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관점에서 볼 때 성도들을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➊한 부류는 믿음 생활을 잘하고 예뻐서 목사가 저절로 기도해 주는 사람입니다.
➋또 한 부류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겨우 뒤져서 기도해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 생활에 적극성이 없어서 아무래도 관심이 덜 갑니다.
➌마지막 부류는 날마다 속을 뒤집어 놓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에든지 시비를 잘 걸고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에 도무지 기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눈을 감으면 저절로 그 얼굴이 떠오르고 몸서리가 쳐지면서 기도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때나 목회자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 어떤 믿음의 스타일인 것 같습니까? 혹 애물단지는 아닙니까?
본서의 주인공 빌레몬은 어떤 부류인 것 같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너를 말한다고 합니다(04). 빌레몬을 떠 올릴 때마다 저절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빌레몬이 어떤 인물이기에 바울이 빌레몬을 생각할 때마다 기도하게 되었는지 07절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빌레몬처럼 좋은 일꾼 됩시다.」 로 정했습니다.
1. 빌레몬은 성도들에게 평안함을 주는 일꾼입니다. |
0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빌레몬(Φιλήμονι). 이름의 뜻은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는 빌레몬을 향하여 바울은 형제여, 하고 부릅니다. 이 호칭을 사용한 후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너 때문에 평안함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평안은 마음속까지 상쾌하게 하여 힘을 주고 용기를 준다는 뜻입니다. 평안함은 용기를 잃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평안함은 절망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평안함은 활력이 없고 에너지가 빠진 공동체에 새로운 힘을 줍니다.
골로새 교회에 참 평안을 정착시킨 빌레몬, 그로 인하여 성도들은 믿음의 안정과 생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신선한 충격을 주는 한 사람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를 더욱 든든하게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찬송가 412). 이 평안을 빌레몬이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평안을 선물하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심령에 모셨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골로새 교회의 일꾼 빌레몬 좋은 제자입니다. 좋은 일꾼입니다. 빌레몬처럼 평안을 전하는 성도가 김해삼일교회에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공동체에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분이 우리 교회 등록하기를 기도합니까? 굳이 그런 기도 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빌레몬과 같은 평안함을 전해주면 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면 됩니다.
김해는 겨울이면 더러 산에 불이 납니다. 그 산불도 불을 많이 질러서 날까요? 아닙니다. 그저 라이터 한번 잘못 눌러서 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도 꼭 상처 되는 말을 많이 쏟아서가 아닙니다. 알고 보면 말 한마디 잘못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줍니다.
우리는 말하기에 앞서 한 번 더 생각합시다. 상대에게 상처 되는 말은 아닌가를 살핍시다. 평함을 끼칠 수 있는 말이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그래야 좋은 말이 나옵니다.
마 05:0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 주변에는 삶의 힘을 잃어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바르게 사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삶에 지쳐서 기진맥진하여 믿음 생활이 귀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 알고 보면 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사랑을 줄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평안을 선물하기 위해 다가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주일 말씀 05절을 참조하십시오. 사랑과 믿음으로 무장하여 다가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빌레몬은 주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빌레몬이 사랑한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명예도 아닙니다. 믿음 생활을 하다 지쳐 쓰러져 가는 외로운 성도들이었습니다.
2. 빌레몬은 목회자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일꾼입니다. |
07….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전도해서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빌레몬이 에베소에 들렸다가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의 전도를 받고 은혜를 입어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바울은 빌레몬의 멘토라 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은 자기의 지도자인 바울, 믿음의 스승에게 좋은 일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믿음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지도자에게 기쁨을 선물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 생활을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평안함을 전해주고, 목회자에게는 기쁨을 주는 일꾼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바울이 누구 때문에 기뻐한다고 말합니까? 빌레몬입니다.
지금 바울이 있는 곳은 로마의 감옥입니다. 내가 감옥에서 나가면 정말 기쁘겠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그저 빌레몬이 믿음 생활 잘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때로는 나는 실패하였어도 내가 알고 있는 이웃이 성공하면 기쁜 일이지요?, 그로 인해 내 마음이 기쁘면 좋은 일입니다. 분명히 축하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 정도로 넓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더러 목회자를 속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오해할 때도 있습니다.
섭섭할 때도 있습니다. 너무 생각이 달라서 다툴 때도 있습니다. 그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서로 마음과 뜻이 맞아서 사랑한다고 합니다. 동업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서로 다투고 서로 갈라섭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속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면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길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밖에 없습니다. 이 기도만이 답입니다.
하나님께 상대방을 놓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두 사람 사이에 간섭하여 풀어주십니다. 여기에 믿음의 교제와 비밀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막히고,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그때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정말 힘이 들고 앞이 잘 안 보이기도 합니다.
