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과거(79년 초) 전도사 시절 사천시 서포면 금진리 금진교회에 가서 설교하다 몹시도 당황한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오늘과 같은 본문을 읽고 앉은뱅이에 대한 설교를 한 참 하는데 예배 중에 제법 나이가 든 김차수 집사님이 갑자기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밖으로 나간 그분은 몹시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오늘 본문을 잘못 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밖으로 나간 김 집사님에게는 오늘 말씀이 걸림돌 되었는가? 라는 생각으로 힘들게 설교하고 있는데 조금 있다 그 김 집사님이 다시 들어오는 겁니다.
무척 반갑기도 했지만 내심 마음은 편치를 않은 가운데 설교를 마쳤습니다. 이제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에 앉아서 간식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제가 조심스럽게 김 집사님, 조금 전 예배 때 어디 갔다 왔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 예 전도사님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 갔다 왔지 뭡니까?
김삼일 가족 여러분 목사가 설교할 때 본문이나 그 내용이 혹 신체에 비교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경에 있는 기록이다 보니 거기에서 신령한 교훈을 찾기 위해 인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세상 기준으로는 행복의 조건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사람 즉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한 사람이 나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이런 장애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해를 더 잘하기 위해 좀 속된 말인 앉은뱅이라는 표현을 할 때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 사람은 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삶의 긍지나 보람도 없이 늘 남의 사랑을 구걸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앉은뱅이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아도 복된 요소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최고의 복된 날을 맞이합니다. 걷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복을 받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앉은뱅이 믿음에서 탈출합시다」로 정했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성전 곁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0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40세가 되기까지 앉은뱅이로 살아온 이 사람은 요즘으로 보면 중증장애인입니다. 사람으로서 정상의 생활 하기에는 좀 무리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사람이 부잣집에라도 태어났으면 그래도 괜찮을 터인데 하필이면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하루하루를 구걸해 먹고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앉은뱅이 신세도 서러운데 걸인의 처지입니다. 이 사람은 결국 성전 앞을 직장으로 삼고 걸인이 되었습니다. 이 걸인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이 미문(美門)입니다(02).
이런 명칭이 붙게 된 것은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 문보다 훨씬 뛰어난 고린도산 값진 황동으로 만든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화려한 문 앞에 40세 정도의(행 04:22) 초라한 장애자가 앉아서 구걸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곳에 앉아서 구걸합니까? 여기에는 구걸하는 자와 적선을 베푸는 자의 이익이 맞아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서는 구제하는 일을 매우 큰 덕목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성전에 올라오는 사람은 걸인에게 동전을 던져 줌으로 하나님의 상을 얻는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심리를 아는 걸인이 주로 성전이나 전각 입구에 앉아 구걸하며 지냈습니다. 따라서 걸인에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아오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이런 성전 문 앞이야말로 구걸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입니다.
유대인은 구제의 일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성전 문 앞에 걸인이 죽치고 있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이 걸인은 기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걸하기 위해서 성전 입구 미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이 끝나면 퇴근했다가 다음 날이면 출근하는 반복의 생활입니다.
이 걸인에게 지금 성전을 가까이함으로 행복의 길이 열리는 기회를 맞았습니다. 그것은 이 걸인이 구걸을 위해 성전 입구 미문에 앉아있을 때입니다. 마침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성전에 기도하러 가기 위해 이곳을 지나가는 중입니다. 성전 가까이 있다 보니 구원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은혜의 기회가 주어진 겁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01). 제 구시는 오후 3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단 06:11, 09:21).
경건한 유대인은 하루에 시간을 정해 놓고 세 번의 기도를 드리는 그 시간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이것은 구속력 있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의 관습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권장할 만한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아무턴 성전 가까이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전을 가까이하면 결국은 여러모로 유익하고 또 복을 받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한평생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삶을 복 중의 복 최고의 복으로 알았습니다.
시 128:0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성도는 어떤 경우이든지 가까이할 장소가 있고 가까이할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그런 곳을 잘 찾으면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러나 멀리해야 할 곳이나 멀리해야 할 사람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오히려 낭패와 실망을 당하기가 쉽습니다.
