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6년 말씀

[종려주일] 나를 위해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갈 03:13~1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6. 3. 1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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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37년 경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서 임기를 마감하는 해에 예루살렘의 제사장 가문에 요세푸스(Flavius Joseph,37~100)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던 때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는 바울보다 연하였으나 동시대인으로서 유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창세로부터 그의 시대까지 자세한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유대 역사에서 볼 때 아주 귀중한 자료를 남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니었기에 그의 기록들은 더욱 역사적이고 객관성을 가진 자료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대고대사는 지금도 권위 있는 역사서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 책 18권과 20권에서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중 일부를 읽겠습니다.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 너무나 신기한 일들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으로 본다면 놀라운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선생이었고, 수많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그의 곁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빌라도가 유대의 유력 인사들의 청에 의해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으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하던 자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에 관해 예언한 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 뿐 아니라 그에 관해서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다. 그의 이름을 본 따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오늘 종려주일을 통해서 성경뿐만 아니라 세상의 역사에서도 확인을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나를 위해 저주를 받으신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로마제국의 잔인한 사형법 두 가지가 있습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의 중요한 사형 집행 방법들 특별히 악명 높은 두 가지 사형법이 있습니다. 연자맷돌형과 십자가형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당하면서도 이런 형만은 당하지 않으려 하지만 로마제국의 식민지 아래 놓인 이상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잃으면 당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연자맷돌형(18:06; 17:02).

18:0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맷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여자들이 집에서 흔히 콩을 갈 때 사용하는 작은 맷돌과, 소나 나귀가 끄는 큰 연자맷돌입니다. 연재맷돌이란 소나 나귀의 힘으로 돌리는 지름 120-150cm 정도의 회전형 맷돌로서, 주로 기름을 짜기 위해 올리브 나무 밭에 가져다 놓고, 기름을 짜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도를 드린 곳이 겟세마네 동산, 즉 기름틀이란 곳인데 이곳 올리브나무 사이에서 여러 개의 연자맷돌이 발견되었습니다. 연자맷돌형은 말 그대로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물속에 던져 버리는 사형법입니다.

물속 깊은 곳에 수장을 하는 일인 만큼 아예 시체도 찾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런 형을 당하는 대상은 부모를 죽였다든지 혹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크게 해친 자들입니다.

한 마디로 중죄인에게 내리는 형으로, 죽어서도 사회와 단절을 하고 가족 품으로도 돌아가지 말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당연히 묘도 만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십자가형(27:35; 15:25)

27: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십자가형은 인간이 만들어 낸 형벌 가운데 가장 잔인한 형벌입니다. 누가 이런 형을 당합니까? 주로 국가에 대한 반역자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경우입니다. 너무도 잔인한 처형 방법이라 로마 군인들 세계에서도 십자가는 금기어로 정했다고 합니다.

만일 황제가 식사할 때 누군가가 십자가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당장 끌려 나가 매질을 당할 정도입니다. 한 마디로 십자가는 끔찍함의 극치입니다. 십자가형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 시체를 치워주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어 새들이 뜯어먹도록 방치하는 형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역사적으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런 십자가형을 내린 적이 없었다고 하며, 다만 그들의 노예나 식민지 사람들에게만 내리는 최고의 형벌입니다. 십자가형이 어느 정도의 고통일지는 우리 모두가 당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능히 짐작이 갑니다. 이런 형을 당하면 죄수는 바로 죽는 게 아니라 하루 이상, 길게는 사흘도 갑니다. 그 동안 나무에 매달려 온 몸의 근육이 경직되어 뒤틀리고, 피가 잘 돌지 않아 호흡이 곤란해지면서 심장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다 죽는 형입니다.

 

 

  2. 예수님께서 꼭 십자가형을 당해야 합니까?

 

27: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이 무리를 동원하여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처단할 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십자가형을 고집합니까? 다른 사형법도 얼마든지 있는데 하필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법으로 기소하였으며, 또 빌라도에게 집요하게 관철을 시키려 합니까?

