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7년 말씀

복음의 빚을 갚는 빌레몬(몬 01:17~2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7. 3. 4.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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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어느 한 소읍에 특별한 동상이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위인의 동상이 아닌 개()의 동상입니다. 이 개는 물에 빠졌다가 죽음 일보 직전에 한 신사로부터 구출되어 그 집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주인은 이 개를 끈기 있게 돌보면서 서로 정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라틴어로 충실한 사람을 뜻하는 피도(Fido)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언제부턴가 피도는 주인이 직장에 갈 때마다 버스정류장까지 전송하였고,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정류장에 먼저 가서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피도는 주인을 생명처럼 여기고 따랐습니다. 자기를 구해준 주인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주인이 타고 오던 버스가 폭탄을 맞아 그만 주인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개는 그날도 어김없이 정류장에 나와서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오지 않자, 그때부터 낮이고 밤이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피도는 사람들이 가져다준 음식을 먹으며 주인이 돌아오기를 밤낮으로 기다리다 정류장에서 13년 만에 죽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그 충성심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에 동상을 세웠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 준 주인의 은혜가 고마워 죽기까지 충성의 마음이 변치 않았던 피도의 그 정성이 여러분에게 어떤 울림을 줍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십니까?

빌레몬은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 바울에 대한 은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갚는 생활을 여러 일로 뒷받침합니다. 복음의 빚을 갚는 심정입니다.

우리도 복음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믿음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복음의 빚을 갚는 빌레몬이렇게 정했습니다.

 

 

1. 빌레몬은 복음의 빚 진 자입니다.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나 바울, 바울은 인칭대명사와 자기의 이름을 동시에 언급합니다. 이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자기 뜻을 엄중하고 무겁게 전달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직접 친필로 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보게, 빌레몬 자네가 나에게 빚을 졌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면 빌레몬이 바울과의 채무 관계에서 언제쯤, 얼마나 빚을 진 것 같습니까?

 

우리 모두 이 채무 관계의 현장에 없었습니다. 또 차용증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빌레몬에게 네가 내게 빚을 졌다고 말하고 빌레몬도 아니오. 하고 말하지 않는 이상 두 사람 간 채무 관계는 분명 존재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네가 내게 빚을 졌다고 말하는 이 빚이 세상에서 말하는 물질의 빚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물질의 빚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물질 문제를 이 서신에서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빌레몬이 바울에게 물질의 빚을 진 적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빚입니까? 복음의 빚입니다.

 

그러면 복음의 빚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빌레몬서 강론 첫 시간을 돌아봅시다. 그때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빌레몬은 에베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 골로새에 살면서 사업을 위해 큰 도시 에베소를 방문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때 빌레몬이 두란노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고(19:09) 믿음 생활을 하였다는 취지입니다.

 

빌레몬이 바울로 인해 믿게 되었으면 영적 차원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믿음의 아버지 격이 됩니다. 오늘날도 이런 식으로 적용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때문에 빌레몬이 구원의 자리에 들어왔다면 분명 바울은 빌레몬에게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도 됩니다.

빚을 진 오네시모와 빌레몬 이들 관계를 보겠습니다. 먼저 종으로서 주인의 금품을 도둑질한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진 빚이 있습니다. 물질입니다.

 

반면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은 영원한 빚입니다. 이 빚은 세상 가치관으로는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말해 보았자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복음의 빚입니다. 내가 복음의 빚을 진 자라고 깨달으면 그때부터 선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롬 0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바울이 갚을 빚이 많다는 의미보다는 복음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스데반 집사의 죽음에 일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잡아다 옥에 가두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는 복음의 빚을 갚는 생활로 전환하였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주님의 말씀을(10:08) 실천하면서 유명한 고백을 남깁니다.

 

고전 0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2. 빌레몬은 복음의 빚을 넉넉하게 갚아 나갑니다.

 

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나는 복음의 빚을 진 자라고, 선언하였습니다(01:14). 바울은 이 빚을 갚는 생활을 삶의 우선순위로 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빌레몬에게 네가 순종할 줄 믿는다고 말합니다.

종의 주제에 감히 주인의 금품을 훔쳐 도망을 간 오네시모, 바울은 이 죽어 마땅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낼 테니 용서해라. 용서해 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감정으로 보십시오. 용서가 뭡니까? 오히려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오네시모를 말합니다.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바울은 빌레몬이 자기에게 복음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해 달라고 청합니다.

용서는 당연하다고 보고 또 하나의 은근한 기대를 내비칩니다.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알겠다는 문구에 그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더 행할 줄 알겠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용서를 한 후의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짐작건대 바울의 마음에는 오네시모에 대한 세 가지 정도를 기대합니다.

