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4년 말씀

<추수감사>더욱 하나님께 감사합시다.(시 107:01~09)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4. 11. 15.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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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Arthur Schopenhauer, 1788.2.22.~1860.9.21.) 우화[寓話, 동식물을 인격화 한 이야기] 하나를 썼습니다. 그 제목은 고슴도치의 딜레마입니다. 고슴도치는 외로운 동물입니다. 일반적으로 동물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할 때는 떼를 지어서 움직이지만 고슴도치는 혼자 다닙니다.

그러다 외로움을 느낄 때는 다른 고슴도치에게 접근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줍니다. 왜냐하면 고슴도치에게는 약 3만개의 바늘이 몸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바늘이 오히려 사랑을 표현할수록 상처를 주는 겁니다.

 

사람은 원래 모여 살아야 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스타일이 꼭 고슴도치 같습니다. 가까워지면 그만큼 상처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들도 30세가 넘어가면 약 3만개 정도의 상처가 쌓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깁니다.

원하든, 원치 않던 입은 상처들 때문에 인간관계가 좋았다가도 고통스런 관계로 발전 될 때가 있습니다. 다음주일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자신을 많이 돌아보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일들이 많았음을 말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였습니다(벧전 04:08). 주님 안에서 함께 나아가는 복된 길을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잘 걸어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더욱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라고 정했습니다. 은혜 받는 귀한 시간되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속량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02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 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02절에 앞서 먼저 01절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예식을 할 때마다 낭송하던 송영(誦詠)구입니다.

지금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그는 선하시며 의 앞부분에 왜냐하면 이라는 강조 형태의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송영을 할 시 사회자가 여호와께 감사하라 이렇게 말하면 회중은 왜냐하면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로 읽었다는 말입니다.

 

02절을 봅시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렇게 나오죠? 무슨 뜻일까요? 이럴 때는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속량이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을 마친 후 하나님의 은혜로 고국으로 돌아오던 때를 염두에 두고 표현하는 말입니다.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여기서 대적이란 일차적으로는 당연히 정복자 바벨론의 세력을 말하겠으나 영적 적용으로는 슬픔, 곤경, 근심의 뜻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적이란 단어의 히브리어 표현이 근심이란 뜻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대적이던, 내적인 근심이던 이런 것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해방을 시켰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의 생활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10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 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를 백성과 양으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시고, 우리의 영의 아버지가 되셔서 모든 일을 보살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깨닫기만 한다면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 요나를 예로 들어 볼까요?

 

02:0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성도 여러분은 믿음이 약화되거나 어려운 상활을 만나면 현실의 환경과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먼저 쏟아내는 사람들 중에 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만일 이런 원망과 불평의 자리에 들어 있다면 이는 감사의 싹까지도 잘라 버리는 불신앙적인 사람 일 수 있습니다. 반면 감사는 약한 믿음을 거뜬하게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장군들과 함께 있었는데 돌아가면서 모두 두세 마디 씩 욕을 하자 링컨이 슬그머니 나갔다가 들어왔습니다. 갑자기 나갔다 들어오자 대통령과 친한 장군이 궁금하여 각하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링컨이 귀가 더러워져 좀 씻고 왔습니다. 라고 했다 합니다. 좋지 않은 이야기는 듣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은 감사의 싹을 자르고 병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반면 감사는 약한 믿음을 바로 세우는 영양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더욱 감사하는 이유는,

 

 

 2. 하나님께서 고통에서 건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06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여기 근심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은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이스라엘 민족들입니다. 그러나 돌아는 오지만 그들의 머나먼 고국 행이 주변의 위험한 상황들 속에 무수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돌아오는 자들이 맞는 고통의 현장이 어떠한 지를 좀 살펴 봅시다.

 

04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05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광야의 사막 길의 고통, 주리고 목이 마른 고통, 영혼의 고통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광야의 사막 길이 어떤 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광야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큰 바위와 간혹 떨기나무 정도가 있는 곳이고, 사막이란 동식물이 살 수 없는 일교차가 아주 심한 모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길게 뻗어있는 광야나 사막은 모래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곳으로, 일단 길이 있다가도 한 순간에 즉시 지워져서 없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요즘이야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길을 쉽게 찾지만 당시는 문화가 발달되지 못하여 바람에 의해 길이 지워지면 길을 못 찾아 방황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아시스가 없는 이런 기나긴 환경을 만나면 먹을 것부터 떨어집니다. 주리고 물이 없어 목마름의 고통도 심해 질 것이고, 추위와 사나운 맹수들의 위협은 곧 죽음과도 직결될 것입니다.

 

04,05절의 세 가지 고통을 영적으로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마음이 마치 광야의 사막고 같은 길에서 방황하여 주거지를 찾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 가운데 혹 사막 같은 인생을 경험해 보신 분들이 있습니까?

