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7년 말씀

선교는 서로 등을 두드려야 합니다(몬 01:23~2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7. 3. 1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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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조선시대 27 519년 역사에서 가장 인복 많았던 왕이 14대 왕 선조(宣祖, 1552. 12.6~1608.3.6)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선조 때 유능한 인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선조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무능한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으로 통치하는 동안 당파싸움에 휘말려서 제대로 정치를 펼쳐보지 못했고 치세 후반에는 임진왜란을 만나 나라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때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했고 심지어 명나라로 피난을 갈 생각까지 하였습니다. 이 선조 치세 때 뛰어난 인재들이 나와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였습니다.

성웅 이순신, 행주대첩의 권율 장군, 의병 장군 곽재우 같은 걸출한 무장들, 류성용, 이덕형, 이항복 등 유능한 재상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와 같은 대학자들, 명의로 불린 허준입니다. 선조는 무능했지만, 인복이 있어서 그나마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대통령 측근 중 정신감정을 해야 할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로 인해 대통령과 여러 측근이 공멸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지요.

빌레몬서의 저자 바울은 유능한 사역자이지만 인복도 많았습니다. 곁에 좋은 믿음의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인재들을 붙여주신 결과입니다.

바울은 그들과 동역하면서 놀라운 역사를 일구어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동역자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의 마무리 인사 내용입니다. 마무리 가운데 특별히 자기와 함께 선교에 동참한 사역자들도 빌레몬에게 안부를 곁들이고 있습니다.

빌레몬 힘내, 이런 격려의 안부입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서 힘을 냅시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서로 등을 두드려야 합니다.로 정했습니다.

 

 

1. 선교에는 서로 등을 두드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빌레몬서의 마지막 부분에 다섯 사람이 등장합니다.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그리고 누가입니다. 이들은 선교사역의 현장에서 바울과 함께한 귀한 믿음의 일꾼들입니다. 바울의 선교에 큰 힘이 된 일꾼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믿음의 꿈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함으로 위대한 선교의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귀한 일꾼들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 이 다섯 사람이 빌레몬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믿음의 사람 빌레몬은 이 서신을 통해 등을 두드려 주는 이들로 인해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다섯 사람이 누구인지 인적 사항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에바브라입니다. 에바브라에 대해서는 빌 02:25~30절을 보면 활동상을 다소 볼 수 있습니다. 에바브라는 자기의 생명보다 복음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 인물입니다. 바울의 사역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 도운 일꾼입니다.

선교를 위해서 뛰는 분은 이와 같은 인물을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교를 잘 이루어 갈 있는 귀한 자원입니다.

 

둘째는 마가 요한입니다. 마가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교회의 출발이 되었던 집을 소유한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 때 수행원으로 동참하였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예루살렘 집으로 돌아간 배신자 마가이기도 합니다.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는 마가로 인해 두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다투고 갈라서도록 원인 제공이 된 장본인입니다(15:36~39).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레몬서를 쓰는 가운데 마가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바울로부터 배신자라는 소리를 듣고 약 15, 6년 동안이나 끊어진 인물인데 어떻게 갑자기 동역자로 등장합니까?

바울이 동역자라는 호칭을 쓰는 것으로 보아 마가가 바나바를 따라다니면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믿음의 몸부림을 쳤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아리스다고입니다. 어쩌면 아리스다고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19:29 절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라고 소개합니다. 이 아리스다고가 바울 선교에 동참하여 모진 고생을 한 일이 있습니다.

20:04 절에는 바울이 구제 헌금을 모금하여 예루살렘으로 갈 때 동행하였고 행27:02 절에는 광풍 유라굴로를 만났을 때 그 배에 동행한 기록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난받는 현장과 바울이 외로움에 처해 있던 현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바울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던 곳에 아리스다고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리스다고가 항상 바울의 곁에 있어 줌으로 용기와 힘을 주었듯이 우리 교회에도 저의 곁에도 아리스다고와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위로를 주는 일은 겉으로 화려하게 보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주시면 됩니다.

 

넷째는 누가입니다. 누가의 직업이 의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울에게 이런 사람을 붙여주신 것 같습니다. 바울은 2가지 난치병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눈병과 간질병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병을 위해서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고후 12:08). 이렇게 병을 앓는 바울에게 누가라는 의사가 곁에 있으니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딤후 04:11 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순교를 앞두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최후의 글을 쓰면서 이렇게 전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여러 사람이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고 누가만이 바울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2. 선교의 일꾼도 믿음을 탈선할 수 있습니다.

