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5년 말씀

의인은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갈 02:15~2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5. 12. 19.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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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작은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는 예그전 모임입니다. 이 모임을 주변에서는 나사렛 당, 혹은 그리스도 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예그전의 복음이 점점 세계화 되어가면서 논란거리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에 관한 논란입니다. 결국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날부터 율법에서 자유 한다는 진리를 확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완전히 정착하지 못한 가운데서 지난주일 살펴 본 말씀처럼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전하는 말씀은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하여야 의롭게(구원) 되는 것인지, 의롭게 된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의인은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로 정했습니다.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교리서신으로 불리는 로마서와 함께 또 하나의 교리서신으로 불리는 성경이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당시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들 때문에 기록 되었습니다. 바울은 진리를 부정하는 그들을 향해 다른 복음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하였으며(01:06), 오늘 말씀은 다른 복음을 배격하는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의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것으로 그 근원이 사람에게 전혀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문장 구조가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 스스로의 능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을 해 주신다는 의미이지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을 해 주심으로 이루어지는 이 의를 우리는 칭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칭의가 우리에게 왜 필요합니까? 너와 나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03:10, 23).

 

03:10 기록 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16절의 이어지는 말씀 가운데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관사가 없음) 자신의 선한 행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만든 자기 규범들을 말합니다.

만일 사람이 만든 그런 율법적인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려면 모든 율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대주의 사회의 규범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03:20). 사람은 무엇을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다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는 별개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대속의 주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모르고 그저 말만 믿는다는 입술의 형식은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분명한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세상적인 삶에 집착하면서 어떻게 십자가의 도리와 구원의 진리를 믿는다는 말입니까?

이 땅에서 누릴 생명을 연장하는 일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의 세계, 구원의 완성인 영화의 세계를 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기준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 하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대단한 선행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까? 나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하나님의 프로그램 안에서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2.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훼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6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왜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을 합니까? 이미 갈라디아교회 안에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함께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거짓 스승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구원의 조건이 믿음과 함께 할례를 받아야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적인 가르침으로 인해 바울이 힘써 일궈 놓은 선교의 터전이 훼손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이 훼손을 당하자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으며, 누구든지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또 다른 것을 전한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선언합니다.

 

01:0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은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믿는 그것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진리 외에 다른 어떤 율법적인 색채를 덧씌운다면 그 논리야말로 복음에서 이탈 된 이단의 요소일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자기가 전한 복음 외에 또 다른 복음은 존재 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갈라디아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 복음과 함께 율법적인 부분의 할례를 받아야만 비로소 진정한 복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것이 다른 복음이다. 라고 구정하면서 누구든지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01:08).

 

바울의 신학적인 싸움은 배수진을 친 형국입니다. 적당하게 타협할 수 있는 그 지점을 넘어서서 율법주의 할례파들과 끝장토론을 벌이는 중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갈라디아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의 핵심이 무엇인지 이제 아시겠지요? 율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전통입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말을 들었고, 평생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아주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그날로 다른 복음은 버려야 합니다. 믿음 외에 그 어떤 것이라도 덧붙이면 그때부터 복음은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사수하기 위하여 자신의 최종적인 입장을 표명합니다.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바울이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는 것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은총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거짓 교사들입니다.

이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파들에게 그 할례를 버리지 않으면 당신들에게는 주님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다. 라고 선언을 합니다. 현재 우리의 주변에 다른 복음의 요소들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바로 안식교, 안상홍증인회, 신천지, 여호와의 증인, 가톨릭 등 부지기수입니다.

 

10: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3.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하는 바울도 우리도 역사의 현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05:24) 했는데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를 하십니까? 우리 모두가 여전히 살아있으니 지금이라도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어떤 방식으로 못 박혀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일단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이 본서의 여러 곳에서 거듭 언급되고 있습니다(01:04; 03:01,13; 06:12,14). 이로 보아 예수님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시절 각 교회들의 가르침의 초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말씀을 놓고, 물리적으로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 좌우의 강도들처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적인 차원, 상징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죄에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아니라 죽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으니 이제부터 바로 믿고 바로 살면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육신적인 감각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20절에서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는 말씀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라는 말씀을 이어주는 접속사 그런즉 이란 단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십자가 사건은 바로 나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었다고 했는데 도대체 나의 무엇이 죽었다는 말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이제부터 한 방향만 보고 나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여 살아가는 삶 말입니다. 여러분, 영으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죽은 자에게 자아가 없고, 욕심도 없는 것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을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 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여기서 살다는 현재형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끝은 아닌 것은 그때부터 내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 신학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무엇이든 예수님 안에서 생각하였고, 예수님 안에서 행동하였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 떠오르는 주님 모습 피할 길이 없어라.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삶의 주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나의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삶의 가치를 이동하여야 합니다. 인생의 주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14:0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이 좀 많이 붐비는 음식점에 가면 벽에 사람들의 sign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 아무개, 이사람, 저사람 등 더러 생각나는 이름입니다. 그것은 그런 사람이 다녀갔다는 표시로서 그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그런 식으로 잠깐 다녀가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끝날까지 영원히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새로운 삶이 열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으로 살아야 됩니다. 주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는 이제부터 몇 가지의 특징이 나타나야 합니다.

나를 괴롭게 한자를 용서하고,

외로운 자를 찾아가 위로하며,

웃음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웃음을 기다리는 자에게 웃음을 주며,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칭찬하며,

부정적인 생활에서 긍정적인 생활로 바꾸어지게 하는 기회로 삼고,

하루의 일과를 하나님의 인도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감사로 끝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