빌라도 총독은 십자가형을 왜 승인하였습니까? 여기에는 당시의 권력 집행관인 로마의 관료들과 유대교 교권자들의 깊은 의도가 맞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속국인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위엄을 보여줄 기회가 되고, 언제든지 잘못하면 이런 식으로 처형하겠다는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유대교 교권자들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처형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메시아의 기대를 제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저주 받은 자로 몰아가려는 전략인데 신명기21:23절 말씀으로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로마의 십자가형은 공중에 매달아 새들이 쪼아 먹게 하는 방법이고, 구약시대 유대인들도 십자가형을 법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땅은 본래 신성한 것으로 나쁜 죄인을 땅에다 놓고 죽이면 땅이 더러워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위해 십자가형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으로 죽은 시체는 당일에 내려 땅에 묻었습니다.

왜 당일에 처리를 합니까? 십자가형 자체가 저주이기 때문에, 그 주검은 어떤 형태로든 거룩한 땅 가나안에서 계속 방치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가증한 죄로 인하여 처형당한 시체, 저주의 시체는 당일 땅 속에 묻어 그 부정함을 유대인 사회로부터 깨끗이 제거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습니다(08:29; 10:26,27).

 

21:23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예수님께서 받은 십자가형이 이런 의미를 지니는 바, 그 죽음이 얼마나 욕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 교권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됨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이상 메시아로 추앙하며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입니다. 반면 로마 시민권자는 아무리 중죄인이라도 십자가형에 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을 소유했던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전하는 중심에 서 있었음에도 마지막에 십자가형이 아닌 단두대(斷頭臺)형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치욕스런 십자가형의 사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묘하고 은혜로운 십자가의 비밀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13).

 

고전 02:0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가 복을 받습니다.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택한 백성을 속량하셨습니다. 바울신학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차별 없이 죄 사함의 은혜와 구원의 복을 받는 예수님 안에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그 분의 말씀이라면 언제나 순종하였고, 그 분의 뜻이라면 언제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미치고, 우리에게도 미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립니다.

 

0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이제 그 옛날의 십자가형, 저주의 십자가가 오늘의 우리에게 은혜의 십자가, 자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통의 극치인 십자가 형틀이 오늘의 우리에게 영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목걸이, 십자가 형상의 반지가 흔합니다.

어떤 나라의 박물관에는 왕관에도, 훈장에도 십자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굳이 신자 아니라도 십자가 목걸이 흔하게 착용합니다. 우리의 주위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많이 있으며, 또 우리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주변만 하더라도 십자가가 많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현상입니다.

 

각 나라마다 흉악범을 사형시키는 방법이 다양한데 우리나라는 옛날에 주로 사약을 내리거나, 교수형, 아니면 망나니를 통한 단두형을 집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이 사약을 내릴 때 미쳐 사약이 준비되지 못했을 경우 어떻게 하였을 것 같습니까?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담배 잎을 삶은 물로 사약을 대신하였습니다. 담배 두 개비를 삶아 그 물을 토끼에게 먹이면 3분 안에 죽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담배 두 갑을 삶아 그 물을 마시면 사람도 3분 안에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는 십자가형보다 더 무서운 게 담배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대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기독교 신앙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속량의 죽음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구세주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기독교는 생명의 도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중심 내용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고후 0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08:012,02).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으나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들은 사죄의 은총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기만 하면 됩니다. 전에는 우리가 몰라서 마귀에게 사로잡혀 종노릇 하였지만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회복하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복 중의 복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요일 04:0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무리가 종려가지를 꺾어 흔들며 환영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12:13). 이번주간은 고난의 주간입니다. 주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향하여 골고다로 나아가시면서 받은 고난을 기념하고 내가 동참한다는 의미의 주간입니다.

김해삼일 성도 여러분, 고난 주간에만 주님의 고난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속에서 그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도록 힘씁시다.

 

0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벧후 03:09)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생활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