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서 만남을 말할 때 더러는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생선 같은 만남, 꽃과 같은 만남, 손수건 같은 만남입니다.
생선 같은 만남이 뭡니까? 생선 냄새 싫잖아요? 만나기만 하면 비린내 풍기듯 얼굴 불편한 만남을 말합니다. 만나면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 좋을 사람 있습니까?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을 남기는 만남은 오래 갈수록 더욱 불편합니다.
꽃과 같은 만남은 뭡니까? 향기가 나서 좋기는 한데 금세 시드는 만남을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꽃과 같은 사랑은 풋사랑의 만남입니다.
손수건 같은 만남은 무엇입니까?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 줍니다. 상대가 기뻐할 때는 자기의 기쁨처럼 축하해 줍니다. 힘들 때는 땀도 닦아 주며 언제나 함께하는 만남입니다.
가정에서의 부부의 만남,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의 만남이 손수건 같은 만남이라면 진정한 행복이겠지요.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동업자를 만나는 것은 복입니다. 만나는 상대만큼 내 삶의 수준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좋은 만남 가운데 가장 좋은 만남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질이 높아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려서 복된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오네시모가 등장합니다. 이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입니다. 그런데 이 종이 어느 날 주인 빌레몬의 금품을 훔쳐 로마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또 잘못해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감옥생활이야 말할 수 없는 고통이겠지만 결과는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오네시모가 감옥에서 바울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최고의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면 놀라운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생명 변화가 일어난 오네시모」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오네시모의 신분과 현재의 처한 상황입니다. |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초대교회 시절, 즉 1세기 때는 로마가 세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시기입니다. 이때 종의 지위는 주인에게는 마치 영혼 없는 두 발 가진 짐승 수준입니다. 주인은 종의 생사에 관한 권한을 가지고 마음대로 사고팔기도 하였습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 목록에 올라 기계처럼 일하는 존재입니다. 혹 좋은 주인을 만나면 조금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그저 비참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만일 종이 도망을 하다가 잡히면 사지 중 일부를 절단하는 형을 가합니다. 영원히 종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이마에 도망자를 뜻하는 F(Fugitive)를 찍습니다. 때로는 작은 죄 때문에 십자가형의 죽음을 맞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오네시모라는 종이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하였습니다. 거기다 주인의 재물까지 도둑질하고서 말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간 큰 겁니다.
그가 왜 도망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밝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주인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도망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사 사회에서 절도죄는 종인 이상 잡히면 죽음을 벗어날 길 없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가 도망을 한 자체가 대단한 모험입니다. 한밑천을 잡아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인생살이가 그리 호락호락합니까? 결코, 만만하지 않아요.
오네시모가 도망을 하여서 숨은 로마가 어떤 나라입니까? 당시는 각 나라 사람이 몰려드는 세계의 중심지입니다. 사람이 많이 붐비는 곳입니다.
오네시모가 아무리 변장해도 신분은 종입니다. 종인 만큼 그다지 내 세울만한 실력이나 사회 적응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분이 탄로 나서 감옥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오네시모가 들어간 곳에서 아주 특별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불법을 저지르고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복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 동족으로부터 고소를 당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처지입니다.
반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의 처지에서 도망하였습니다. 잡히는 바람에 자유인의 꿈은 멈추고 죄수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종과 죄수의 신분 다 죽어 마땅합니다.
로마 당국은 도망친 종은 정치범과 같이 체제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엄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오네시모는 죽음 외에는 달리 길이 없습니다.
이런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전도자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논하는 형제의 자라에 올랐습니다. 복음은 죽어가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소망 없는 자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줍니다.
여기서 인권주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은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종을 부릴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윤리 면에서 조금 문제가 되겠지요?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빌레몬처럼 종을 거느린 믿음의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또 주인은 믿지 않아도 종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주종관계에 복음이 들어가면서 인권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사회의 뉴스거리였습니다. 이때 믿는 주인들은 종을 형제 의식을 가지고 서서히 해방해 나갔습니다.
2. 오네시모가 복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Ὀνήσιμος)는 유익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가 바울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름값도 제대로 못 하는 무익한 자였습니다.
