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7년 말씀

히브리의 신령한 의미를 기억하십시오.(창 14:13~1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7. 12. 3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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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제가 웹 소설에 소설을 하나 연재하려 합니다. 독특한 별명을 가지면 사람들이 좀 더 기억하기 쉽지 않을까? 해서 독특한 별명을 짓고 싶습니다만 저는 작명센스가 없습니다.

독특한 별명을 제게 지어주실 수 있습니까? 제 성격은 조금 무뚝뚝한 편입니다. 욕은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내공 100 겁니다. 이에 대한 답변이 몇 개 올라 왔습니다. 미니꿀꿀이, 요조숙녀(여자라면), , 큰개, 미친개, 짱돌, 비싼 뇨자, 쉰라면, 삼순이, 타락천사, 소설 잘 만드세요. 파이팅! 그러고 보니 요즘은 좀 튀는 간판, 튀는 별명, 튀는 이름 등 튀는 이름을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시대입니다. 성공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Hebrew)라는 단어가 성경에 47(구약 33, 신약 14)회 나옵니다. 아브라함을 지칭하는 독특한 명칭으로 아브라함의 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후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는 용어가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언어를 표현 할 때도 이스라엘어 하지 않고 히브리어라 부릅니다. 성경 66권 중 구약 성경 대부분(다니엘, 에스라 등 부분적으로 아람어)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히브리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히브리라는 말의 유래를 살펴보겠습니다.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히브리 사람 아브람. 히브리(Hebrew)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옵니다. 먼저 어떻게 해서 이 히브리가 나오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목초지 다툼으로 헤어진 후 롯은 소돔성에 이주하여 살았습니다(13:05~11). 당시는 부족들 간에 전쟁을 자주 하였습니다. 롯이 속한 소돔성도 주변 부족들과 연합하여 부족 대 부족으로 전쟁을 했는데 지는 바람에 롯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때 롯의 가정에 종으로 일을 하던 한 사람이 포로 신세를 면하자 즉각 아브라함(17:05)에게 달려와서 롯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한 도망자가 이 소식을 전할 당시 아브라함은 아모리 족속 마므레라는 사람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살면서 마므레 족속의 몇몇 족장들과 동맹을 맺은 상당한 실력자였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즉시 집에서 훈련한 가병(家兵) 318명과 마므레와 그 형제들의 동맹군을 거느리고 단까지 좇아가서 구출해 왔습니다(1416,24). 이런 과정에서 도망자가 전한 말 가운데 한 용어가 히브리입니다.

히브리, 우리가 많이 듣는 명칭 아닙니까? 그런데 이 명칭은 가나안에 살고 있는 아모리 족이 아브라함을 좀 구별하는 의미에서 부르는 명칭입니다. 원주민의 약간 텃세하는 명칭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그러면 히브리라는 말의 본래의 의미가 무엇이며,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 그 기원을 역사의 상황들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ירבע ibrı̂y). 강 건너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서(39:14,17, 40:12, 43:32), 70인 역에서도 건너편에서 온 사람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가나안 사람이 아닌 갈대아 우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팔레스타인으로 왔습니다.

다른 편에서 온 사람, 저편에서 온 사람 곧 강을 건너 온 사람의 택호(宅號)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명칭이 후일에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관용어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부인이 서울에서 살다 김해로 시집을 왔으면 그 집을 서울집이라고 하고, 그들 부부를 각각 서울댁 아저씨, 서울댁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원리입니다.

 

초기에는 이 히브리라는 명칭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말이 아닙니다. 유대인들도 스스로를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주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 관하여 다소 경멸적인 표현을 할 때 쓰였습니다(39:14; 02,06; 삼상 29:03). 또 하나의 히브리 유래는 아브라함의 7대 조부 에벨이란 이름에서 파생되었다고 추측합니다. 히브리라는 말과 에벨이란 이 두 단어가 같은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0:24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רבע)을 낳았으며.

 

에벨(עבר)은 건너다는 뜻을 가진 아바르(עבר)에서 유래되었으며 건너편에서 건너온 자란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는 에벨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히브리 민족이 에벨의 후손이고, 히브리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도 에벨과 같은 신앙 노선을 따라 유프라테스강을 건너왔기 때문에 조금 설득력을 가집니다.

 

 

  2. 히브리의 신령한 의미는 내려놓음입니다.

 

23:0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시 아브라함을 알고 있던 가나안 원주민들은 아브라함을 자기들과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하였습니다. 다소 좀 무시하는 의미임에도 아브라함은 이 일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갈대아 우르에서의 우상 문화를 다 던지고 하나님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왔고, 또 하나님께서 훗날 자기의 자손들에 약속의 땅으로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원주민들처럼 좋은 집을 짓고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역을 순례하도록 인도하시는 줄 알았기 때문에 오늘 폈다 내일 접는 장막생활을 하면서도 조금도 불편해 하지 않았습니다. 장막생활 자체로 만족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넉넉한 경제력, 병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묘지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완전 바가지를 씁니다(23:08~18). 그래도 마음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왕따의 자리를 자처하면서 그들과 한 공동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괄시를 당합니까? 항의도 않고 계속 양보합니까?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심정을 히브리서 기자가 소상히 밝힙니다.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아브라함의 행적을 놓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삶이 좀 불편하더라도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천국의 소망, 영원한 도성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그도 그 시대의 사람들처럼 세상의 향락과 더불어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품격 있는 생활이 진정한 삶의 가치 아닙니까? , 믿음이 익어가는 사람, 믿음이 발효되어 가는 사람은 불신자와 마음을 섞고 살지 않습니다.