사람에 따라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노숙자처럼 사는 분도 있습니까? 돌아갈 집이 없습니까? 함께 사랑을 나눌 사람이 없습니까? 철저하게 나 혼자입니까? 인생의 어두움을 경험하고 있었습니까?

세상에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뿐더러 한 발자국만 더 뒤로 물러나면 낭떠러지 밖에 없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바벨론 포로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시편 10706, 13, 19, 28절에 나오는 4번의 부르짖으매 입니다. 그대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 하나님 앞에 완전히 숙이면서 겸손하게 하나님, 나 좀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는 것 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외부의 침략자들을 보호해 주는 일로 가족을 떼놓고 다니다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얼마나 큰 위기였느냐 하면 시글락에 있는 아내와 자식들이 다 아말렉 족속에게 잡혀 간 일입니다.

전쟁에서 돌아와 보니 성이 불타고 자기의 아내들과 자식들이 사로 잡혀갔으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이때 다윗은 얼마나 절망을 했는지 울 기력이 없도록 울었다고 했습니다.

 

삼상30:0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04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이어서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 오라고 명합니다. 에봇이란 제사장이 입는 겉옷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성전에 입고 올라가는 옷입니다. 다윗이 긴급한 상황 앞에서 그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드디어 하나님의 사인이 떨어집니다. 추격해라. 그리하여 다윗은 아말렉 군대를 쫓아가서 깨뜨리고 모든 가족들과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고통의 문제, 절망의 문제를 하나님과 기도로 단판을 지어 해결한 것입니다.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06). 기도하라는 글이 있습니다(전병욱 목사). 기도하라. 당신의 삶 가운데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는가? 기도해서 원인을 빨리 파악하라. 오래 끌지 말라. 덮어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것으로 풀어라. 그때 미래의 길이 열리고 문제가 풀리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더욱 감사하는 이유는,

 

 

 3.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0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사모한다는 말은 자신의 영혼이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고백하는 모습입니다.

12:16~21에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부자의 독백을 보면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다 하며 자부심을 가집니다. 또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며 자위하지만 영혼의 즐거움은 그런 세상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린 영혼의 자세를 가질 때에 옵니다.

 

여러분은 영혼의 즐거움을 구합니까? 그러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질 때 만족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매일매일 끊임없는 고통과 삶의 허무가 어떤 것인지를 봅니다. 또 우리는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지, 얼마나 소망이 없는지도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신령한 영혼의 주림, 은혜의 주림을 체험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간절히 사모하는 영혼입니까? 사모한다는 것은 한 순간에 스쳐가는 감정이 아니라 끝까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되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를 사모하게 될 때는 그것이 마음에 스쳐만 가는 것이 아니라 고정되어서 그 사모함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참된 영혼의 만족이 내 마음에 자리 잡을 때는 더 큰 은혜를 갈망하게 되고, 더 간절한 변화를 받고 싶어 하는 갈망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 주님 앞에 내 삶이 드려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이 혹 형식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영적 감각이 없어진 것은 아닌가를 돌아봅시다.

 

교회에서 봉사를 해도, 예배에 참석하도, 지체들을 섬기고 맡은 일에 적극 봉사를 하면서도 심령에 영적 즐거움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수고의 일들이 일찍 지치고 피곤해 지며 영적 권태기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이는 은혜를 사모하고, 영혼의 주림이 없는 외식적인 생활일 수 있습니다. 일단 행복의 보증수표인 영적 즐거움을 회복합시다.

 

탈무드에 있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경우에도 배움의 자세를 갖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행복은 감사와 정비례하며,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며,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며, 사람은 감사한 만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감사가 없는 마음은 지옥과 같고, 감사가 없는 가정은 메마른 광야와 같음을 기억하십시오. 혹 지식과 명예와 부를 많이 쌓아놓았습니까? 감사가 없으면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것은 감사는 행복의 원료이며, 풍요로운 삶의 재료이며,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고, 부족함이 있습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을뿐더러 약점과 부족함을 원망과 불평으로 채우는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나 약함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배움의 기회로 삼고 마음에 영적 주림으로 채우기를 원할 때 마침내 그 영혼에 행복이 찾아옵니다. 영국 격언에 지옥이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이고, 천국이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미국 LA에서 한국에서 이미 방영되었던 TV 연속 사극 한명회가 인기리에 방영되었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 그 드라마가 너무 재미있어서 기다리지 못하고 비디오 가게에 가서 비디오 4개를 빌려와 토요일 저녁부터 8시간을 연속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니 새벽 4시가 아닙니까? 주일을 맞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장로님이 주일 11시 예배시간에 기도를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장로님은 기도준비를 못해서 아차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11시가 되어 회중 앞에서 엄숙하게 기도를 시작 하는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성은(聖恩)이 망극하나이다.

 

우리교회는 다음주일 추수감사주일을 앞두고 하나님께 왜 감사를 하여야 하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뜨고 보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보면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감사의 거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금 번 추수감사주일에 하나님의 은혜에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라는 고백을 하면서 예물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 한 주간을 복되게 지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