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7년 말씀

바울은 선교사역에 올인하였습니다.(고후 01:08~11 )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7. 12. 1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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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의 체제를 세운 장 칼뱅(John Calvin,1509,7,10~1564,5,27)은 걸어 다니는 병원이란 별명을 들었습니다. 일생동안 병약한 몸으로 건강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의 초상화를 보면 바짝 마른 얼굴에 뾰족한 턱을 한 날카로운 인상입니다.

그런 인상이 된 것은 병 때문으로 보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일곱 가지 중병을 앓았는데 첫째 이틀에 한 번씩 심한 두통을 앓았으며, 둘째 심장병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셋째 폐병으로 오후에는 미열이 계속되었습니다.

넷째 위장병으로 하루 한 끼 밖에 먹지 못했으며, 다섯째 치질, 여섯째 신경통, 일곱째는 각기(脚氣)병으로 팔다리에 힘이 없어서 걷는 일조차 매우 힘들어 했습니다. 그런데도 칼뱅은 25세에 그 유명한 기독교강요를 저술하였고, 신구약 주석(계시록 제외)을 집필했으며, 제네바에서 신정정치 체제를 수립하여 시민들이 정직과 의의 길을 가도록 이끌었습니다.

 

칼뱅이 55세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주님의 나라를 위한 고난의 행진에 전심전력하였습니다. 임종의 순간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08:18)는 구절을 겨우 암송하였는데 그때 모습이 8,90세의 노인 같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삶을 압축해 놓은 흔적입니다. 그래서 설교 말씀을 바울은 선교사역에 올인하였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바울은 선교사역의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았습니다.

 

09: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전도자로 나서기 전까지 복음에 대한 박해, 예수님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을 가하였습니다(09). 다른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악랄하지 않았는데 유독 바울만은 복음을 심히도 훼방하였고 기독교인들을 마구 괴롭혔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렇게 했다고 인정을 했습니다(22:04,05). 이렇게 사악했던 바울이 마침내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행위들이 결코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었음을 깨달았고, 이후 믿음이 성숙해 가면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고백하였습니다(딤전 01:15).


바울이 그렇게도 핍박하였던 예수님을 다메섹에서 주님으로 만난 이후의 일을 아십니까? 자기 사명을 바르게 세우려고 그 길로 아라비아 광야로 들어가서 3년 동안 홀로 연단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0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세상에서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피해갈 수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고난들은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닥친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전도자로서 당해야 하는 고난의 흔적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골로새교회를 향하여 이런 표현도 하였습니다,

 

0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예수님이 고난을 다 당하지 않고 좀 남겨 놓은 고난이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특별한 고난이 있는 겁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신자들 스스로의 허물이나 실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이 고난은 전도자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만나도 되는 고난입니다.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바로 믿고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만나는 길입니다. 바울은 굳이 이 길을 안 가도 되었지만 자기를 향하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로 작정하고 고난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05:4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07:13),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09:23) 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고난의 길을 가는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바울은 이렇게 복음의 길이 고난의 길임을 잘 알았습니다. 때로는 극심한 가난과, 극심한 고난과, 극심한 핍박의 길임도 잘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선교의 사명감에 불탔기 때문에 이 길을 마다 않고 기쁨으로 걸어갔으며, 마지막에는 자신을 순교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2. 바울은 선교사역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0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δψυχος). 아시아의 장소성 문제는 에베소(고전 15:32; 19:23~40)가 가장 유력하나 말씀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강조점은 고난을 당한 장소 보다는 바울이 당한 고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 대한 일입니다.

여기서 환난은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바울을 향하여 가한 생명의 위협으로서, 먼저 여론몰이로 민심을 왜곡하여 바울을 고립시켰습니다(19:23~40). 이들은 에베소 전역을 소동케 하여 바울 선교를 탄압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목숨이 열 개가 있어도 모자랄 정도의 환난이었습니다.

 

바울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의 고난입니까? 어떤 서신에도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설명해 놓은 곳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표현을 해야 한다면 한 마디로 상상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살 소망까지 끊어졌을 정도의 고난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고난입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이른 고난입니다. 마치 버림받은 사람처럼, 죽음 앞에 내 몰릴 정도로 환난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만 고난당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고난 장으로 불리는 고후 11:23~27절에 자신이 당한 고난들을 일정부분 기록해 놓았는데 모두가 극심한 고난들입니다. 다 열거 할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일부만 보겠습니다.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27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런 정도의 고난이라면 전도자의 길을 포기할 만한 한계까지 왔다고 해도 될것입니다. 이 정도로 끝내고 남은 세월 그저 편안하게 생활해도 굉장한 업적을 남긴 큰 인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습니다. 성공한 전도자로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으로 끝내지 않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 곧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고후 11:28). 또 고린도후서보다 2년 쯤 뒤에 기록 한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놓고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였습니다(09:02).

 

욥은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고(05:07) 하였고, 다윗은 의인은 고난이 많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모든 고난에서 건져주신다고(34:19) 하였습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에 능통한 자 이었기에 어쩌면 이런 말씀들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와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간증하면서 어떤 환난을 만나도 전도자의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3. 바울은 모든 고난을 중보기도로 풀어 갔습니다.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중보기도(中保祈禱)를 통해 크게 역사하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01:19). 바울은 중보기도를 부탁함에 있어서 자신이 아무리 사도일지라도 뒤에서 기도하는 그 능력을 더욱 필요로 하는 연약한 자임을 밝힙니다.


도우라(συνυπουργοντων). 함께 도와야 한다는 의미로서 이는 바울이 고린도교회 신자들 모두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합니다. 간구함으로 도우라는 말은 기도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체험한 사람, 기도와 그 응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요청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골로새교회, 데살로니가교회 외에도 개인별로도 중보기도를 부탁을 합니다.


04:0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살전 0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살후 03:01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02...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믿음의 신자가 함께 모여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기도의 대상자를 돕는 가장 든든한 백입니다. 기도는 힘든 자에게 쉼을 주고, 피곤한 자에게 힘을 주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돌이키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를 지원하라고 요청합니다. 기도로 도움을 주고, 기도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확실한 도움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습니다.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주님의 기도가 없었다면, 주님을 떠났던 제자들이 다시 회복하여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이렇게 돕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만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을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능력으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여러분은 기도의 능력을 과소평가합니까? 대단한 사람일지라도 기도의 지원 없이는 홀로 신령한 생활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에는 복음의 바람은 힘차게 불었지만 예루살렘교회는 매우 불완전했습니다.

한 날은 헤롯 왕이 사도들을 제거하려고 야고보를 죽인 후 이어서 베드로를 잡아 수감하였습니다. 이때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은 베드로의 석방을 위하여 간절히 중보기도를 했는데 이 능력으로(12:05~10) 옥문이 활짝 열려 베드로가 나왔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벧전 0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복음전파를 위해서는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들도 내려놓았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을 우선순위로 삼겠다는 표현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 현장을 들어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의 환경을 만나도 굳건한 믿음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바울과 함께하신 하나님은 우리와도 함께 하시고, 우리의 고난과 고통의 현장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고,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0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난당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주님의 이름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면 이 역시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장차 받게 될 상급으로 보상이 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권합니다.

 

벧전 0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