같이 어울리기는 해도 믿음 줄을 던져가면서까지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잘 익어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상대하여도 자기를 낮출 줄을 압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소금과 빛 된 모습을 나타내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05:13,14).

 

조지 워싱턴(미국 George Washington, 1732.2.22.~1799.12.14)이 군에서 제대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있던 어느 여름날 홍수가 범람하자 물 구경을 갔습니다. 물이 넘친 정도를 살펴보고 있는데, 육군 중령의 계급장을 단 군인 한 사람이 초로(初老)의 워싱턴에게 다가왔습니다. 노인, 미안합니다만 제가 군화를 벗기가 어려워서 그런데요. 제가 이 냇물을 건널 수 있도록 저를 업어 건네줄 수 있을까요?

, 그렇게 하시구려, 이리하여 중령은 워싱턴의 등에 업혀 그 시냇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노인께서도 군대에 다녀오셨나요? , 다녀왔지요. 사병이셨습니까? 장교였습니다. 혹시 위관급(尉官級)이셨습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아니 그러면 소령이었나 보네요. 조금 더 위였습니다. 그럼 중령이셨군요. 조금 더 위였습니다. 아니 대령이셨단 말씀이십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아니 그럼 장군이셨네요.

중령이 당황해서 노인 어른, 저를 여기서 내려 주세요. 그러자 워싱턴이 냇물을 건너기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소. 내가 업어 건네 드리리다. 노인께서는 그럼 준장이셨습니까? 조금 더 위였습니다. 혹시 중장이셨나요? 조금 더 위였습니다. 그럼 최고의 계급인 대장이셨단 말씀이세요? 조금 더 위였습니다. 이때 막 냇가를 다 건너게 되자 워싱턴이 중령을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을 업어 준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육군 중령은, 그 텁수룩한 노인이 당시 미합중국의 유일한 오성장군(五星將軍) 조지 워싱턴임을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우리는 차림새가 조금 초라하다거나 몸에 걸친 의복이 좀 남루하다 해서 사람을 낮춰보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3. 히브리의 신령한 의미는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음입니다.

 

11: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히브리라는 명칭은 이미 건너 온 유프라테스강을 되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되돌아 갈 필요가 없는 강입니다. 아브라함만 강을 건넜습니까? 우리 성도들 가운데도 강을 건너 온 분이 있습니다.

조선의 땅에서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탈북민 말입니다. 더 좋은 곳으로 왔으니 다시 돌아가지 않을뿐더러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옛 생활을 정리하고 나왔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믿음의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 인생 길 가는 여러분, 지나가는 길에 너무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만일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에 많은 미련을 두게 되면 방황하게 됩니다. 이런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에게 주님은 이런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0:20).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는 근거가 하늘나라에 영원한 본향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사람 아브라함은 특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에 심어졌기 때문입니다(12:05). 죄와 더불어 살아가는 적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은 특별히 구별되게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권하는 말씀을 새겨들읍시다.

 

0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옛 사람, 예수님을 믿기 전 스타일을 깨끗하게 쓸어버립시다. 김삼일 가족들은 중생하기 이전의 사람을 다 버리고 구원의 자리에 참여한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은 성도입니다.

지금부터는 죄의 종이 되어 살던 생활도 완전 청산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06:06).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찬양하며 말씀을 듣는 성도는 죄악 된 생활을 던져 버리고 믿음의 히브리 강을 건너 온 사람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벧엘로 올라가면서 믿음이 흔들릴 수 있는 우상의 요소들을 모두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 버렸습니다(35:04). 이것 하나는 꼭 아십시오. 아브라함도, 그의 조카 롯도 같은 히브리 사람입니다. 고향을 같이 떠났고, 가나안에도 같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은 달랐습니다. 롯은 히브리인이면서 히브리인답게 살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사는 히브리인이 있고, 롯처럼 사는 히브리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었던 아브라함처럼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믿음의 고백이 되도록 몇 가지 따라 합시다.

 

*나는 죄악의 강을 건너 온 사람이다. *나는 죄와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나는 아무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세상의 무가치 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복된 김해삼일교회에 심겨진 사람이다. 아멘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고려 말의 충신으로 불리는 사람 가운데 정몽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은 정몽란입니다. 그러다가 정몽룡으로 바뀌고 다시 정몽주로 바뀌었습니다. 정몽주의 아버지가 꿈에서 중국의 대정치가인 주공을 본 뒤에 정몽주가 태어났다고 해서 나중에 정몽주로 개명하였다고 합니다. 몽주는 꿈에서 주공을 봤다는 뜻으로서 주공 같은 성인을 그리워하며 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김삼일 가족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닮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건넌 유프라테스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도 있습니다. 이 강을 신령하게 상징할 때 중생의 강, 죽음의 강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미 이 강을 건너왔으며 신령한 히브리인 되어 살아갑니다.

우상숭배의 요소를 완전 지워 버리고 살아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의 강, 죄악의 강을 건너온 사람은 우상의 요소들, 내 인생을 책임지지 못하는 불신앙의 요소들을 과감하게 걷어 버리고 나아갑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믿음의 길로 나아갑시다. 신령한 히브리 강을 건넌 사람은, 몸은 세상에서 살지만 장차 올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삽니다. 육신의 정욕을 극복합시다. 신령한 히브리 강을 건넌 사람은, 소유에 집착하는 가치관을 버립니다.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새 해를 바라보는 길목입니다. 믿음으로 전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