까요?
미디안(מִדיָן). 투쟁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투쟁이라는 단어의 신령한 뜻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모세가 광야에서 누구와 투쟁한다는 말입니까?
무엇보다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내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미디안 광야로 불러내셨습니다. 지금 모세가 머무는 곳이 어디입니까?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출 03:01 이드로) 집입니다.
이곳에서 르우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낳았습니다(출 18:03, 04). 모세 나이가 이제 80세나 되었습니다. 40년 전 모세가 자기의 시간표를 따라 행동할 때는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되니 하나님의 시간표가 서서히 작동합니다. 여러 해 후에. 이 말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정확한 시간 개념이 없던 고대의 관용어입니다.
오랜 기간이 경과 하였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애굽 관리를 쳐서 죽일 당시 40세였고(행 07:23~29) 바로 앞에 나아갈 때가 80세입니다(07:07). 따라서 여러 해는 40년입니다. 인생 경로에서 40년이란 세월은 짧지 않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연단은 모세를 완전히 무너뜨린 고난의 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사 48: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애굽 왕은 죽었고. 여기 애굽 왕은 투트모세 3세로서(B.C. 1504~1448) 약 32년간 애굽을 통치한 강력한 왕입니다. 그도 결국 B.C. 1448년경 죽었습니다.
이후 새로운 왕이 들어섰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고된 노역은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드디어 고통의 울부짖음이 하나님께 올려졌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시간표가 작동되기 시작합니다.
전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시간표가 작동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어 그 울부짖음을 들으십니다. 울부짖음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23절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여기서 기도에 대해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예를 들자면 신음, 낮은 속삭임, 부르짖음, 귀청이 떨어질 듯한 외침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기도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의 감정 상태와 마음가짐에 따라 격렬한 어조로 목청을 돋우어 크게 기도하기도 했고 때로는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시 145: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시는 도다 1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대부분 사람은 젊을 때가 일을 하는데 최적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40세 용기 충만과 세상 권력의 배경을 거부하셨습니다. 오히려 80세가 되기까지 40년을 기다리셨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혈기왕성의 때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다는 한계 상황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곳으로 몰아넣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소망이 없는 곳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무너지고 완전히 변화되었다 싶을 때 하나님의 시간표를 작동시키십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오늘 말씀을 들으실 때 의문점 하나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애굽의 정치 체제 아래서 왕이나 그 가족은 절대 권력자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양자이기는 해도 애굽의 왕자 신분입니다. 이런 모세가 애굽의 관리 하나 죽였다고 도망해야 합니까? 이런 의문점을 해소해 드리겠습니다.
당시의 애굽 정치의 권력 구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모세가 애굽 관리를 죽였을 때 바로 왕은 투트모세 3세입니다(Thutmose III, B.C. 1504~1448). 투트모세 3세는 부친 투트모세 2세와 궁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투트모세 2세의 왕비는 하트셉수트입니다(Hatshepsut).
이 하트셉수트가 아들을 낳지 못한 가운데 마침 모세를 강에서 건져내어 양자로 입양시켰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투트모세 2세가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자 투트모세 1세의 무남독녀인 하트셉수트가 애굽의 실권을 장악하고 섭정체제를 하였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지위도 상당히 격상되었습니다.
이때는 투트모세 3세가 어린 나이로 바로의 자리에 올랐기에 하트셉수트가 섭정 정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투트모세 3세는 왕임에도 자리가 불안정하였습니다.
하트셉수트가 혹 자신을 왕위에서 내리고 모세를 내 새우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월이 흘러 하트셉수트가 죽고 투트모세 3세가 확고한 왕권을 구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최대 정적(政敵) 모세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던 차에 모세가 애굽 관리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투트모세 3세는 이 일을 이스라엘을 향한 민족 감정으로 정치 쟁점화하였습니다.
모세를 끝까지 제거하려는 전략입니다. 이 정치 계략을 안 모세는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출애굽기를 이해하는 단초입니다.
모세와 십보라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 이름이 무엇입니까? 첫째 아들은 게르솜입니다. 그 의미는 낯선 땅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출 18:03). 둘째 아들은 엘리에셀입니다.
그 의미는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출 18:04). 모세가 게르솜과 엘리에셀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지난날의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결국 덧없음을 표현한 신앙 고백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세상 사는 동안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일합시다. 세상의 것은 결국 무너집니다. 지금 가지고 있어도 떠납니다. 영원히 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성경 말씀으로 자신과 싸움에서 이깁시다. 마음에 들어있는 세속이 욕망을 내어 버립시다. 개인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 사는 복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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