혹은 내 사업의 파트너가 믿음의 짝이 될 수 없는 불신자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고민거리가 되겠지요? 이럴 때 바울이 전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고후 0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혹 내가 교제하는 사람이, 내 사업의 파트너가 주님을 모르는 분입니까?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십시오.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여 풀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빌레몬을 꼭 떠 올린다고 말합니다(04). 바울은 평소에 빌레몬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는 서로의 관계를 지탱해 주는 끈끈한 힘입니다.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면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됩니다. 지금까지는 좀 보기 싫어도 중보기도를 하면 좋게 보입니다.
중보기도를 하면 오해의 문제도 넉넉한 이해로 풀립니다. 중보기도를 하면 목회자와 갈등도 시원하게 풀립니다. 중보기도를 하면 빌레몬처럼 목회자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일꾼이 됩니다.
3. 나도 빌레몬처럼 평안함과 기쁨을 주는 일꾼입니까? |
0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평안함을 선물하였습니다. 믿음의 멘토인 지도자 바울에게 기쁨과 위로를 넉넉하게 선물하였습니다.
빌레몬은 자기가 이런 일을 하였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과 바울이 빌레몬의 은혜로운 모습을 기도와 문서로서 증명해 줍니다.
빌레몬의 성숙한 믿음, 이 믿음이 골로새 교회의 어려움과 고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성숙한 교회로 다듬어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김삼일 성도의 교제와 모임도 이러해야 합니다.
서로서로 배려하며 사랑으로 안아주는 이 코이노니아가 우리 공동체에 자리를 잡게 합시다. 그러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안과 기쁨의 복, 천국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좀 더 강력한 믿음을 가지기를 원합니까?
자기의 장점을 찾아 주님께 드립시다. 이런 헌신 속에서 성도 간에 위로와 격려를 나눕시다. 그런데 이런 좋은 일 속에서 가끔은 상처를 받는 경우도 일어납니다.
그럴 때는 내가 먼저 나의 모난 성격과 부족한 인격 때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이해를 잘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내가 먼저 좀 더 넓은 부모 같은 마음, 형님 같은 마음, 언니 같은 마음을 가지고 나가십시오.
어떤 사람이 자전거를 열심히 닦고 있습니다. 그 곁에서 계속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 소년이 구경합니다. 금세 윤이 번쩍번쩍 나는 자전거가 몹시 부러운 듯 소년은 묻습니다. 아저씨, 이 자전거 꽤 비싸게 주고 사셨지요? 아니야, 내가 산 게 아니란다. 형님이 주셨어.
그래요? 소년의 부러움 섞인 대꾸는 그 사람의 미소를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자전거 닦는 사람은 소년의 마음을 읽은 듯 너도 그런 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겠지 나름 짐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형을 가진 자기는 정말 행복하다고 여기며 그 소년을 다시 쳐다봅니다. 그 소년의 다음 말이 자기의 짐작과는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나도 그런 형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집에는 심장이 약한 동생이 있습니다. 조금만 뛰어도 숨을 헐떡이거든요. 나도 동생에게 이런 멋진 자전거를 주고 싶어요.
날마다 사랑의 감동하고, 사랑으로 무장을 한 성도는 좋은 것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혹 내가 가진 것이 있습니까?
물질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 내가 품고 있는 물질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것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이웃의 필요를 깨닫는 나눔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마음을 드리도록 합시다.
딤전 06: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나는 작은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까? 큰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까? 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 제목의 차이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지금까지 나의 지식과 나의 욕망에 하나님을 당겨왔습니까? 하나님을 나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면 작은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오늘 이후부터 전능하신 하나님, 채우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면 살아간다면 큰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조선왕조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진(1493∼1564) 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시 한 구절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여러 가지 술안주가 많지만, 남을 험담하는 것처럼 맛있고 좋은 안주가 없다. 남의 말을 하면 재미는 있다는 뜻입니다. 남의 말 안 하고 사는 사람 있습니까?
남의 허물 들추면 이 수다가 참기름보다 더 고소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마치고 집에 가서 생각해 보십시오. 계속 자랑스럽습니까?
오히려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여 상대방을 인격 살인하였는가? 라는 자책감만 들 것입니다. 솔로몬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잠 25:114)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 09:50)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에게 감사는 좋은 말을 할 때 나옵니다. 성도에게 평안은 좋은 말을 할 때 임합니다. 성도에게 행복은 좋은 말을 할 때 누리게 됩니다.
잠 17:0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오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심령에 빌레몬이 가졌던 그런 좋은 믿음의 성품이 가득하게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의 성품으로 성도를 기쁘게 하고 목회자를 기쁘게 하십시오.
우리 모두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도 받았습니다. 그 평안과 위로와 기쁨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꼭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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