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0년 말씀

믿음에서 이탈하면 죽음이 옵니다.(대하 16:01~1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0. 6. 1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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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공에 이르는 사람보다 실패로 끝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면을 가치 있게 꾸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돌아볼 때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삶의 마무리는 더욱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 평가는 그 삶이 마무리되어야 제대로 드러납니다.

김삼일 가족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출발하였고 그 진행 과정이 박수를 받을 만할지라도 마무리가 잘못되면 그 인생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 이것 하나 아셔야 합니다. 내일 일은 우리에게 미지수입니다. 믿음 없이 내다보면 불안합니다. 대신 믿음의 눈으로 내다보면 행복합니다. 믿음의 성공을 내다보며 믿음으로 나갑시다.

 

오늘의 말씀은 유다 왕국 제3대 왕 아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아사 왕은 솔로몬의 증손자로서 잠시나마 종교개혁 왕으로 불렸습니다. 전국에 있는 많은 우상과 산당, 번제단을 파괴하였고 할머니인 대비도 우상 섬긴 일로 그 위를 폐위시킨 과감한 믿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사 왕을 하나님은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유다 왕국 20명 열왕기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위를 지킨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52년을 지킨 웃시야입니다. 다음으로 오늘의 주인공 아사 왕인데 41년을 통치하였습니다.

이 왕이 처음 35년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잘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무너져 인본주의 삶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불행한 삶의 역사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명예가 크게 실추되었습니다.

 

아사 왕이 정권 초기에 하나님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한 그 열정이 끝까지 유지되었다면 유다 왕국 역사에 다윗 왕과 견줄만한 명망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마무리에서 그만 하나님의 시선을 외면하다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단번에 그 쌓은 명예가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하나님을 바라보고 달려온 삶의 명예가 완전히 무너진 셈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믿음에서 이탈하면 죽음이 옵니다.로 정했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바아사 왕이 형제국가를 침략하였습니다.

 

01 아사 왕 제 삼십 육 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아사 왕에 관한 내용은 역대하 14~16장까지 나옵니다. 이 가운데 아사의 전반기에 대한 기록이 14장이고 중반기에 대한 기록이 15장이며 후반기에 대한 기록이 16장입니다. 오늘 살펴보는 말씀은 아사의 후반기의 삶입니다. 01절 말씀을 봅시다.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아사 왕이 그의 통치 말기에 국가의 큰 위기를 만납니다. 북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남 왕국 유다의 라마를 침략하였기 때문입니다바아사는 북이스라엘 제3대 왕입니다. 이 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유다와 전쟁하다 삶을 마치고 맙니다(왕상 15:27~16:07; 대하 06:01~12).

 

그러면 바아사가 왜 형제국가 라마를 침략합니까? 왜 라마에다 요새를 구축합니까? 라마는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6정도 되는 지점입니다.

북이스라엘 사람이 유다로 내려올 때 거치는 국경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남북을 놓고 볼 때 정통성 있는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반대로 북 왕국 벧엘과 단에는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섬기는 우상이 있습니다. 이런 북이스라엘의 신앙 혼란기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유다로 내려오는 이주자를 바아사가 차단하기 위해 라마를 침략하였습니다.

 

형제국가 간에 화목하게 지내야 합니다. 만일 다른 나라가 침략해 오면 함께 힘을 모아 물리쳐야 할 사이입니다이스라엘을 연 여로보암의 행적을 볼까요? 왕으로서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다윗 왕 이후로 제사는 예루살렘에서 지내야 하는 말씀 때문입니다(왕상 09:03). 그래서 바아사는 나라의 근간이 무너지는 일을 막기 위해 유다를 침략하였습니다.

매우 잘못딘 일입니다. 형제국가와 관계는 믿음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사람 사이에 국가 간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문제를 풀려고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전쟁하지 않고 외교로도 얼마든지 풀 수 있습니다. 정치력을 발휘하면 됩니다. 그런데 바아사나 아사 두 왕이 믿음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습니다아사에 대해서는 역대하 14, 15장을 보면 정권 초기와 중기까지는 대단한 믿음의 위력을 떨쳤습니다. 그 증거를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대하 14:04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05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 상을 없애매….

 

아사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정권 10년 차를 맞았습니다. 전국에서 우상숭배의 단을 훼파하는 결과로 하나님께서 유다에 몇 년 동안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 후 에티오피아(구스)의 세라 왕이 백만 대군과 병거 삼백 승을 앞세워 침략해 왔습니다(대하 14:09~12). 이때가 아사의 정권 중기 시절로 아사가 아사랴 선지자의 지도를 따라 종교개혁을 두 번째 추진하던 때입니다(대하 15:01~08). 아사는 국가의 위기를 잘 넘깁니다(대하 15:01~08).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아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히 체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가 넘치는 모습입니다. 반면 바아사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자리를 이탈하였습니다. 해서는 안 될 전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2. 아사 왕은 형제국가 간의 전쟁을 망령된 방법으로 대처합니다.

 

02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내어다가 다메섹에 사는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01절 말씀에서 바아사가 유다를 침략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02절 말씀을 보면 아사의 정권 말년 모습이 완전 불신으로 변질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아람 왕 벤하닷에게 주고 용병을 사들였기 때문입니다. 본 절과 병행 구절 왕상 15:18에는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모든 은금을 벤하닷에게 보냈다고 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아사의 정치 일정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사 왕 35년까지 20년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때 아사는 종교개혁의 중기를 넘어서면서 그만 안일과 나태함으로 하나님 찾는 일을 등한히 하였습니다. 믿음의 감각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아사는 한때 에티오피아의 백만 대군과 병거 삼백 승까지 기도로 물리친 믿음의 군왕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침략해 오자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면 역시 기도하면서 정치와 외교로 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의 시도를 해 보지 않고 성전과 왕궁의 모든 보물을 벤하닷(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 아들 왕상 15:18)에게 보냅니다.

