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3차 선교여행 중 1차 선교여행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선교 팀 멤버 마가(요한)가 밤빌리아 버가에서 이탈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행 13:13). 낯선 곳이니 힘든 일이야 당연히 생기지 않겠습니까?
단단한 결심을 하고 수행원으로 따라나섰을 것이니 어떤 상황을 만나도 도중하차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바울 선교 팀은 큰 지장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일정을 잘 마치고 자기들을 파송하였던 안디옥교회로 돌아 왔습니다.
이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지난 번 다녀 온 선교의 현장들을 돌아보자고 제안합니다(36). 이에 바나바가 동의를 하면서 이번에도 마가를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아마 바나바가 좌절감에 빠져있는 마가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려는 것 같습니다. 바나바가 마가의 삼촌이어서 다시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인데 비해, 바울은 이미 신임을 잃은 이상 마가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막아섭니다.
바나바는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 회복을 시키자는 것이고, 바울은 전도가 제대로 되려면 준비된 사람이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헤어지는 길 외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결국은 서로 심히 다툰 후에 피차 갈라서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떠나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고향 구브로 쪽으로 떠났습니다. 서로 힘을 합치면 좋지만 이미 마가 때문에 문제는 발생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일을 거울삼아 우리의 공동체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방하는 본보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1. 마가 때문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마가라고 하는 요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여행에 수행원으로 동참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도중에 일행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행 13:13). 바울은 바나바가 이런 사람을 다시 수행원으로 쓰자고 하자 안 된다고 막아섭니다.
버가에서 도중하차 하여 돌아간 일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마가를 막아서는 일을 놓고 과연 잘 한 일이냐? 너무 엄격한 것이 아니냐? 를 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관점에서 마가가 그때 왜 돌아갔느냐? 돌아갔다면 왜 다시 되돌아왔느냐? 되돌아 올 것이라면 왜 애초에 떠나갔느냐? 입니다.
마가의 입장에서는 삼촌 바나바를 통해 그때 돌아간 일을 놓고 여러 가지로 변명을 했을 것입니다. 젊어서 그랬다고, 힘들어서 그랬다고, 판단력이 흐려서 그랬다고,
그러나 바울의 선교의 관점을 마가의 해명으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마가가 돌아오려고 삼촌을 통해 그렇게 애를 썼지만 바울은 마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실수를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실수를 해서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바울은 선교의 안목에서 마가의 도중하차 사건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함에 있어서 허물과 실수가 조금도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런 뜻은 전혀 아닙니다. 바울도 한 때는 교회와 성도를 크게 박해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여러 지방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기독교의 대적자이었습니다.
행 09:0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0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유대교에 심취하여 본의 아니게 교회를 고통스럽게 하였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복음의 대적자에서 복음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복음의 대적자의 삶을 살던 모습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해명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몰라서 한 일이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잘 하는 일인 줄 알았다고.
딤전 0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복음을 알지 못해서 그러했던 자기의 삶을 해명하였습니다. 모르고 죄를 짓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마가에 허물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 만한 사람이 신앙의 의리를 저 버리고 떠난 일인 만큼 같은 일에 다시 등장 시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고생 한 번 안하고 자란 마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선교이었기에 출발할 때의 그 굳은 각오가 사라졌던 것입니다.
마가는 주님으로부터 받을 영광만 바라 본 것 같습니다. 영적 시야가 좁은 사람이었기에 제대로 쓰여야 할 자리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처음이나 나중이나 계속 잘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 보다 잘 하기보다는 이전보다 잘하기를 바랍니다. 무늬만 크리스천의 삶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2. 나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초대교회 시절에 바울과 바나바, 이름만 대어도 선교의 인물로 인정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선교의 대열에서 이탈한 마가 때문에 이들이 갈라서는 일을 조금 전 살펴보았습니다. 특정인 한 사람 때문에 문제가 생겨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마가가 선교 팀을 이탈하여 문제를 일으켰던 것처럼, 혹 나도 교회가 제시하는 방향에서 이탈하여 교회적으로 혼란을 만들어 낸 적은 없습니까? 담임목회자의 목회방향이나 소속한 공동체의 방향성에 거부하거나 따라가지 못함으로 인해 문제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원리는 함께 수고하는 곳임을 기억하십시오.
