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5년 말씀

진리를 훼손하면 책망을 받습니다.(갈 02:11~1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5. 12. 1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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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크레타 섬 출신의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가 그린 사도 베드로와 바울(1587~1592, 121.5×105cm)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의 관심은 베드로나 바울의 성자다움이 아닌 인간적인 차이에 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바울은 지적이면서 활동적이고 정열적이어서 왼손으로 경전을 짚고는 우리를 이해시키려는 열망으로 느껴집니다. 마치 정신의 칼날인 양 예리한 손가락이 모자를 쓰지 않은 머리만큼이나 빛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베드로의 손은 검게 그을린 노동자의 손처럼 보입니다.

그는 왼손을 차분하게 쥐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권위를 나타내는 열쇠의 손잡이 고리를 쥐고 있습니다. 엘 그레코는 베드로와 바울을 캔버스에 등장시켜 기독교를 힘차게 이끌었던 그들의 행적을 나타내려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는 초대기독교 시절에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보완해주는 상호 의존으로 기독교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임은 다 아는 일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베드로와 바울 두 사람이 오늘 말씀에 등장합니다.

이 두 사람 다 순교로서 생을 마쳤는데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들은 편안한 죽음이 아니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믿음의 벗이면서도 진리를 사수하는 모습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오늘은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는 바울의 관점에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베드로가 진리의 외식에 빠졌습니다.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예루살렘 공회의 두 지도자 베드로와 야고보는 바울이 주장하는 대로, 구원의 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결정하였습니다(15:19~22). 이런 결정이 있고 난 이후 베드로가 안디옥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 믿음생활을 잘 하는 지 돌아보고 격려를 하려는 의도입니다. 이에 베드로를 맞은 성도들이 베드로와 더불어 흉허물 없는 식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런 식탁의 교제는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금기 사항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든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이런 사랑의 식탁을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방인 신자의 관점이나 유대인 신자의 관점에서 보면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베드로는 이 진리를 진작부터 깨닫고 실천하였습니다. 그 예로서 가이사랴에서 근무하고 있던 고넬료가 욥바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를 강사로 초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가서 가정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그 일이야말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혀 있는 담을 무너뜨린 하나의 예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이런 믿음의 자세로 베드로와 안디옥교회 이방인 신자들이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 공회의 또 한사람의 지도자 야고보의 측근들과 맞닥뜨린 것입니다. 이들은 소위 할례파로서 유대의 전통을 아주 중요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에 어쩔 수 없이 따르긴 했지만 여전히 구약성경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을 근거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을 하고 있었습니니다.

이들은 유대인 정결법을 근거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과 식사를 하는 것이나, 이방인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나, 심지어 이방인 지역을 여행하는 것도 꺼려하였습니다. 이들의 영향력은 예루살렘 공회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도착하자지 베드로가 식사를 중단하고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사랑의 애찬의 흥겨운 분위기는 예루살렘 공회에서 내려온 일단의 보수파에 속한 할례파 사람들로 인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난 안디옥교회 신자와 베드로, 이곳에 당도한 이들 모두가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사랑의 애찬을 나눌 수 있는 진리가 막 결정 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동식사, 이런 진리를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아직은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 순간에 누구보다도 난감했던 베드로 그래서 그 자리를 슬그머니 벗어났는데 베드로라면 그만큼 계시와 진리의 말씀에 확신이 있고 기준이 되는 사람 아닙니까?

이런 베드로가 식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요, 외식입니다. 정말 베드로답지 않는 행동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겠습니까?

 

23:13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15,23,25,27,29)

   

 

 2. 진리의 외식은 다른 사람까지 오염시킵니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가 안디옥교회 이방인 신자와 함께 식사하는 것이 정당한 줄 알고 한 일에 대하여 얼마든지 동의가 됩니다. 사실이 그러하니까 말입니다. 또 혹 일어날 분쟁을 예방하고자 그 식사 자리를 피한 것도 다소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지금까지 이방인 신자에 대한 교제를 전면 부인하는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받은 계시와 환상 그리고 말씀의 확신이 있음에도 그만 할례파 앞에서 무언의 압력을 받고 숙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외식의 모습을 보임으로 인해 여러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는데 어쩌면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결과처럼 보이는 13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열두 제자의 으뜸 베드로, 공적인 위치에 있는 베드로가 한 외식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복음의 자유가 첨예하게 대립되던 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실수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나바 같은 상당한 지도자도 외식적인 행동을 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바나바 그가 누구입니까? 회심을 한 사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해 주었고(09:26,27), 사울을 사도 바울 되도록 선교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고(11:25,26), 바울과 더불어 위대한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놓은 준 사도입니다(13,14장에서 7).