형제국가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합니다결과는 아람 왕 벤하닷이 그 많은 전쟁 비용을 받고 북이스라엘 침략하자 바아사는 그걸 방비하느라 유다 침공을 포기하였습니다(04, 05).

이렇게 해서 유다는 위기를 넘깁니다. 그러면 이 불신앙 행동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사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시느냐가 중요합니다.

 

0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 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선견자 하나니가 아람 왕 벤하닷에게 도움 청한 아사의 일을 망령된 일이라고 책망합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개인의 미래보다 주로 국가의 운명을 예견하고 선견자는 보통사람보다 미리 앞을 내다보는 능력의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하나니는 계속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전쟁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이때 아사가 국가의 위기를 하나님께 기도로 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에티오피아의 백만 군대를 물리친 것처럼 잘 풀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풀어야 할 일을 사람의 정치로 판단하고 우상숭배 국가와 동맹을 맺었습니다(03). 성전의 보물까지 내주고서 말입니다. 아사의 이런 행위를 망령된 일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이것 하나는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망령된 일이라고 하면 그 결과는 죽음의 길이  됩니다.

 

잠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아사가 선견자에게 경고를 받았으면 당장 할 일이 무엇입니까? 회개의 자리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그런데 망령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아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견자를 고문의 장소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고도 아사는 벤하닷과 동맹하여 북이스라엘을 축출하였다고 기뻐합니다. 아사가 이런 상황에서 승리에 도취해 있을 때입니까? 그럴수록 하나님의 시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에 우리의 시선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 시선이 복을 받는 자리입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를 보십시오주님과 시선이 마주칠 때 어떻게 행동합니까? 오늘 네가 닭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22:61, 62).

주님과의 시선이 마주쳐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바라보십니다. 이때는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된 길이 열립니다.

 

 

 3. 믿음에서 이탈하면 죽음이 옵니다.

 

12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하나님의 선견자 하나니가 아사의 불신앙을 망령되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는 아사의 모습을 보십시오드디어 하나님께서 심판의 손을 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손길은 회개 외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머뭇거리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다는 말은 아직 마지막 한 번 더 기도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직도 죽지 않고 생명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합니다.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찾지 않습니다.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역대기 저자는 아람 왕에게 의존하였던 그 불신앙이 마지막 죽음의 병을 앓으면서까지 계속 가지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성경은 의사의 치료나 약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반 은총으로서 만민에게 의술과 약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가 병이 났을 때 치료의 목적으로 포도주를 쓰라고 권한 일이 있습니다(딤전 05:23).

 

12절은 아사가 의원을 찾아간 그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료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을 전혀 의지하지 않는 불신앙에 대하여 지적할 뿐입니다.

유다 왕국에 아사 왕과 같은 상황을 만난 한 왕이 있습니다. 13대 왕 히스기야입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죽음의 통보를 받았습니다심지어 인생을 정리하라는 통보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신 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문제를 풀었습니다(왕하 20:01~07).

 

시 103:0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0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사람이 살아가면서 신령한 은혜를 받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리는 일입니다. 이게 막히면 은혜의 길에서 이탈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따라 합시다.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믿음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아사가 하나니의 메시지를 듣고 기분이 몹시 상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래도 믿음으로 권고하는 하나님 종의 음성이라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아사는 왕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믿음의 귀를 닫아버렸습니다. 인간보복까지 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 말씀에 귀가 닫히면 사람 말에도 귀가 닫힙니다.

 

모든 역사를 보면 왕들의 비참한 말로는 귀가 막히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다윗도 죽음의 자리에 들어가는 죄를 지었지만, 선지자 나단의 말을 잘 받아들임으로 살길을 열었습니다.

교회 생활에서 어떤 상황을 만날 때 자기 생각으로만 판단하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 마음이 불편합니까? 일단 하나님 말씀에 비춰보십시오어떤 사람이 복을 받느냐? 어떤 사람이 버림을 받느냐의 차이는 믿음의 귀가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에 따라 결정이 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자칫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흔히 성공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일 말입니다.

여러분? 이게 사실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 중에도 겸손한 사람이 많고, 실패한 사람 중에도 교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교만은 인격과 관련이 있지 믿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 18211881)는 청년 시절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놀음이나 술의 쾌락에 빠져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방탕한 삶 속에서도 도스토옙스키가 끝까지 버리지 않고 고집했던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하숙집을 언제나 러시아 정교회의 십자가가 바라보이는 곳에 얻었고 늘 신약성경을 가지고 다녔다는 사실입니다. 삶의 깊은 수렁에 빠질지라도 그 자리까지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였습니다.

그 하나님과 눈 맞추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결국, 그가 기대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는 따뜻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에 화답하였습니다. 마침내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명예를 살려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사 왕은 한 마디로 신본주의로 시작하였다가 인본주의로 끝나버린 인생입니다. 성령님으로 시작했다 육체로 마친 결과와 같습니다.

통치 말년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보다 사람 의지한 것이 명예의 추락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사람까지 옥에 가두는 불신앙의 결과는 명예의 추락입니다.

 

그의 종말은 병들어 쓸쓸히 죽어간 삶입니다. 아사는 그 삶의 마지막을 믿음으로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실패입니다반면 그 삶에 대한 평가를 왕상 15:14에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회개했다는 말은 없지만,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였다는 뜻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명예입니다. 명예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 명예 얻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