 

딤후 0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분명히 오늘 말씀 24절에 데마가 빌레몬의 위로자로 소개됩니다. 데마의 이름이 바울 서신에 세 번 나오는데 바울은 데마를 거론할 때마다 각각 다르게 표현합니다.

첫째 등장에서 바울은 데마를 자기의 동역자로 소개합니다(24). 바울의 동역자로 나타나는 데마의 모습에서 그도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 때문에 그는 바울과 함께 투옥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둘째 기록에서 바울은 데마를 동역자라는 직함이 없는 자로 소개합니다(04:14. 또 데마). 데마의 이름에 붙은 수식어 동역자나 사랑하는 자 수고하는 자 등의 설명을 볼 수 없습니다. 그냥 데마라는 호칭만 있습니다.

아마 바울은 데마에 대한 어떤 기대감과 열정이 사라져 버렸다고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그저 안부를 전하는 명단에 붙는 이름 정도입니다.

 

셋째 기록에서 바울은 데마를 신앙의 변절자로 소개합니다(딤후 0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믿음의 세계를 떠났다는 뜻입니다. 데마가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자리를 옮겼다는 말은 믿기 전에 섬기던 우상의 신전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된 일에 대하여 장 칼뱅은 데마가 바울의 투옥과 현실을 보고 자기 신변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데마 변절 이유를,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확인해 줍니다. 데마의 변절과 떠남은 바울에게는 큰 실망이었을 것입니다.

가서는 안 되는 불행의 길을 데마가 가고 말았습니다. 데마를 통해서 주님의 일에 함께하는 동역자라고 해서 다 끝까지 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터놓고 지내는 사이도 그 사랑이 어느 순간에 미움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자기를 잘 돌아보고 다듬는 생활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 김삼일 가족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짧은 인생을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마무리 잘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살아온 시간을 오늘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점검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 앞에서 선교의 삶을 잘살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삶이 끝나고 그 삶에 대한 평가를 받을 때가 곧 옴을 알고 있습니까? 그때에는 삶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다시 살아서 재평가받지 못합니다. 각자 지나온 행적들을 정산하여 심판하는 일만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녹화 없는 생방송이라고 합니다. 생방송의 삶이라면 인생 관리, 믿음 관리를 더욱 조심스럽게 잘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칫 인생이 파선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옥중 생활을 통해 얼마 남지 않은 자기의 삶을 정리합니다. 특별히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변절 된 데마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인생길은 한 번 지나가면 되돌아오지 못하는 길임을 잘 아시지요? 그래서 인생은 왕복이 아니라 일생이라고 합니다. 또 예행연습도 없이 속히 지나갑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아니면 짧게 살았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살았느냐? 무엇을 하였느냐? 어떤 업적을 남겼느냐? 어떻게 그 삶을 믿음으로 마무리하였느냐가 기준입니다.

오늘 데마의 불행한 인생 마무리를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주어진 현실에서 신앙 마무리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를 다시 점검해 보는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3. 빌레몬 때문에 여러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너희(ὑμν 휘몬)를 보십시오. 이인칭 대명사 복수 휘메이스(ὑμες)의 속격(屬格)입니다. 따라서 너희의(your) 이런 뜻이 됩니다. 그러면 너희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입니까? 빌레몬과 그의 가족과 그가 섬기는 골로새교회 전체를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신실한 일꾼 빌레몬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복을 받는 자리에 들어올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 현실에서 나 한 사람으로 인해 가족이 복을 받는 자리에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반면 복을 받지 못하는 자리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본서의 마지막에서 빌레몬과 그의 가족과 교회에 대하여 신령한 인사를 전하며 맺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는 마무리입니다. 주님 은혜가 육신 생활보다 심령에 임하기를 기원하는 인사입니다.

심령(πνεύματος)이란 영혼(ψυχή)과 유사한 단어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 어떤 것보다 영혼이 잘 되는 일입니다.

 

요일01:0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믿음의 가족 여러분, 어떤 일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심령에 주님의 은혜를 잘 담으십시오. 담은 후에 쏟지 마십시오. 성령님께서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것보다 심령에 은혜 부으시는 일을 사모하십시오.