 

이런 정도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까지 외식하는 일에 동참하였다면 대단히 심각한 일입니다. 어쩌면 예루살렘 공회(A. D. 49)의 율법 무용론에 대한 결정을 무효화시킬 수도 있는 근거도 될 수 있고, 결과적으로는 율법주의에 굴복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적인 위치에 있는 지도자의 행동의 중요성과, 한 사람의 외식적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07:01~23). 그러므로 13절을 읽으면서 우리도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한 사람의 외식과 위선이 도미노 현상처럼 주변을 쓰러뜨리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지도자, 영적 지도자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할 때 그 주변이 순식간에 진리에서 오염되어 감을 멀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외식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에게도 빈번하게 나타나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진리가 나의 외식적 믿음 때문에 이웃을 실족시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행동이 복음 안에서 당당하다면 우리의 주변을 세울 수도 있고, 우리의 행동이 위선적이고 외식적이라면 이웃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할례파들 앞에서 물러간 것은 그의 신학적인 진리가 변질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 이방인을 향한 신학과 유대인을 향한 신학이 별도로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사람의 생각으로 사람의 눈을 의식하였기 때문입니다. 할례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영적 지도자가 담대히 소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나아갈 때 그 주변의 사람들이 힘을 얻어서 든든히 세워져 가는 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든든한 믿음 위에 서 있다고 함부로 장담을 하지 마십시오. 약한 것이 사람이고, 별 수 없는 것이 역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3. 진리의 외식은 책망을 받습니다.

 

14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오늘의 베드로의 외식 사건,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 사건을 그의 저술 사도행전에서 조금도 노출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당시의 사건을 떠올리며 베드로의 진리를 외식한 사건을 책망하였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당시에 감히 그 권위 앞에서 함부로 도전할 사람이 없을 정도의 큰 인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위대한 베드로라 할지라도 그 행동이 진리에 위반된 이상 그냥 넘어 갈 수가 없어서 그 모습을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이 자칫 할례파들에게 진리를 왜곡하는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이렇게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는 초대교회의 두 기둥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아래서 직접 말씀을 들었고,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모두 목격한 인물입니다.

 

그에 비하면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자로 생활하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고 변화가 되어 일꾼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진리를 좀 왜곡되게 하자 즉각 책망을 하고 나섰습니다.

바울의 이런 책망 앞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할례파들이 베드로의 체면이 좀 구겨지는 장면을 보면서 다소 흐뭇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책망을 단호하게 함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이신득의) 진리를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전함에 있어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었으며,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행동으로 다시 보여주고 있습니다.

 

딤후 0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실천하지 않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 진리는 참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말로만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아니라 로마 황제 앞일지라도 담대히 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보다 조금만 권세가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 앞에서는 제대로 말도 못하지만 바울은 믿음으로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도 헤롯 왕의 권력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으며, 감옥도 불사한 인물입니다. 05:29절에 보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고백도 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온 할례파들 시선이 부담스러워 진리를 훼손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바울로부터 자존심이 상하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거나 훼손될 가능성이 있는 일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 곁에는 바울이 아니라 주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부분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가 그 책망을 고깝게 여겼더라면, 바울을 향한 감정을 품었다면 반석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책망 앞에서 베드로의 마음이 당연히 아팠을 것이고, 부끄럽기도 했을 것이고, 화도 치밀어 오를 수 있겠지만 매를 맞을 줄도 알았습니다. 그는 바울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베드로는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와 믿음의 세계, 진리의 세계로 든든하게 걸어갔을 줄 믿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진리로 무장한다 할지라도 때로는 한 순간에 약해 질 때가 있고, 실족 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행 15:11,19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방인이나 우리 모두 할 것 없이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후로도 이방인들이 믿음의 자리로 돌아 올 때 할례나 율법 같은 것으로 괴롭게 하지 맙시다. 교회에 들어오는 어느 누구라도 그들이 이방인일지라도 할례나 율법 같은 짐을 지우지 않는다는 것이 예루살렘 공회의 공식 입장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공회에서 그것도 할례파들 앞에서 담대한 발언을 하였던 베드로가 오늘 말씀에는 너무도 약해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허물과 실수로 인해 베드로는 다시금 새로운 인물로 다듬어져 갔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책망을 통해서, 성경의 책망을 통해서 새롭게 다듬어져 가는 일꾼 되기를 축원합니다.

 

07: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0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