시 01:0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0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2. 베드로와 요한을 만남으로 걷게 되었습니다. |
0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0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인간관계에 있어서 만남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든 잘 만나면 복을 받을 것이고 잘 못 만나면 화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사는 동안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적어도 제가 말씀드리는 세 종류의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①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②스승을 잘 만나야 하고 ③배우자를 잘 만나야 한다. 또 남자는 세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어머니를, 둘째는 아내를, 셋째는 내비게이션 여자를.
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는 이 세 부류 외에 특별히 교회에서 믿음의 파트너를 잘 만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서로서로 잘 만나면 큰 복이고 잘못 만나면 큰 화를 입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이 못 걷게 된 사람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는 복을 받았습니다. 당시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은 주로 유대교 신자입니다. 이들은 못 걷게 된 이 사람을 보고는 좀 안 됐다는 연민의 정으로 동전 몇 개 정도 던져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앉은뱅이는 그런 것보다 더 크고 귀한 복을 받을 기회를 만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의 만남을 통해 영육 간의 모든 문제가 풀리는 기회입니다. 앉은뱅이와 두 사도의 만남, 물질을 주고받는 만남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는 구원의 통로와 만남입니다. 주님 안에서 만나 형제애를 이루어 가는 성도의 교제, 성도와 성도 사이에 이루어지는 만남과 교제야말로 은혜중의 은혜요 복 중의 복 아닙니까?
주님 안에서 성도의 만남을 코이노니아(교제)라고 부릅니다. 예수님도 육신의 형제를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신령한 형제애를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마 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성도와 성도의 만남, 그리고 신앙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가 힘을 실어주는 그런 만남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복 중의 복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좋은 만남을 자신의 세상 이권으로 이용하여 얼굴과 얼굴이 훼손되고 돈 잃고 사람 잃는 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도의 모든 교제를 행복으로 연결하여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한결같이 행복한 만남을 전제로 하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앉은뱅이 된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만남으로써 육신의 변화가 일어나고, 신령한 변화도 일어나서 참된 행복을 찾는 현장입니다.
우리가 지난 세월에서 좀 실수가 잦았을지라도 이제부터 살아갈 인생은 우선 나의 신앙을 잘 돌볼 수 있는 믿음의 파트너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생이 즐겁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되었습니다. |
0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베드로는 물질이 이 앉은뱅이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먼저 선언합니다. 앉은뱅이에게 은이나 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하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복음 전파의 차원에서 이런 선포를 합니다. 그러면 이어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입니다. 이 말은 앉은뱅이에게 분명히 어떤 기대를 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어서 계속 베드로는 선언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신 주님을 소개합니다. 최고의 보물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사도들은 이 이름을 간직하기 위하여 걸인이 구하던 세상의 보화를 내려놓았습니다.
막 10: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빌 03:0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여기서 이름으로. 이 표현 잘 주목해 봅시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본질, 인격의 존재를 반영해줍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나 신앙심을 가지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베푸심으로 그대를 일으킨다고 지금 선언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 지명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 01:46) 예수님 당시 나사렛은 아주 미천한 곳으로 간주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는 것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대망의 메시아라고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이 못 걷게 된 사람을 일으키는 기적을 베푸신다고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변에서 더러는 이 나사렛이란 말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주로 은사 집회 같은 곳에서 한결같이 전용어로 사용합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지요?
나싸~렛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나싸~렛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며 나사렛이란 말에 대단히 톤을 높이는데 꼭 은사 집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제 베드로가 못 걷게 된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걷기 시작합니다. 이제 다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일으킴을 받은 40세 정도 된 이 사람이 상대방의 동정심을 유발해 구걸만 하던 그의 입술을 열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껏 찬양을 부릅니다.
0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0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라는 부분입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 사람에게 꿈같은 놀라운 기적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러면 현실로 볼 때 무엇이 가장 우선순위이겠습니까? 당장 집으로 달려가야지요. 부모님께 아버지 어머니, 이제 제가 걷게 되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아닙니다. 구걸 안 해도 됩니다. 괄시 안 받아도 됩니다. 라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누가 특별 교육을 한 것도 아닌데 처음 걷는 걸음을 성전으로 향합니다. 이는 자신의 행복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 때 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시 100:0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앉은뱅이로 긴 세월 살아온 걸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 앉은뱅이에게서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신앙의 차원에서 앉은뱅이와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탈출해야지요. 우리 모두 믿음의 앉은뱅이에서 탈출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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