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6년 말씀

말씀의 굶주림은 영의 죽음입니다(암 08:11~1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6. 9. 3.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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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 사람 대부분이 어릴 때 사탕과 껌을 좋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껌을 자주 씹은 분들은 거의 충치가 생겨 치과를 들락거렸겠지요? 요즘은 주로 어떤 껌들이 나옵니까충치를 예방한다는 자일리톨 껌입니다.

자일리톨 껌과 충치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대부분 충치가 발생하는 원인은 충치 균이 당분을 먹고 소화를 시켜 배설물로 산()을 만들어 내어 그 산이 치아의 법랑(琺瑯) 질을 파괴시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그런데 이 자일리톨 껌은 매우 단 성분을 함유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당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껌을 씹으면 충치 균들이 당분인 줄 알고 열심히 먹지만 실제로 당분이 아니므로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배출합니다. 충치 균이 자기가 배출한 배설물이 달작 지근하니 또 그걸 먹습니다. 먹고 배설하고, 먹고 배설하고, 이렇게 수백 번을 반복하는 사이에 충치 균들이 영양부족으로 굶어죽습니다.

 

가짜 당분에 굶어 죽는 결과입니다. 요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가짜 예배에 심령이 굶어 죽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하고, 기도와 찬양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도 기쁨이 없다면 결국은 심령이 메말라 죽어가는 것 아닙니까나도 죽고, 너도 죽고, 은혜에 굶주려 죽어가는 상황, 무기력한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 말씀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모스 선지자가 물질 면에서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북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의 현장입니다그런 세상 것들이 넉넉하여 흥청망청한다고 복된 것이 아님을 아모스는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말씀에 굶주림을 당한다면 이 보다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불행을 만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은혜의 자리에 둥지를 틀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말씀의 굶주림은 영의 죽음입니다. 로 정했습니다 

 

 

  1. 이스라엘에게 왜 말씀의 굶주림이 옵니까?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남방 출신 아모스가 북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아모스는 남 유다 지역 드고아에서 양을 치던 평범한 사람으로서 전문적인 예언자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고, 지식인도 아닌 목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언을 한다면 이는 예사 일이 아닙니다아모스는 여로보암 2(13, B. C 786-753)가 다스리는 북 왕국에서 사마리아와 벧엘을 오가면서 심판과 멸망이 올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앗수르가 아랍과 전쟁에 휘말리면서 나라의 기반이 흔들리는 위기를 만납니다.

 

그 틈을 타서 여로보암 2세 왕은 주변국과 관계를 재정립하여 솔로몬 왕 때의 영화를 꿈꾸고 있었고, 백성들은 풍요와 방탕과 사치의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든 좋은 시절을 만났다고 호화로운 생활에 빠지면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관료들은 부정부패를 일삼고, 백성들은 무절제한 생활에 젖게 됩니다.

이런 총체적인 죄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음에도 등한히 여기자 다시 아모스를 선지자로 세워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혼돈의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아모스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기근을 땅에 보내시겠다는 경고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근(飢饉)이 무엇입니까? 흉년으로 인해 먹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먹을 것이 풍부했는데 갑자기 굶주림이 온다는 말입니까? 11절 말씀을 잘 보십시오.

여기 기근 즉 굶주림은 물질의 굶주림이 아닙니다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고 밝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세상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게을리 하다 말씀의 굶주림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굶주림이라고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농사에 꼭 필요한 비를 내려주는 신이 바알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비가 안 온다면 죽음과도 같은 일 아닙니까구약시대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가끔 이스라엘에 비를 안 주신 때가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고, 우상을 섬기지 않도록 위해서입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왜 비를 안 주시는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미워해서 비를 안 주신다고 생각하였고, 또 하나님은 바알 신보다 능력이 없는 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굶주림,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배고픔을 당한다면 이것은 신령한 배고픔입니다.

심각한 배고픔, 바로 불행한 배고픔입니다. 이런 불행이 올 수밖에 없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의 부조리를 보겠습니다.

 

08:0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상인들이 곡식 거래를 하다가 안식일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일단 모든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안식일 경배를 믿음으로 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매매를 하면 되는데도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형식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기다 되를 작게 하고 추는 크게 만들어 속이고, 또 가짜 저울로 속이고, 채무관계로 종을 삼는 일 등은 고대 사회에도 있었습니다. 자기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 옵니다.

 

 

  2. 말씀의 굶주림은 돌아다닌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이미 11절에서 아모스는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굶주림을 땅에 보내리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머지않아 무서운 재앙의 날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 날은 어떤 날입니까?

