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7년 말씀

빌레몬의 드림과 친교의 생활(몬 01:01~0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7. 2. 1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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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는 1장으로 구성된 바울의 서신입니다. 일컬어 옥중서신(獄中書信)이라 합니다. 이 짧은 글이 성경 66권 중 한 권으로 당당히 들게 되었습니다. 14절 때문입니다.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본서의 배경은 빌레몬의 가정에 있는 오네시모의 이야기입니다. 이 종이 주인의 금품을 훔쳐서 당시 세계의 수도 격인 로마로 도망을 갔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숨어 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종이 숨어 산들 얼마나 안전하게 살겠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분이 노출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잡혀간 곳이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입니다. 당연히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가 형기를 마치고 석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위하여 편지를 한 장 씁니다. 오네시모를 선교 동역자로 삼기로 한 서신입니다.

 

그대 집안의 종 오네시모를 나의 선교 동역자로 세우려 하오. 그대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소. 억지가 아닌 기쁨으로 동의를 해 줄 수 있느냐는 글입니다.

오네시모가 저지른 행위는 종인 이상 죽어도 마땅하나 지금 예수님을 믿고 변화가 되었으니 용서하고 형제로 대해 주라는 내용입니다(16).

바울의 쉽지 않게 부탁하는 글을 중심으로 몇 시간에 나누어 빌레몬서를 강론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빌레몬의 드림과 친교의 생활로 정했습니다.

 

 

1. 빌레몬 가족 모두가 일꾼이 되었습니다.

 

01….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0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바울은 본서의 수신자인 빌레몬에게 두 가지 호칭을 사용합니다. 먼저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호칭입니다. 이는 빌레몬이 골로새 교회의 공동체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음을(05, 07) 상기시키는 호칭입니다.

다음으로 동역자입니다. 동역자는 바울이 사용하는 독특한 용어입니다. 선교지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함께 전하는 동료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은혜로운 이 두 호칭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 나를 아는 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여, 동역자여 이런 호칭으로 불러준다면 얼마나 복 된 일이겠습니까?

바울이 빌레몬의 아내를 어떻게 부릅니까? 자매 압비아. 자매는 바울서신에서 잘 믿는 여 성도를 표현하는 용어입니다(뵈뵈, 네레오의 아내. 16:01, 15). 동역자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에 이어 그 아들에게 사용하는 호칭이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 여기 병사라는 호칭을 보십시오. 창칼을 들고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는 병사가 아닌 줄은 아시지요.

바울이 아킵보를 왜 병사로 비유합니까? 복음의 방해꾼을 막아서서 싸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병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킵보를 우리와 함께 병사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와 함께 병사 되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볼까요?

아킵보가 바울의 선교에 동참하여 함께 고난과 박해를 당했다는 뜻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바울은 아킵보에 대하여 일반 평신도가 아니라 골로새 교회에서 특별하게 설교자로 세움을 받은 일꾼이라고 안내합니다.

 

골 04: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아킵보가 주님 안에서 받은 직분은 주님께서 세우시고, 주님께서 감독하시며,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일로서 거룩한 직분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킵보가 주님 안에서 받은 직분(διακονίαν)이 무엇인지 능히 짐작됩니다. 설교자로서 골로새 교회를 목양하는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이렇게 빌레몬의 가족에게 붙어있는 다양한 호칭을 봅시다. 이들이 교회에서 얼마나 헌신하였으면 바울이 이런 수식어를 붙여 주겠습니까?

 

교회에서 누구나가 놀 꾼이 아닌 일하는 가족, 모두가 부름을 받고 은혜로 쓰임을 받는 그런 삶이 복 중의 복입니다. 빌레몬의 가족이 그러합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한 가족 모두가 같은 교회에서 믿음으로 섬기면 이거 대단히 복된 일입니다. 혼자서 섬기는 것보다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성경에는 가족이 함께 한 방향으로 사역하여 귀감이 된 흔적이 있습니다. 바로 전도자 빌립과 그의 딸들이 가이사랴에 정착하여 복음 사역을 한 일입니다.

 

행 21:0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0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2. 빌레몬은 자기의 집을 교회로 드렸습니다.

 

0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네 집에 있는 교회.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이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자기 집을 교회로 내어놓은 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을 교회로 제공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 아닙니다. 교회의 역사가 짧고 아직 전통도 세워지지 않았으니 주변 우상 숭배자들로부터 비난과 박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 사업에서 물질의 피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분명히 손해를 보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적인 생활은 어떨 것 같습니까? 그대로 노출되어야 합니다. 일상생활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락교회에서 일하던 중 건축할 때 장시간 사택에서 예배를 드리며 지낸 경험이 있습니다. 사사로운 생활 감당하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더라고요.

빌레몬이 여러 면에서 매우 불편한 일을 당할 줄 알면서도 집을 교회로 내어놓은 일은 대단한 일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순간의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의 생각만으로 봅시다. 왜 내가 집을 교회로 내어놓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레몬은 나 아니면 누가 집을 내어놓을 수 있겠는가? 라는 믿음의 생각으로 판단했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육신의 생각을 제어하였습니다.