때로는 공동체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날 때가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갈등이 표출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큰 소리나 갈등이 다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큰 소리나 갈등은 관심의 표현이고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다 같으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다 같으면 소리도 갈등도 나지 않습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인간관계는 서로가 다른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공동체에 반하는 시끄러운 소리, 갈등의 진원지가 되지 마십시오. 다수가 걱정하는 자리에 들면 그때는 나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다툼을 일으키는 일에 혹 내가 불씨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허물은 무엇입니까? 사명 의식이 부족하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까? 혹 나 때문에 공동체가 시끄럽고 요란하지는 않습니까? 남을 배려하는 넓은 마음을 가집시다. 바울은 공동체를 가꾸는 원리를 우리에게 소개를 합니다.
빌 02:0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0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공동체의 기본 원리가 소속감입니다. 그 기본 소속감 이전에 나는 내가 속한 곳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람의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봉사를 하든, 헌금을 하든, 헌신을 하든 이런 수고의 행적이 내가 예수님께 속해 있으면 믿음의 향기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속해 있지 않으면 그것은 형식이 되고 맙니다. 봉사와 헌금과 헌신 이런 일들은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지 누가 강요를 하거나 흉내를 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문제를 일으키는 근원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공동체에서 양보 할 것은 양보해야 합니다. 진리 문제가 아닌 자존심에 관한 것이면 물러서야 합니다. 한 마음을 품지 못하고 양보를 하지 못하는 마음, 트러블메이커를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을 사람들은 안 보는 것 같지만 지켜봅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을 하는 동안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나를 반대하는 사람은 항상 있는 법입니다. 한 번 실수하면 즉각 물고 들어지는 편집성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합시다. 혹 나 때문에 문제가 일어났다면 요나의 심정으로 수습해야 합니다.
욘 01: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3 . 문제는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
딤후 04:11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는 바울로부터 거절을 당한 후 약 15년 동안 역사의 표면에서 가려져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에 대한 흔적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마가의 삶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그의 삶에 대하여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몬 01:24절에서 나의 동역자 마가라고 소개하고, 골 04:10절에서는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특별히 영접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자신의 선교 대열에 마가를 동참시켰음을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마가는 전날의 그 허물을 어떻게든 회복하여 바울로부터 재신임을 받고 좋은 관계를 설정하였습니다. 서로 간에 문제를 푼 것입니다. 바울이 마가에 대해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11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훗날 마가는 베드로의 조사로 일하면서 믿음의 아들로 불렸습니다(벧전 05:13).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조사로도 잠시 일했는데(딤후 04:11), 바울이 한 때는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던 마가를 놓고도 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이제 고난 앞에서 변덕쟁이가 아니라 신뢰할 만한 일꾼이 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지하 감방에서 순교를 앞두고 있을 때 마가를 이렇게 갑자기 등장시키는 것은 이탈자로서의 허물을 충분히 회복할 만한 믿음의 흔적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바나바의 수행원 마가, 바울의 수행원 마가, 베드로의 수행원 마가가 수행원으로서의 삶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생생하게 전하는 큰 일꾼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따서 기록한 성경 마가복음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4복음서 중 제일 먼저 쓰인 복음서가 마가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험난한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음을 소개하는 성경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누구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꼭 들어야 할 평가 하나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준비하여야 할 평가입니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믿음생활을 함에 있어서 시작도 좋아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마지막이 좋아야 합니다. 점점 더 좋아지는 믿음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서 하늘나라의 소망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생활 할 때 마침내 유익한 존재로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가에 대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이 죽은 후에는 베드로의 통역자가 되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죽은 후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홀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입니까?
바나바가 마가의 삶을 믿음으로 지도하고 이끌어 주었기에 나중에는 큰 사명자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바울은 훗날 자신이 바나바보다 더 옹졸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가를 용납하지 못했음이 자기의 좁은 마음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인생의 말년쯤에 깨닫고는 이렇게 자기 고백을 하였습니다.
딤전 0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오늘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을 살피면서 혹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여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닌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생활에서 나로 인해 문제가 일어난 적은 없었는지, 지금도 나 때문에 문제가 생겨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남이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게으르다고 하다가 내가 하지 않을 때에는 바빠서 그렇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지워버리십시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교회 앞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잘 쓰임 받는 일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은혜의 강단 > 2016년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해삼일교회도 믿음의 소문을 냅니다(살전 01:01~05). (0) | 2016.10.01 |
---|---|
태양아 머무르라. 달아 머무르라.(수 10:12~14) (0) | 2016.09.24 |
대 속죄일에 내어보낸 아사셀 염소(레 16:06~10) (0) | 2016.09.10 |
말씀의 굶주림은 영의 죽음입니다(암 08:11~14). (0) | 2016.09.03 |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하는 에셀나무(창 21:32~34) (0) | 2016.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