굶어 죽는 날이 아닙니다. 비가 오지 않아 목말라 죽는 날도 아닙니다세상 물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재앙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데서 오는 신령한 목마름입니다. 아모스의 경고를 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갈증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지자가 있는 이상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말씀의 굶주림을 조금도 재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세계, 믿음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징계는 자기 백성에게서 말씀을 끊는 일이고, 말씀을 거두어 가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은 굶어 죽는 것이나 목말라 죽는 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고통입니다아모스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기에 육신이 목숨이 목말라 끊어지는 굶주림에다 비유합니까? 하나님의 침묵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여기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12절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같이 읽겠습니다이스라엘의 상황을 보면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리저리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이 다 정상으로 돌아가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꼭 들어야 합니까그래서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은 하나님을 떠난 상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려도 잘 살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는 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없음에 대하여 영의 공허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틀거리며 말씀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의 상태를 우리들이 알기 쉽도록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말씀의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해 다닐지라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역설로 들리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당장 인터넷 접속을 하고 설교 사이트에 들어가면 내로라하는 분들의 설교가 올려 져 있고 클릭만 하면 막 쏟아집니다그런데도 사람들은 홍수 속의 가뭄처럼 말씀의 기갈을 느끼며 이리저리 말씀을 찾는다고 헤매고 다닙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국내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외국에까지 쫓아다니면서 세미나, 연수회 등에 참석을 합니다. 제가 이런 일들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생각은 어쩌면 이런 모습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요, 12절 말씀처럼 말씀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지금은 사무엘 시대처럼 말씀이 희귀해진 시대라고 진단 할 수 있습니다(삼상 03:01). 말씀의 희귀한 현상은 물질주의 때문에 희귀해진 측면도 있고,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희귀하게 만드는 원인도 됩니다.

성경공부를 함에도, 성경을 수없이 읽어도 그 말씀이 실제의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을 것이고, 교만과 편견의 독선으로 쌓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교회에 나오지 않고 집에서나 들, 아무 곳에서라도 스마트폰으로 T. V를 켜면 설교들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말씀의 굶주림 시대라 하는 것은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심령에 새기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04:0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3. 말씀의 기갈이 오지 않도록 우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14 사마리아의 죄 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정치, 종교, 상업의 중심지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로 거리상 남쪽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드리러 갈 수 없자 사마리아 지역 내의 몇 곳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가 아무리 남 유다 왕국의 예루살렘 성전 제사를 대체한다 해도 성전 제사의 정통성이 없다보니 이방인의 우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14절을 보면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섬기는 제사 장소가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하여 단에서 드리는 제사, 브엘세바에서 드리는 제사가 각각 다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여호와의 종교가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처럼 변질되어 있습니다아모스는 이렇게 하나님과 이방의 신들이 혼합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변질 된 제사, 변질 된 믿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제사의 자리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그때는 엎드러져서 완전 패망의 자리에 이를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그릇된 신관으로 하나님을 우상의 수준으로 전락시키면 받게 될 징계를 말하는 것입니다(01:05,06). 하나님을 향한 제사가 변질되고, 우상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결국 신령한 영의 양식이 결핍되어 말씀의 굶주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의 제사나, 지금의 예배나 믿음을 세속주의와 타협하면 결국은 혼합 된 믿음, 우상의 종교를 닮아갑니다. 당연히 말씀의 굶주림을 당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대로 살려는 각오를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0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의 현실은 어쩌면 아모스 때보다 더 말씀의 굶주림이 심한 때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말씀을 듣지 못함으로 굶주렸지만 지금은 말씀을 듣지 않음의 굶주림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말씀의 굶주림을 만나면 어떤 증세들이 나타납니까예배의 자리에는 왔지만 정작 은혜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설교자가 힘을 다해 전해도 사람의 소리로 들립니다. 말씀에 대한 답답함이 옵니다. 영적인 만족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성경을 읽지 않아도 부담이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웠던 그런 감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24:32). 말씀의 굶주림을 만난 사람은, 은혜가 충만한 사람을 오히려 광신자라고 비판합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싫어집니다. 교회를 더 멀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는 영적 불감증에 빠집니다. 마지막엔 후탁 성도가 됩니다현재의 나를 돌아보십시오.

고난 속에 있습니까? 말씀이 고갈되어 영적 위기를 만난 것 같습니까? 그럼에도 말씀의 굶주림에 머물기 원합니까? 말씀의 등불을 켜십시오. 요즘은 길 찾는 것이 무척 쉽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내비게이션을 작동시키면 됩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길도 잘 안 보이면 모든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의 안내를 받으면 됩니다. 한 번 믿음으로 일어서고 싶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을 꼭 새겨들으십시오.

 

08:0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내 생애 가운데 행복했던 날은 엿새도 되지 않는다. 누가 한 말인 것 같습니까? 빈곤 가운데 산 어떤 사람의 말처럼 들립니까? 뜻밖에도 프랑스의 황제였던 나폴레옹이 한 말입니다.

한 때는 그가 천하를 호령하던 사람입니다그가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사람은 소유나 권세에 비례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나도 황제보다 평민으로 사는 게 더 행복할지 모른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노동자도 나름대로 행복이 있을 것이다. 나는 매일 진수성찬을 먹다 보니 맛있는 음식을 보아도 흥미가 없다. 가난한 사람은 나만큼 자주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해도 음식 맛을 느끼는 면에서 나보다 더 행복할 것이다.

 

많은 사람은 빈곤을 물질 차원에 국한시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고백을 들어보면 전혀 물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물질이 풍요해 지면 빈곤 문제를 다 해결하고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늘 말씀 가운데 11절을 읽읍시다.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