 

롬 08:0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0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골로새 교회뿐만 아닙니다. 초대교회 시절 대부분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집을 제공함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빌립보에는 루디아의 집이 있었습니다(16:15). 라오디게아에는 눔바의 집이 있었습니다(04:15). 에베소에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의 집이 있었습니다(고전 16:19). 예루살렘에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있었습니다(12:12).

 

초대교회 시절의 교회는 유대교의 회당처럼 오늘날의 예배당처럼 건물 중심이 아닙니다. 은혜 모임 자체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복음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은혜의 생활을 하면서 빌레몬처럼 받은 은혜가 없습니까? 이만한 복을 받은 것이 은혜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해 좋은 생각, 넓은 생각, 넉넉한 생각을 가집시다. 사도행전 04장에 바나바가 헌금을 드린 일과, 0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헌금을 드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04장에서 바나바가 하나님 앞에 드린 일을 보겠습니다. 한창 예루살렘에 예수 바람 구제의 바람이 불고 있을 때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고 권면과 위로를 잘함으로 사도들로부터 바나바라는 별명을 받았습니다.

이름을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 사람이 은혜를 받고는 부동산을 정리하여 구제 헌금으로 드렸습니다(04:36, 37).

 

이 일로 인해 더욱 인정받는 귀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이어 행 05장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구제 헌금(05:01~11)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 부부도 바나바처럼 받아 땅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전부를 드리기로 했지만, 아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일부는 감추어 두고 일부를 전부인 것처럼 드렸습니다. 결과는 성령님을 속인 일이 되어 부부가 한날에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드림에는 믿음으로 하고 기쁨으로 하고 인색함이 없어야 합니다.

 

 

3. 빌레몬은 교회에서 친교를 잘 이루었습니다.

 

0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네 믿음의 교제가. 믿음의 교제는 두 가지입니다.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교제(요일 01:03~07)와 믿음에서 나오는 자비로운 성도 간의 교제입니다(01:05). 이 두 가지의 교제 가운데 빌레몬의 교제는 성도 간에 나누는 친교의 교제입니다.

바울은 성도의 관계가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가족(고전 08:06)임과 동시에, 에베소서를 통하여서 조금도 차별해서는 안 되는 가족임을 선언합니다.

 

엡 0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러면 우리가 교회에서 성도들을 만나고, 함께 예배를 드리지요? 식사하고, 회의하면서 한 가족임을 느끼며 친교를 잘 나누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주일 오전 예배를 드릴 때마다 어떤 고백을 합니까? 신앙고백입니다. 그 가운데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이렇게 고백하는데 과연 옆에 있는 분과 서로 소통이 되고 행복한 친교가 됩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이런 고백을 한다면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식적인 입술의 고백을 보시고 거짓말하지 마, 라고 하실 것입니다.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와 진정한 친교를 나누는 곳에는 분명히 가족의 연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표현이 오히려 잘못되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야말로 행복의 터전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혈육의 가족이 좋다는 게 무엇입니까? 단면으로 보면 살벌하고 죽이고 말 것 같은 상황을 맞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만 지나면 이내 봉합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 괜찮다고 남의 일에 참견하여 함부로 안 좋은 말 하면 나중 큰일 만날 수 있습니다.

 

빌레몬의 교회관은 오직 사랑과 섬김입니다. 빌레몬이 앞장을 서서 사랑의 물꼬를 열어 줌으로 골로새 교회는 행복한 사랑의 동산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 다 용납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이해와 용서를 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어도 주님을 모신 믿음의 공동체는 다 용서가 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의 관계가 이렇게 유지되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친교가 살아 있는 교회로 발돋움을 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감싸 주는 곳에는 치유의 역사가 날마다 일어납니다.

성도의 친교는 내가 다듬고 만들어야 합니다. 남이 잘 이끌어 주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내가 앞장서서 적극 이끌어 가야 합니다.

친교의 내용이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만나면 그저 살면서 힘들었던 이야기, 지난 한 주간 동안에 겪었던 슬픔과 실패의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주면 됩니다.

이런 나눔의 교제 가운데 놀라운 치유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빌레몬의 골로새 교회, 초대교회들이 다 그런 친교를 나눔으로 새 힘을 얻었습니다.

 

행 0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이렇게 친교에 힘을 쏟은 예루살렘교회에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친교 속에 굉장한 에너지가 분출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힘이 바로 이런 교제의 힘이었고, 이 교제를 통하여 세상으로 예수 바람을 날려 보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엄길청 박사가(1955, 2, 5 경기대학교 교수) 쓴 봉사의 목표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 미국 실리콘밸리 재벌에 속하는 60대의 한국인 벤처기업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한 기자가 벤처 기업인에게 물었습니다. 이제는 쉴 만도 한데 왜 젊은이들 틈에서 이렇게 힘든 일을 하십니까?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쓰기에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남에게 나누어 주기에는 부족하답니다. 그러니 일을 할 수밖에 없지요.

실제로 그는 일 년에 약 600만 달러를 사회에 환원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김해삼일 가족 여러분, 내 삶의 인생길이 얼마나 남은 것 같습니까? 일단 나의 삶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빌레몬처럼 교회에 매달리는 생활을 합시다.

빌레몬처럼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드리는 삶을 살아봅시다. 빌레몬처럼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더 잘 섬기기 위한 친교의 일에 에너지를 뿜어 봅시다. 이웃을 생각하며 일하고,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보면서 각자의 장점을 드리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