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6년 말씀

간청기도는 응답이 옵니다.(눅 11:05~10 )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6. 8. 13.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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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홀드 니버(Neinhold Niebuhr, 1892,6,21~1971,6,1)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미국 미주리 주에서 태어나 대통령 세 분의 영적 멘토가 되었던 분으로서 그가 남긴 기도문이 많이 회자되어서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함을 주시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게 하시고, 순간마다 즐기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곤란한 일을 당할 때면 평화로 가는 통로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시고, 죄악이 많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내가 원하는 그 모습으로 생각하지 말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사람이면 제일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응답받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 어떻게 기도드리면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 입니다. 기도 응답에는 두 가지 요소로 출발합니다. 하나는 사람 편에서 해야 할 일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편에서 하셔야 할 일입니다. 우리 사람 편에서 할 일은 무엇보다 끈질김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종교 지도자들은 기도생활을 지도하였는데,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나타는 모습이 외식자로 전락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응답받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안내해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간청기도는 응답이 옵니다. 로 정했습니다.

 

 

  1. 밤중에 친구에게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이 있습니다.

 

0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한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떡 세 덩이를 빌리러 갔습니다. 한 끼 정도의 식사에 해당하는 떡입니다. 친구끼리 서로 빌리기도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는 일로서 인간관계에 이런 정도의 친구가 있다면 외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정말 편하게 지내는 사이인 것은 맞는데, 그럼에도 친구 집에 떡을 빌리러 간 시간이 밤중이니 이것이 마음에 좀 걸립니다. 친구 집이 좀 넉넉하게 살아서 방도 많고 각각 따로 자는 것 같으면 몰라도 한 방에서 가족들 모두가 곤히 자고 있으니 떡을 좀 빌려달라고 노크를 하는 건 아무래도 상당한 결례입니다.

 

요즘은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면서 밤의 개념이 달라졌지만 예수님 당시의 밤중은 모든 활동을 정지하고 내일을 위해 자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의 서민들은 주로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방 하나로 된 집에서 온가족이 함께 살았습니다.

좀 더 가난한 사람들은 방 하나를 18인치 정도 높여서 구분하여 사람과 양, 염소, 닭 등과 같이 자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방바닥은 주로 갈대를 깔고, 옷은 낮에 입었던 망토를 둘러 입었으며, 기온이 내려가면 추위를 이기기 위해 서로 붙어 자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잠을 깬다면 다른 가족에게 까지 잠을 설치게 할 수 있고, 누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사람은 물론이고 가축들마저 잠이 깨어 소란이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에서 떡을 구웠는데 시간이 지나면 상하거나 맛이 없기 때문에 매 때마다 준비하여 먹었습니다. 요즘이야 냉장고가 있으니 언제든지 음식을 저장해 놓을 수 있고, 좋은 밥솥에 밥을 하면 저녁에 먹어도 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전기가 없는 시대, 지금처럼 문화가 발달되지 않는 시대에서는 식사시간이 지나면 떡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내 집에 떡이 없는데 아무리 친구 집이라도 그 집에 떡이 있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친구 집에 떡을 빌리러 간 것을 보면 아마 그 친구 집에는 떡이 항상 준비되어 있든지, 아니면 저녁때쯤 그 집에 떡이 남아서 내일 먹어야겠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06절은 이 사람에게 갑자기 친구가 찾아오니 떡은 없고 한 밤에 체면 불구하고 떡이 있는 친구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한 밤에 갑자기 친구 집에 찾아간다는 것 당연히 결례이죠. 현재 우리의 사회에서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친구가 찾아오면 얼마나 당황합니까? 그럴 때 이 사람아, 미리 연락이나 하고 오지 않고 하면서 푸념 아닌 푸념을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세계는 통신매체가 발달되지 못하여 미리 연락을 할 수 없는 환경입니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의 기후 조건 즉 낮의 찌는 더위를 피하여 밤에 여행을 하는 일은 흔한 일이므로 여행하는 친구가 밤에 찾아오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몇 년 전 제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부산 샘물교회에서 목회하는 동기 김병수 목사로부터 주일 저녁때쯤 전화가 왔습니다. 서울에 있는 동기 이수원 목사님이 일본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준비 중에 자기 집에 왔는데 주일이라 식당에 갈 수도 없고 해서 저의 집에 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김 목사 집에 식사가 없으면 우리 집이라고 있겠나 하니 다른 집에는 갈만한 곳이 없고, 우리 집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니 믿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올 때는 다른 동기 정 목사까지 데리고 왔더라고요. 오죽하면 그러하겠습니까? 그래서 잘 대접해 드렸습니다.

 

 

  2. 밤중이라도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0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한 밤에 문을 두드리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친구 관계로만 본다면 시간적으로 볼 때 떡을 안 줄 수도 있지만 그 간청함 때문에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 간청에 대해서 그 의미를 좀 더 세밀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전에 사용하던 개역 판에서는 강청(强請)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강청에 강조점을 두면서 강청기도를 해야 된다고 많이 외쳤습니다. 물론 강청기도를 해야 하는 것은 맡습니다.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08절에서 간청이란 의미는 문자적으로 귀찮게 졸라댐, 강청함 등의 뜻이지만 예수님 당시와 그 이전에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팔레스타인의 문화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아나이데이아(ναίδειαν)가 고전 희랍어 문헌과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 70(LXX) , 유대 랍비문헌에서는 수치를 피하기 위함,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 혹은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함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부 시대를 거쳐 중세시대의 라틴 번역, 콥틱 번역본에서 이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는 끈질김, 강청함 등으로 의미가 바뀌어졌습니다.

