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3년 말씀

나도 믿음의 친구가 있습니까?(막 02:01~1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3. 3. 9.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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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올림픽(1964) 때 스타디움 확장을 위해 지은 지 3년 되는 집을 헐게 되었습니다. 인부들이 지붕을 벗기려는데 꼬리 쪽에 못이 박혀서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 한 마리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도마뱀이 살아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는 3년 전 인부들이 공사를 할 때 이 도마뱀에 못이 박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부들은 3년 동안이나 도마뱀이 못에 박혀 움직이지 못한 상태에서도 어떻게 살아남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그 원인을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즉시 사흘 동안 철거공사를 중단하고선 이 도마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지켜보는데 가만히 보니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하루에도 수차례의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입니다. 도대체 먹이를 날라다 주는 도마뱀이 못에 박힌 도마뱀과 어떤 사이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미와 새끼 사이일 수도 있고 한 부부 사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친구 사이일 수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3년 동안이나 못에 박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도마뱀을 다른 도마뱀이 살려낸 것입니다. 말 못하는 미물들의 세계에도 사랑을 주고받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들도 이와 같은 사랑과 마음가짐으로 교회를 섬기고 인간관계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을 가집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나도 믿음의 친구가 있습니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려 합니다.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한 중풍병자는 믿음의 친구가 있습니다.

 

0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 새.

 

언제부터인가는 알 수 없지만 사지(四肢)를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한 중풍병자, 사람의 의술로서는 한계에 봉착한 한 중풍병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만병의 의원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네 사람에 의해 침상에 뉘인 채로(05:18)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네 사람, 그들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잘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아마 그 중풍병자의 친구들이나 가족으로 봅니다. 어느 쪽이든 이 네 사람은 그 환자를 위해 아낌없는 헌신을 다하는 참된 의미의 동료요, 형제요, 친구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네 사람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메고 왔으니 환자는 한 사람인데 이에 관계된 사람은 네 사람, 이 얼마나 아름다운 협력의 조화입니까?

 

친구나 이웃을 잘 둔다는 것은 이래서 좋은 일입니다. 중풍병이 든 사람의 네 친구, 이들은 누구보다도 환자와 가까이 사는 이웃으로서 환자의 사정과 형편을 알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는가를 충분히 이해해 주는 친구들입니다. 이 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중풍병이 든 친구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 마침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앞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중풍병이 든 이 사람 정말 친구를 잘 두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소문을 들려준 것도 친구요 혼자 일어설 수 없는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도 친구들이니까요. 중풍병자를 향한 친구들의 우정이 어떠할까요? 아마 이렇게 표현했을 것 같아요? 이 봐 친구,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비롯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능력을 나타내셨대? 자네도 예수님을 만나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거야? 한 번 만나 보도록 하면 어떻겠니?

 

지금 중풍병자는 친구들의 권유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이 직접 제 눈으로 본 것이 아닌 하나의 소문이기 때문이죠.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누워 있는데, 내 병은 내가 아는데 나을 리가 없어 하고 친구들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친구의 권유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결단합니다.

그러자 친구들도 야, 우리 친구를 위해 예수님께 침상 채 들고 가자. 이렇게 해서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우정의 친구들입니까? 중풍병자 이 사람은 병석에 누워 있었지만 정말 좋은 친구를 두었습니다.

친구의 가치는 이런데서 빛이 나는 겁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친구, 정말 좋은 친구 아닙니까? 이제 네 친구들이 함께 메고 가겠다고 하니 순순히 따라 나서는 이 중풍병자도 상당히 마음이 열린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환자들은 대체로 고집이 좀 센 편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주변을 보면 가끔은 좋은 이웃이 아니라 나쁜 이웃도 있습니다. 특히 내가 안 좋은 일을 겪고 있을 때면 꼭 미혹하는 자가 찾아와서 자신들의 불순한 뜻을 오염시킵니다.

 

그래서 분별력이 중요한 겁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를 말고, 진리가 아니면 따르지를 맙시다. 덕 되는 일이 아니면 그 자리에서 자신을 멈출 줄도 알아야 하고요.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좋은 소식을 나누고 좋은 일거리를 봅시다. 그리하여 유익을 창출해 냅시다.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2.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때로는 물질의 손해도 따릅니다.

 

0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헌신적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중풍병자가 예수님이 계신 집에는 당도했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가기가 여간 쉽지를 않습니다. 아무도 길을 터 주지를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돌아가야 합니까? 이런 환경에서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비상수단인데 바깥 계단을 통해서 지붕 위로 올라가 그만 지붕을 뜯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전형적인 서민 주택은 보통 흙벽돌로 된 단층 슬래브 형으로서 지붕이 평평하며 방은 하나로 되어 있는 조그마한 형태입니다. 그래도 지붕을 뜯는 일이 그리 쉬운 일입니까? 하여튼 이들 친구 네 명이서 지붕을 완전히 뜯어내고는 예수님이 계신 방을 향하여 환자가 누운 침상 그대로를 달아 내리고 있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비상수단입니다. 이제 남의 지붕을 뚫었으니 도대체 어찌해야 합니까?