 

첫째, 오네시모의 굴레인 종의 신분을 법적으로 해제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둘째, 골로새 교회는 오네시모를 동등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줄 것을 기대합니다. 셋째, 바울의 복음 사역을 위해 오네시모를 자기에게 보내 줄 것을 기대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순종할 것을 확신합니다. 무엇을 믿고, 이만큼이나 확신합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감동을 입은 것 같습니다. 에베소 전도 시절 두란노 서원에서 영적 교감을 나누었던 감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장점을 드리려는 가치관의 공유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 빌레몬이 바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일입니다.

 

그 시원함은 희생을 크게 치러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복잡한 것도 아닙니다.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만일 빌레몬이 바울의 간절한 부탁에도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의 마음은 오히려 더 불편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용서라는 숙제를 만날 때 빌레몬과 같은 심정으로 문제에 접근하면 됩니다. 성령님의 감동을 입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이 기대처럼 우리도 범사에 용서를 앞세웁시다. 기대 이상의 플러스알파가 됩시다. 고린도 교회와 바울 사이를 시원하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전 16: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만일 우리가 오네시모와 같은 이웃을 곁에 두고도 빌레몬과 같은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불화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용서가 없이 미워하는 심정으로 헐뜯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겠습니까?

바울과 빌레몬의 관계처럼 우리도 용서를 앞세우며 삽시다. 공동체의 평안을 위하여 삽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에 평안함을 주는 생활을 합시다. 고통을 주지 맙시다.

 

 

3. 사랑의 용서는 복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현재 바울은 미결수 신분입니다. 조금은 자유스럽지만 그래도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아직 석방 날짜가 잡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 석방될지라도 언제 골로새 교회에 갈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기가 머무를 숙소를 부탁합니다. 이는 상징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제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였다는 말씀을 전제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근거가 있어서입니까? 있다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였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기록 원리 때문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간곡한 부탁을 했음에도 용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빌레몬서가 성경에 들어올 수 있습니까?

빌레몬서가 성경에 들어온 자체가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빌레몬은 바울의 편지를 읽고 오네시모를 따뜻하게 용서해 주었습니다. 바울의 기대대로 오네시모를 종의 신분에서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교회에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를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보내었습니다. 선교비도 넉넉하게 보냈습니다. 오네시모도 바울의 뒷바라지를 잘하였습니다.

훗날 바울이 네로 황제의 핍박을 받아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바울의 뒤를 이어 오네시모도 네로 황제의 핍박 때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도 네로 황제의 핍박 때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세 사람 모두 주님을 위해 순교하였습니다. 다 용서 하나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물음에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18:21, 22).

 

미국의 한 기독 실업인이 죽어서 장례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사업을 하던 사람이니 많은 친구가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독 실업인은 죽기 얼마 전에 자기 장례식장에서 읽어달라고 장례식의 답사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유족의 부탁을 따라 친한 친구 한 명이 그 답사를 읽어 내려갔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금은 나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시간입니다. 나는 나의 마지막 가는 이 시간을 내 친한 친구들을 위한 부탁의 시간으로 쓰고자 합니다.

 

John, 자네도 지금 내 관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운데 있겠지. 친구여, 우리가 함께 골프를 칠 때마다 나는 자네가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얼마나 간절히 권면하였던가?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네.

내가 이 시간 마지막으로 자네에게 간곡히 부탁하네. 더 이상 고집 피우지 말고 마음 문 열어서 주님을 영접하게. 다 자네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George, 그대는 지금도 내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겠는가? 그분은 그대를 위하여 돌아가셨네. 지금도 그분은 그대에게 영생을 주시기 원하신다네.

Ed & Peter, 이제는 그만들 싸우고 화해하게나. 인생은 이처럼 유한하지 않은가? 짧은 인생길 걸어가면서 다투지 말고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사는 것이 좋지 않겠나?

 

여기까지 읽어 내려갔을 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서서히 요동했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거기에 나올지 싶어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 것 같습니까? 그 사람 참 훌륭한 사람이야. 정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 그 사람 곁에만 가면 엔도르핀이 솟아나고 마음이 평안해지네. 이런 좋은 평을 받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고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람, 서로 아껴야 할 사람, 서로 챙겨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한 화가가 알렉산드로스 왕의 초상화를 부탁받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대왕의 이마에는 매우 험한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는 왕의 상처를 그대로 화폭에 담고 싶지 않았습니다. 대왕의 자랑스러움에 손상을 입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처를 그리지 않는다면 그 초상화는 진실한 것이 되지 못함으로 화가 자기의 신망은 여지없이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화가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대왕이 이마에 손을 대고 쉬는 모습을 그리기로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웃의 허물을 보셨습니까? 그 허물을 가려줄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빌레몬의 뜻은 사랑을 간직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름처럼 살았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노예의 신분을 풀어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우리 모두에게 적용합시다. 너도 받은 은혜가 있지 않느냐? 너도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고 빚을 짐으로 인해 오늘의 네가 아니냐? 입니다.

우리가 모두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풍성한 사랑을 품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이웃을 사랑합시다.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이런 삶이 잘 유지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