바울을 만남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유익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오네시모의 만남을 복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복된 만남입니까? 비록 감옥이지만 죄수와 죄수의 만남이 아닙니다. 목회자와 새가족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이름값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는 이미 종이고 죄수의 처지입니다. 이런 그가 신령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상세한 내용을 생략했지만, 주인 빌레몬을 위해서도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오네시모를 이렇게 새사람으로 변화를 시켰습니까? 무엇이 무익한 그를 유익하게 만들었습니까?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새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바울이 전해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오네시모를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고후 0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이 뭐라고 증언합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그 안에 거하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이 된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 온갖 욕망과 옛 습관으로 뭉쳐진 인격이 새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오네시모가 그러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내 심복이라고 부릅니다(12). 심복이 무엇입니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내 마음과 뜻을 가장 잘 알아차리고 그에 맞는 행동으로 뒷받침하는 자입니다. 모든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놓고서 내 심복이라고 하는 특별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를 가리켜 사랑받는 형제라고 부릅니다(16). 세상에 누가 종을 가리켜 사랑받는 형제라고 부른다는 말입니까?
당시 사회에서 종과 주인이 한 형제가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나 오네시모는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신분이 격상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무익한 오네시모의 변화된 모습을 보겠습니다. 유익한 사람(11), 바울의 심복(12), 바울의 형제(16). 이는 분명 놀라운 신분의 변화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 안에서 거합니다. 구원받은 천국 백성입니다. 이미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변화되어야 합니다. 생활의 변화, 믿음의 변화가 일어나서 오네시모처럼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교만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계속 위협과 살기를 드러내었습니다(행 09:01).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으로 거듭난 후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3. 예수님 안에서는 종도 형제로 바뀝니다. |
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5회 사용합니다. 01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 05 네 사랑과 믿음, 07 너의 사랑, 09 사랑으로서, 16 사랑받는 자 등.
바울은 종이 감히 주인의 재물을 훔쳐 도망하다 잡힌 오네시모를 살리기 위해 계속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랑으로 문제를 풀자는 뜻입니다.
바울에게는 잘못을 저지른 자식을 대신해서 용서를 구하는 부모의 마음이 보입니다. 어머니의 애끓는 심정으로 빌레몬에게 사랑과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02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도망자 오네시모의 문제가 단순히 빌레몬 가족의 이해와 사랑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의 문제는 좁게는 빌레몬 가정의 일입니다. 그러나 용서를 받고 문제를 원만하게 수습하려면 골로새 교회 성도 모두의 사랑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빌레몬 너의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는 것도 빌레몬 개인보다 교회 성도 모두가 읽고 원만한 수습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성도 전체가 읽어야 합니까? 오네시모의 일은 이미 공개가 되어버렸습니다. 파장이 큰 사건입니다. 한두 사람에 의해 수습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의 가족과 그의 집에 모여 있는 골로새 교회의 성도 모두에게 사랑의 동의를 구합니다. 오네시모를 따뜻하게 받아달라는 바람입니다.
1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보다 더 사랑을 받는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권합니다. 16절은 바울이 오네시모에 대하여 얼마나 큰 배려를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 배려의 증표가 종과 같이 대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종의 신분을 공개하지 않고 은근히 덮어 주고 있는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이미 예수님을 믿고 변화가 된 사람이다. 또 함께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종의 차원을 뛰어넘자 이런 뜻입니다.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으라고 부탁합니다.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이라는 말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종이 아닌 형제로서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빌레몬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전에 사랑하던 때보다 훨씬 더 뜨겁게 사랑해야 할 것을 주문합니다.
이유는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육신으로는 주종관계일지라도 주님 안에서는 서로가 믿는 영적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형제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참고 양보해 주는 데 있습니다.
고전 13:0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0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유익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를 볼까요? 지난날에는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도망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하여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 그 이름처럼 유익한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은 내적 삶으로서 그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됩니다.
믿음의 성도는 그 속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므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보배이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이제는 보배합이 됩니다.
사람은 외모보다 그 속에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겉은 번지르르해도 속에는 악이 가득하다면 무가치한 사람일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보배 예수님으로 인해 평가받읍시다.
고후 04:0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사람은 질그릇과 같이 연약합니다. 우리 모두 다 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내 속에 주님을 모시고 복음의 중매자의 삶을 삽시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변화가 일어나면 이 또한 복된 일입니까?
바울이 오네시모를 복음으로 변화시킨 것처럼 2017년은 교회를 더 사랑하고, 성도를 더 사랑하면서 복음의 역사를 나타내는 일꾼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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