당연히 물어주어야 하죠. 마구잡이로 뚫어 놓고 나 몰라라 하고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법입니다. 결국은 그 뒤에 비용을 들여서 지붕을 수리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물질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물질적 보상을 각오하고 지붕을 뚫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지불해야 하는 희생과 손해는 조금도 개의치 않아야 하며 오직 예수님과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혹 그 액수가 백만 원이든 천만 원이든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갈 수만 있다면 물질적인 손해, 자존심과 명예의 손해, 사회적 지위에 대한 손해, 체면의 문제, 이 모든 것들을 과감히 던져 버릴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가끔 집이 너무 멀어서 새벽기도회에 나올 수 없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요. 물론 집이 교회와 가까우면 좋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고 그래도 잘 안되어 안타까우면 그 집을 팔고 교회 가까이로 이사 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목사님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이사를 하다니요. , 내가 주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지붕이라도 뚫어야 하고 남의 집이라도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굳이 지붕을 뚫어야 합니까? 사람들이 다 돌아갈 때까지 좀 기다리면 될 것 아닙니까? 꼭 오늘만 날입니까? 왜 이리 야단스럽게 지붕까지 뚫습니까?

 

물론 할 말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렇게까지 급한 일도 아니며, 중풍병자가 하루 이틀 병석에 누워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다 돌아간 다음까지 천천히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저녁이면 어떻고 다음 날이면 어떻습니까?

하루 이틀쯤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며 고치기만 한다면야 밤낮 주야로 죽치고 앉아 한 달이라도 기다릴 수 있지요. 아니 그 이상이라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의 지붕까지 뚫어 가며 요란스럽게 소란을 피울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중풍병자를 비롯한 다섯 사람은 지금 바로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순간의 일을 내일로 미루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생명에 관한 중요한 일은 지금 바로 해야지 하루 미루고 이틀 미루다 보면 의심이 생겨서 나중에는 예수님이 정말 병을 고치실 수 있을까? 라는 별 생각이 들고 또 헛소문도 돌고 돌아 이 사람도 결국에는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선행도, 은혜 받는 일도 오늘이 중요하며 즉각적으로 시행해야 합니다. 잠시 지났다가 하려고 하면 오히려 못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 친구들은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포착하고서는 망설일 필요 없이 비상적인 수단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3. 기적을 보는 일은 때로는 믿음의 협력자가 필요합니다.

 

0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내가 이웃을 돌아보고 친구를 돌아보는 입장입니까? 그러면 그들에다 내 이름을 붙이면 어떨까요? 일기의 믿음을 보시고. 좀 더 나아가 일기의 믿음의 그릇을 보시고 라고 표현한다면 더 좋은 해석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네 사람이 친구를 위한 믿음의 협력자 된 것입니다. 이들 네 사람은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이런 병, 저런 병, 경하니 중하니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고침 받을 줄 믿었습니다. , 합심 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주님은 언제든지 외면치 않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면서도 나아가지 않고 계속 망설이고 있지를 아니합니까? 그러나 이들 네 사람은 멀리 있으면서 주여 주여 한 것이 아닙니다. 환자의 형편이 너무 중하여 꼼짝할 수가 없으니 예수님께서 번거로우시지만 사례비를 드릴 테니 좀 와 주셨으면 합니다. 하면서 사람을 보낸 것도 아니고요.

 

간절히 소원하는 열망은 추상적인 신앙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행동하는 믿음, 그 믿음 안에 축복의 동력이 잠재해 있습니다. 오늘 이 네 사람은 한 마음으로 일치되어 예수님께 나아가는 진정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친구의 회복을 위하여 협력자가 되기를 믿음으로 굳게 다짐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병이 정말 나을 것인가 라는 의심의 마음으로는 그 분 앞에 가도 능력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협력자는 세상 줄을 끊고 담대히 예수님께 한 생명을 이끌어 갑니다.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0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합심된 믿음으로 도전하는 저들의 행위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들이 멀리서 힘들게 왔다는 것과 지붕을 뜯을 때의 주위가 시끄럽고 집이 부서지는 소리, 흙과 먼지가 집 안으로 쏟아지는 일로 인해 집회에 방해가 크게 되었지만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해 결코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분께서 이제 되었다. 내가 너희들 중심을 알고 있으니 그만하면 내가 다 알 수 있느니라. 하시며 중도에서 만류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왕이면 알아주시고 지붕도 뜯지 않게 하셨으면 더 좋았을 터인데 말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구의 병 고침을 위해 데리고 나아오는 이들의 희생적인 수고를 보기 원하셨으며 그리고 그 믿음의 행위를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모델로 소개하고자 함입니다. 문제의 해결점과 축복의 출발점이 어디입니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믿음의 협력자들에 있습니다. 나는 이웃을 위하여, 한 생명을 데려오기 위하여 얼마나 협력자로서 가치를 다합니까?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중풍병자 이 사람은 죄 때문에 이런 병을 만난 것 같습니다. 어떤 죄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죄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뇌가 터져 중풍병이 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05절에서 먼저 사죄의 선언을 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건강의 축복, 믿음의 축복 이 모두가 우선 사죄의 은총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그 사람의 심령의 문제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죄의 은총이 없이 육신의 건강만 주어진다면 오히려 더 큰 죄만 짓게 될 것 아닙니까?

 

사람이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 왔다고 해서 곧장 하늘 문이 열리고 축복이 쏟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죄의 은총이 임할 때 신령한 눈이 열리고 하늘 문도 열리는 기적이 입합니다. 이제 침상에 들려 왔다 고침 받은 이 사람이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침상을 스스로 둘러메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본 모든 사람들이 되어진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어떤 이적이든, 어떤 사건이든, 어떤 믿음이든, 어떤 간증이든 그 결과는 다 하나님께만 영광으로 돌아가야 하며 이것이 사람의 최종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신앙을 만병의 의원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한 번 진단해 보십시다. 그리고 고침 받아야 할 것은 고침 받읍시다. 예수님은 우리 곁에 늘 가까이 계시는데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의 지붕, 육욕의 지붕, 명예의 지붕, 권세의 지붕, 불신의 지붕 때문 아닙니까?

이것이 장애물이라면 제거합시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만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기필코 뚫어서 나의 생명의 주님을 만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