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6년 말씀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눅 10:25~3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6. 3. 5. 13:19
728x90

유대인들은 성()이 없습니다. 구약성경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말라기까지, 신약성경에서는 복음서까지 성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왜 성이 없습니까?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한 후 지파 별로 땅을 분배하여 지파들끼리 모여서 살았습니다. 한 가족관계의 관점으로 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25)? 인생의 궁극적 질문, 곧 모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의미가 있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회적인 말로 선생님, 어떻게 하여야 제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과, 율법교사가 한 번 더 질문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목을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로 정했습니다. 함께 은혜 받기를 축원합니다. 

  

 

  1. 한 율법교사가 영생을 주제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교사란 성경에서 주로 서기관이라 불리고, 때로는 랍비라고도 불립니다. 율법을 깊이 연구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율법 전문가라는 뜻입니다. 이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시험적으로 한 질문을 합니다. 이어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한 두 번째 질문도 합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을 봅시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입니다. 이 물음에서 율법사는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깁니다.

 

자신의 의를 좀 자랑하기 위해서, 또 예수님이 율법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를 시험하기 위해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의 의미로 보아 율법교사는 이미 영생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는 것 같습니까? 율법교사이니 성경을 통해서 알았을 것입니다(05:39). 이 율법교사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신분상으로 영생을 얻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최소한 그의 고백을 통해서 말입니다(27).

 

이스라엘에서 율법교사는 그 직책 자체가 믿음의 보증서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기본 조건이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고, 철저하게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고 있고, 정결한 음식을 가려서 먹고, 제사를 드리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을 보면 그는 내면에서 느껴지는 양심의 울림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는 내 모습이 과연 영생의 길일까?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실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확신이 없자 최고의 랍비로 소문이 난 예수님에게 나와서 시험도 할 겸 영생에 관하여 물어 보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당시 이 사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의 공통된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율법교사의 물음은 육신적이며 세상적인 것에 대한 물음이 아닙니다. 영생에 관한 질문입니다. 율법교사다운 수준 높은 질문입니다.

 

그러면 이 율법교사의 질문을 우리의 생활권으로 옮겨와서 질문을 한다면 어떠할 것 같습니까? 소망하는 것이 이 정도의 수준이 되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처럼 영적인 수준, 심령 깊숙이 울어 나오는 질문이 나오겠느냐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관심은 혹 이런 정도 아닙니까?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야 건강을 얻겠습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성공을 할 것 같습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잘 살고, 교회에 도움도 될 것 같습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이런 것들이 주제가 아닙니다. 복음의 목적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일시적이며 세상적인 것들을 약속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맺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내가 구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안내를 합니다. 세상적인 것에 앞서 신령한 것을 구하라고 말입니다.

 

딤전 02:0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0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2.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영생이라고 하십니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율법교사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되묻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교사의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율법교사이니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26)? 이에 대해 율법교사는 레 19:18절 말씀을 인용하여 답을 합니다.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내 몸처럼 사랑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 네 대답이 맞다. 그렇게 살아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28).

그런데 율법교사에게는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알겠는데, 내 이웃이 누구이며, 내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사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방법을 성경으로 답을 하고서도 정작 이웃이 누구이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물어봅니다. 이에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의 예로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났습니다. 안타깝게도 가지고 있는 전부를 빼앗기고, 심지어 입고 있는 옷도 빼앗긴데다 폭행을 당하여 죽음의 직전에 처했습니다.

 

그때 다행스럽게도 한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갑니다. 아마 호위병들을 데리고 지나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사랑을 베풀어야 할 제사장이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자를 보고서도 모른 체 하며 피하여 지나갔습니다(31).

정말 야속한 세상입니다. 이어서 한 레위인이 그 길로 지나갑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도 강도를 만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갔습니다(32). 제사장과 레위인, 이 두 사람이 강도를 만나 다 죽어가는 동족을 보고서도 못 본 체 하고 간 것은 나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 것이라 여겨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 번째 사람이 강도를 만나 다 죽어가는 현장을 지나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유대인들과는 상종을 안 하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33). 그럼에도 이 사람은 강도를 만나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다가갔습니다.

살펴보니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아직은 죽지 않은 상황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 짐에서 기름과 포도주를 꺼내어 상처에 부어주었습니다. 살짝 발라준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부어서 응급처치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타고 있던 짐승에 태워서 임시 거처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이 일정 때문에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치료비를 주며 치료를 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추가 경비가 나면 나중에 자기가 돌아 올 때 지불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겉만 번지레한 외식적인 껍질을 벗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랑의 사람으로 삶의 스타일로 바꾸라는 뜻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고, 나만을 향하던 사랑을 이웃으로 옮겨놓으라는 뜻입니다.

 

 

  3. 그러면 김삼일 가족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세 사람을 비교하시면서 이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율법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소리를 입으로 밝히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이라 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을 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과 관계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굳이 율법교사에게 들려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이 아닌 외국인은 무조건 적대시 하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이웃 개념을 타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도 예수님 안에서는 한 가족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드디어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가진 율법교사에게 믿음의 행동지침을 내립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웃의 개념을 조건적으로 구분하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은 아주 간단합니다. 너도 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라고 명령합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이 율법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 것 같습니까?

율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공부하고 익히는 일입니까? 이런 지식들도 중요하지만 고통과 고난을 받으면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사람들, 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제적인 약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율법교사가 들었으면 이제 어떻게 하겠다는 반응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런 삶을 살아보겠습니다. 라는 피드백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예수님은 그냥 네 이웃이 누구냐? 라고 묻지 않고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 라고 묻습니다(36).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이웃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만일 이웃이 없다면 곧 죽게 될 처지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놓고 네 자신과 같이 하라고 명합니다(19:18). 내 몸과 같이 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내 몸입니다. 내 몸이 우선순위이고 최고입니다. 몸이 아파 보십시오. 가족들이 모이고, 비상이 걸리고, 당장 병원으로 약국으로 달려갑니다. 돈이 없어서 그렇지 있기만 한다면야 어디 아까울리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도 내 몸을 돌보고 챙기는 수준으로 명하십니다. 한번만이 아니고, 조금만이 아니고, 일시적도 아닌 끝까지 하라고 명하십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입니까?

너도 입니다. 율법교사를 향하여 너도 이와 같이 행하면 영생의 길이 열린다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 예배의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생명을 회복시키는 것은 희생 없이 불가능합니다. 시간도 써야하고, 돈도 들여야 하고, 지극한 관심과 돌봄도 있어야 합니다. 이웃에게 이런 마음의 각오로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201110월 중국 광둥 성 광저우의 포산 시 한 시장 골목에서 혼자 놀고 있던 두 살짜리 여자 아이가 승합차에 치어 앞바퀴에 깔리었습니다. 운전자는 아이가 치어 바퀴에 깔려 있는 것을 알고서도 잠시 멈칫거리다 그냥 도주하는 바람에 아이는 뒷바퀴에 다시 한 번 깔렸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가 길에 쓰러져 있는데도 그 주변을 지나던 18명의 행인들은 아무도 그 아이를 돕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7분 후에 한 화물차가 또 이 아이를 치고는 뺑소니를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에 폐지를 줍던 한 여성이 이 아이를 길가로 옮긴 후 부모를 찾아 나섰고, 병원으로 옮겨진 아이는 결국 8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남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도와줄 수 없는 원수 같은 관계임에도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인간가치, 생명가치를 귀히 여기는 바로 그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복음 말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그러면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러 나갑시다.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께 올려 드립시다. 우리 모두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되어서 주님의 찾으시는 귀한 한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