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미국의 기차 안에서 흑인 노예와 백인이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흑인 노예는 성질이 무척 난폭한 사람이었는데 그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던 백인이 칼을 꺼내들고 그의 가슴을 찌르려 손을 날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에 마침 옆에 앉아 있던 백인 목사님 한 분이 순간적으로 이 흑인 노예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어서 날아드는 칼을 막아냈습니다. 다행히 흑인의 가슴에는 칼이 꽂히지 않았지만 대신 그 목사님의 손은 큰 상처를 입고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그러자 흑인 노예는 자기가 칼에 맞았어야 했는데 자기 대신 상처를 입고 자신을 살려주신 목사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지 않습니까? 내가 어디를 가나 노예 생활을 하게 될 터인데 이왕이면 목사님을 모시고 일평생을 바쳐 충성하리라 다짐하고 목사님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이 흑인 노예는 목사님과 같이 살게 되었는데 그는 지금껏 인생을 거칠고 난폭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좀처럼 그런 옛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잘 순종하겠다고 하며 따라왔지만 자주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고집을 부리면서 목사님의 은혜를 잊고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럴 때면 그 목사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그에게 보여주십니다. 이 흑인 노예를 구하기 위해서 다친 손의 칼자국을 가만히 보여주면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면서 잘 순종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흑인 노예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죄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했는데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은혜를 따라 우리가 주님 앞에서 감격적인 생활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 흑인 노예처럼 은혜는 다 잊고 여전히 옛 사람의 모습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은 바로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고난의 길을 가셨는지를 성도 여러분과 살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당하신 육체의 고난입니다. |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고난을 좋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인성을 가졌기에 그러하셨겠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그 고난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길, 특히 십자가를 지심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대 사건이요 한편의 논픽션 드라마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예수님은 무죄하신 분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십자가, 십자가형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십자가형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편입니까? 본래 이 십자가형은 이란의 옛 왕국인 페르시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왜 페르시아에서 사람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죽이는 십자가형을 집행하였느냐 하면 일종의 종교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땅은 본래 신성한 것으로, 나쁜 죄인을 땅에다 놓고 죽이면 땅이 더러워지니 죄인의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공중에 매달린 시체는 치우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새들이 뜯어 먹도록 했으니 이 얼마나 끔찍한 방법입니까?
이보다 더 모진 형벌은 없을 것입니다. 최악의 죄인에게 내리는 가장 무서운 형벌이 십자가형이다 보니 잔인하기로 유명한 로마 군인들의 세계에서도 십자가만은 이야기하지 말자고 했다 합니다.
만일 황제가 식사할 때 누군가가 십자가 이야기를 했다가는 당장 끌어내어 매질을 할 정도로 십자가는 끔찍스러운 형벌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또한 로마인들에게는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았으나 식민지 국가에 대하여 죄인들을 처형시킬 때는 적용하였는데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후에 열두 제자들도 거의가 십자가형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는 과정을 보면 그야말로 극한 육체의 고난을 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목요일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혀 가야바의 뜰에 끌려와 밤새도록 심문을 받고 매를 맞으며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심지어는 그 집 가속들이 예수님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는 가운데 얼굴이 부어올랐고 수염도 뽑혔으며, 또 금요일 새벽에는 빌라도의 뜰로 끌려갔습니다. 이어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한 후 십자가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당시의 법은 십자가형을 받은 죄수는 사형장까지 자기가 달릴 십자가 나무를 직접 지고 가야만 했으므로 계속 폭행을 당한 주님으로서는 그 나무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결국은 지쳐 쓰러지자 그 자리에 구경을 나왔던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갔습니다.
눅 23: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예수님은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강도와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채찍은 태장과 같은 것으로서 다섯 줄기로 되어있고 그 끝에 쇠고리가 붙어 있었습니다. 한 번 채찍으로 치면 다섯 줄기의 상처가 몸에 파고들었을 것인데 예수님의 등은 얼마나 선혈이 낭자했겠습니까? 주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2. 예수님께서 당하신 정신적 고난입니다. |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하며.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할 것을 명령하자 수하의 군병들은 이후부터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며 능멸을 하기 시작합니다(막 15:16~20).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로마의 군병들이 입던 짧고 붉은 망토로서 예수님을 능멸하기 위하여 왕을 상징하는 옷으로 갈아입히고 있는 장면입니다.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당시 사용되던 로마의 화폐 주화에 Tiberius Caesar 황제의 면류관을 쓴 흉상과 그 면류관 위에는 못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 군병들은 그것을 생각하여 주변에서 자라는 가시로 엮은 관을 예수님의 머리 위에 씌웠는데 이로 인해 가시에 찢겨진 머리는 핏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주화에 새겨진 황제의 오른손에는 통치권의 상징인 황제의 지팡이가 쥐어져 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그것을 모방하여 예수님의 오른손에 갈대를 쥐게 하고는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모습을 취합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리에서 마치 자신들의 군주인 가이사 황제에게 경배하듯 예수님을 우롱적인 경배를 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 하고 행동을 합니다. 세상의 구세주이신 주님께서 하찮은 로마 군병들에게 치욕스러운 조롱을 당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견디기 힘든 정신적인 고통입니까?