마침내 기쁨이 넘치는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 대단히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들 삶의 내면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알아가는 신령한 생활보다 세상 물질 가치관에 더 집중합니다. 예수님과 관계에서 오는 신령한 은혜보다 물질로 만족을 누리려 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초대보다(11:28) 데마의 길이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신앙 본질을 회복합시다. 세상이 주는 기쁨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며 사는 삶 말입니다. 바울은 이런 삶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삶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0320).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예와 재물 다 귀합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은 있다가도 이내 없어질 것보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신령한 은혜를 소원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시 정돈합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심령에 은혜를 누리고 담는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그분의 임재하심과 그분 안에서 참된 만족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방향이 더욱 든든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삶의 질이 더욱 건전하게 균형 잡힐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성전을 건축하는 목재로서 레바논 산() 백향목 나무를 사용하였습니다. 성전을 짓는데 왜 이 나무를 사용한 것 같습니까?

여간해서 썩지 않고 좀도 먹지 않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 단단함은 어느 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급 품질이고 은은한 향기 또한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무의 성질을 빌려 인간관계를 논할 때 백향목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의 가족도 이런 백향목 같은 신앙, 백향목 같은 신앙인이 됩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빌레몬 같은 인물 됩시다. 서로 등을 두드려 주는 관계로 삽시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 변함없이 충성하는 일꾼의 자리에 앉읍시다.

그런 일꾼은 바로 여기에 있는 공동체 가족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공동체의 멤버로 생각 한번 잘못 하여 크게 낭패를 당한 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동료 때문에 날아간 대기록, 볼트가 기가 막혀. 라는 제목이 인터넷 기사에 떴습니다. 이승건 기자(2017-01-27). 우사인 볼트 많이 들어본 이름이죠?

일명 번개로 불리는 우사인 볼트(31·자메이카)가 날벼락을 맞았습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육상 남자 400m 계주(繼走)에서 우승하였는데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계주 멤버인 네스타 카터(32)의 금지약물 양성반응으로 그만 금메달을 잃었습니다.

 

금메달 박탈로 베이징 올림픽 400m 계주 우승은 트리니다드토바고에 돌아갔고, 올림픽 사상 최초로 달성한 100-200~400m 계주 첫 3종목 3연패(트리플-트리플) 대기록도 날아갔습니다. 계주는 선수 중 한 명이라도 도핑이 확인되면 다른 선수도 함께 메달을 잃습니다.

이때 볼트는 카터, 아사파 파월, 마이클 프레이터와 팀을 이뤄 3710의 세계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카터는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도 볼트와 함께 400m 계주에서 우승했습니다.

이때 채취한 소변 샘플 재검사는 아직 실시하지 않았고, 2007년 오사카, 2011년 대구, 2013년 모스크바, 2015년 베이징 세계선수권대회 400m 계주에도 같이 출전하였습니다.

 

문제는 IOC 추가 조사에 카터의 금지약물 양성반응이 더 나오면 볼트의 런던 올림픽 금메달과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이 추가로 박탈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카터는 IOC에 베이징 올림픽 때 코치의 조언에 따라 보조제를 먹었다. 첫 테스트에서 안 나온 금지약물이 어떻게 검출됐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스타 카터가 금지 약물을 모르고 복용한 건지, 아니면 알고도 복용한 건지, 아니면 코치가 잘못 판단한 건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들 공동체에 큰 충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볼트에게 금메달 한 개가 날아가면서 볼트의 올림픽 개인 통산 금메달은 8개가 되었고, 올림픽 육상 최다 금메달리스트 자리에서도 내려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특별히 바울 서신과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 서신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하나가 무엇인지 보셨습니까? 서로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무려 50번이나 등장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되어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헌신하며 서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복음의 멤버입니다.

 

세상 사람은 감각의 문으로 들어오는 위로를 즐거워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가장 달콤한 쾌락을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가족은 믿음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신령한 것을 사모합시다. 세상 향락에서 발견하는 즐거움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즐거움을 사모합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서로 등을 두드려 위로와 힘을 실어 줄 것을 명하셨습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교회 일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함께 뜻을 모아서 해야 합니다. 동지 의식을 가지고 함께 공동체를 가꾸어 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일에 동지가 잘 되어 갑니까?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입니까? 서로 힘이 됩시다. 위로를 받고 위로를 주는 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