본래의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ν)의 의미가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의미로 변질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본래의 의미와 예수님이나 복음서 당대의 용법에 맞추어 수치를 피하기 위함, 혹은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함 등으로 해석해야만 됩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동 지방에서 손님 접대는 아주 유별나서, 손님을 극진히 환대하는 것이 예법보다는 하나의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이런 손님 대접에 대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순간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한 가정에서의 행사 즉 결혼식, 장례식은 바로 마을 전체의 행사로 인식하였으며, 또한 가정에 찾아오는 방문객은 바로 마을 전체의 방문객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웃 마을이나 외지에서 오는 손님들은 마을 전체가 당연히 환대해 주어야 했습니다.

만일 어느 한 가정에 손님이 찾아와서 접대를 받지 못하면 그것은 마을 전체의 체면이 손상되는 수치스러운 일로 간주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촌락의 한 가정이 손님을 맞이하면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 않을 경우 가까운 이웃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웃은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은 마을의 불문율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도움을 요청받고도 핑계를 대고 거절을 한다면 그는 마을 전체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되고 부끄러움과 창피를 당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08절을 보면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즉 마을의 체면이 깎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07절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통신수단,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 숙박업이나 식당이 발달되지 못한 사회에서 여행자들을 향한 이런 대접의 문화는 좋은 제도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한 경우도 이런 문화적 배경아래서 살펴보면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18:0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03 이르되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0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3. 간청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0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앞서 07,08절을 되돌리면 친구가 한 밤에 떡 세 개를 빌리러 왔을 때, 그 친구는 여러 정황상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음에도 결국은 빌려 주었습니다. 친구와 친구 사이에 떡을 빌리려 하고 결국 빌려 주었던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간청기도는 응답을 받을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앞서 살펴 본대로 간청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며,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간청기도란 단어의 그 본래의 의미대로 드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염치없는 기도, 뻔뻔한 기도입니다. 당연히 들어줄 수 없는 기도입니다. 그럼에도 간청의 기도, 즉 공적인 기도, 이웃에 관한 기도, 기도가 공개 되어 많은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있는 기도라면 하나님은 분명 돌아보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억지로라도 끝까지 매어 달려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체면을 위해서, 교회의 입장을 위해서 응답을 주실 줄 믿고 매어 달려야 합니다. 오늘의 메시지의 중심이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적인 일, 이웃 사랑에 관한 일, 공동체를 위한 기도이기 때문에 응답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야기도회에서 공적으로 제목이 나가고, 공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만한 능력이 있고,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심야기도회를 통한 중보기도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점검해 보시고 너무 바빠서 영적 감각을 잡지 못하여 기도 생활이 잘 안 된다면, 새벽기도는 아예 엄두도 못 낸다면 일단 금요일 저녁 930분에 교회로 오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안 들어주면 우리의 체면이 깎이고, 하나님의 체면도 함께 손상되기 때문에 들어주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면, 분명히 공적인 기도라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불신자로부터 부끄러움과 체면을 손상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들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 지 다시 08절을 보십시오.

 

0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이 문을 열고 자기 친구에게 빵을 나누어 준 것은 두 사람의 우정 때문이 아닙니다. 그 친구의 청을 안 들어주면 모두의 체면이 깎이니 할 수 없이 들어주는 것처럼, 우리의 심야기도회는 하나님께서 할 수 없어서 라도 들어주시는 현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05절에도 09절과 같은 수식하는 부사 또 가 나옵니다. 이때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후에 계속 기도의 자리를 유지하라는 뜻이고, 09절의 또는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을 잘 활용하라는 의미의 또 입니다.


09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07:07). 이 세 단어는 다 동일한 의미의 기도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기도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기도의 응답은 내가 정해 놓은 시간표대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내 시간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계속 기도 할 것을 권하는 말씀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응답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눈앞에서 전개되는 상황이 내 기대와 다를지라도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결국은 응답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중세시대 때 시온수도회가 만든 성당 기사단(Temple Knight)이란 군사조직이 있었습니다. 1118년 프랑스의 기사 위그 드 파옝이 8명의 젊은이와 함께 만든 기사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군병들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성당기사단이 세례 받을 때에는 이상한 모습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기사단은 물속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을 때 칼을 들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칼은 물에 담지 않고 높이 쳐들고 몸만 물속에 넣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의미는 이렇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 드리지만 이 검만은 주님께 드릴 수 없습니다. 전쟁터에서만은 주님 뜻대로 칼을 사용하지 않고 명령대로 사용하여야 합니다. 이 검만은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사용하여야 하는 검입니다.

 

그러나 반 쪽 마음으로 세례를 받고, 반쪽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그게 정상적이겠습니까? 그런 믿음은 정상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돌아보시지 않는 믿음입니다. 기독교인은 전부가 아니면 모두가 아닙니다. 전부이어야 합니다. 약해서 가다가 쓰러져도 전부를 지향하여야 합니다. 나의 전부를 드리는 그 믿음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간청기도는 전부를 드리는 믿음에서 출발하며 전부를 드리는 것에서 응답이 옵니다.

 

0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