특히 30절에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고 나옵니다. 그게 그렇게 아팠을까요? 육신적으로 아픈 건 아닙니다. 군병들로부터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해야 했고, 군병들이 입으로 유대인의 왕이여, 하며 조롱 할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처참하였겠습니까?
주님의 또 하나의 정신적 고통이라면 배반할 줄 알면서도 회개의 길을 계속 열어주고, 사랑을 베풀었던 가룟 유다로부터의 배신입니다. 배신의 아픔은 당한 사람만 압니다. 가룟 유다는 총명한 사람으로서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고 신뢰하여 돈궤를 맡겼는데 오히려 마지막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넘겼습니다. 그 일이 진행되기 전 주님께서 가룟 유다를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가룟 유다만이 배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힐 때 제자들 모두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고,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하는 곳이라면 죽음의 장소에도 같이 가겠다고 장담하였으나 잠시 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또 당시의 교권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가장 잘 믿는다고 위세를 부리던 그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일을 꾸몄고, 한 때는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은 숨어 지내다 그 군중 분위기에 휩싸여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눅 23:21) 외칩니다.
3. 예수님께서 당하신 영적 고난입니다. |
46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십자가의 죽음을 고난의 잔이라고 표현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일로 인해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는데 그러면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고난의 잔을 왜 가능하면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통이 극심한 것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신성과 함께 완전한 인성도 지니신 분이기 때문에 그 육체적 고통이 두려워서 피하려 함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할 고통과 죽음이 두려워서 잔을 옮겨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은 자기의 죄 때문에 고난 받지만, 주님은 죄가 없으면서 우리가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당하셨는데 이를 대속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사 53:0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0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심판을 담당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죄, 과거의 죄,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전부 지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당할 십자가 처형이라는 고통이 두려운 게 아니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상처를 입어서만이 아닙니다.비록 일시적이 되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하는 고통, 버림을 당함으로 영적 관계가 잠시 끊어져야 하는 그 영적 단절이 주님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아시시(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주의 페루자 현에 있는 도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뒤에, 모든 가산을 다 팔아서 구제 사업을 하고 일생을 주님을 위해 바친 유명한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를, 제가 죽기 전에 꼭 두 가지의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저로 하여금 육체와 영혼이 괴로움을 겪어 십자가를 체험하게 하옵시고, 둘째는 주님이 그토록 우리 죄인을 위하여 지불하셨던 그 뜨거운 사랑을 내 마음에 간직할 수 있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서 싫어 버림을 당하고, 갖은 멸시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보건대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품을 떠나 죄에 빠져서 죽음의 광야를 방황하며 지내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우리의 심령이 편했습니까? 다른 고통들은 감당할 수 있지만 영적 은혜와 교제가 단절되는 고통이 가장 힘든 부분일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목자의 품으로,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예수님께서 힘과 권세가 없어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게 아니라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우리의 허물 때문에 당하셨습니다.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어느 지방에 교회와 절간이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승려들도 지지 않으려고 불경을 외우는 목소리가 덩달아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주지승이 승려들을 모두다 모아놓고 이 중에 누가 대표로 교회에 가서 제발 좀 조용히 하라고 해라. 너무 시끄러워서 염불이 자꾸만 헷갈린다고 해라. 누가 좀 빨리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교회에 가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 것이냐? 하자 한 동자승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주지 스님, 제가 대신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십자가는 기독교 용어요, 기독교의 상징이었으나 그런데 이제는 정치인, 조폭, 심지어는 절간에서도 십자가를 들먹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그 분 앞에 우리의 모든 부분들을 드리면서 이제부터 더욱 감사하면서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이 넘치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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