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봄, 미국 덴버에 있는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학생 총격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학생 2명이 학교에서 자기들을 왕따 시킨 친구들에게 잔인하게 복수를 한 사건이었는데 그 사건으로 학생 12명과 선생님 그리고 총을 쏜 학생 2명이 함께 죽었습니다.
그때 한 범인이 캐시라는 여학생에게 총을 겨누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느냐? 그 순간에 믿지 않아 라고 말하면 살 수 있었지만 그래 믿어.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범인은 총부리를 더 가까이 겨누면서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은 없어. 아냐 있어. 너도 믿어야 돼.
곧 이어 캐시는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의 크리스천 십대들이 캐시 버넬 T셔츠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그 T셔츠에는 그래 믿어(Yes, I believe in God)라는 캐시의 고백이 쓰여 있습니다.
그 T셔츠를 입고 소년소녀들이 전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자 그 상황을 미국의 한 신문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캐시가 미국 교회에 불을 질렀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이란 부활절로 부터 역산하여 주일 6일을 뺀 40일 기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을 기억하고 하루하루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지내는 절기를 말합니다.
즉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기간입니다. 이 사순절을 뜻 깊게 지키는 것은 내가 구원의 확신 속에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사람의 구원 얻는 길이 무엇인지, 구원을 받은 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지를 강론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은혜 받기를 축복합니다.
1. 나는 구원의 길을 알고 있습니까? |
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구원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구원이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공부를 많이 하여 세상 지식을 쌓고, 도덕적인 삶을 깨끗하게 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행 0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만일 사람이 구원을 위하여 그 대가를 치른다고 합시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사람의 노력에 의하여, 사람의 행동 여하에 따라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구원 받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참으로 큰 은혜입니다(엡 02:08).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나의 주님이 되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믿는 순간부터 예수님을 나의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들인다는 뜻이요,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도록 나를 비워드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데는 많은 희생과, 내려놓음과, 헌신이 요구되는 줄 아시지요. 만일 주님을 위하여 나를 비우지 않으면 주님은 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과거를 아시고, 나의 현재를 아시고, 나의 미래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 분에게 내가 무엇을 숨기고, 내가 무엇을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아집을 포기하고 내 모든 전부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에 더욱 구원자 되신 주님께 내 인생 전부를 맡겨야 합니다. 구원의 대상은 구별도 제한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부르고 고백하면 그것으로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이 안다고 할 때 앎은 성경이 기록 될 당시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70인 역) 하나님을 퀴리오스(주님)라고 번역했는데 이 퀴리오스가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인 칭호였습니다.
로마 황제 앞에서 관료들이나 군인들이 절대 충성을 맹세할 때 황제는 나의 주님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당시의 로마 문화권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제부터는 로마 황제가 주님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분이 나의 주인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그럴듯하게 예수님을 설명하면서 정작 자신에게는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다 같이 이렇게 고백하여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이렇게 떳떳한 고백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2. 나는 입으로 시인하는 믿음입니까? |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믿음은 마음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고백되는 믿음이 가치가 있는 산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개인적인 동의의 차원을 넘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을 말합니다.
내가 믿는 믿음을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과 두려움 없이 시인할 때에 구원이 완성되며 마음에도 없는 신앙을 입으로 말하는 것은 위선이요 거짓에 불과합니다.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지 않고 시인하지 않는 믿음은 불안전한 믿음일 수밖에 없고, 고백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시인할 수 있는 믿음은 영원한 축복이되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시인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입니다. 제가 목사이다 보니 여러분 보다는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의 현장에 자주 있게 됩니다.
또 사람은 임종 직전엔 주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제대로 못합니다. 불신자의 임종 때는 시간을 아끼면서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시겠습니까? 하면서 성경 한 두 구절 정도로(요 01:12, 롬 10:13) 예수님을 시인하는 영접을 시키고 손을 얹어 기도하면 됩니다.
그런데 복잡한 대답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구원받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갈보리산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사흘 만에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등. 지금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람에게 아주 복잡하게 대화를 하는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핵심 아닌 것으로 귀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숨을 몰아쉬지 않거든 좀 길게 대화하십시오,
또 어떤 분은 요. 엄마 정신 차려. 아니 정신 차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있습니까? 이모님 내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그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누워있는 분이 대답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고개라도 끄덕일 수 있도록 간단하게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 한마디를 시인하고 사자의 밥이 되었고, 돌에 맞아 죽었으며, 달리는 말에 사지가 찢겨 죽어 갔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마음껏 고백하고 찬송하기 위해서 카타콤에 숨어 햇빛을 보지 않고도 살았습니다. 육신은 병이 들고 수명은 절반으로 줄어들어도 예수님을 믿고 시인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그 신앙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기쁨으로 그 길을 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은 내적인 것일 뿐 아니라 공개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앞에서 공개적으로 믿음을 고백합니다. 특별히 세례를 베풀거나 임직식을 할 때 공개적인 서약을 하는 것은 그 시인을 통해서 믿음의 각오가 더욱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배의 모임을 가질 때마다, 꼭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도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을 더욱 인정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교회 안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드러내어야 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심을 고백하면서 전적으로 그분의 소유임을 나타내어야 하며 입으로 시인하는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요즘 들어서는 믿는지 안 믿는지를 잘 모르는 정체불명의 교인들이 늘어갑니다. 예배 때 보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면서 찬송도 립싱크 가수처럼 입만 벌리지 소리가 전혀 안 나옵니다. 말씀에 대한 아멘도 없습니다. 그러려면 예배의 자리에 무엇 하러 나옵니까? 목사 힘 빠지고, 옆에 있는 성도들 힘 빠져요. 도무지 시인을 하지 않는 그런 분들을 UFO(미확인 비행물체) 교인이라 부릅니다. 교인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3. 나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입니까? |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하필이면 왜 발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했을까요? 전도지를 들고 오늘은 이 마을 내일은 저 마을로 전도를 해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며 뛰어다닌 경험이 있습니까?
그러면 발이 퉁퉁 붙고 아파서 절뚝거리며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수고한 사람, 복음을 위해서 아파 본 사람이 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복음 때문에 고생을 해 본 사람, 고통을 나눠본 사람이 복이 있으며, 전도지를 들고 이 골목 저 골목 뛰어다닌 그 손이 복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D. L. 무디. 전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한 사람은 단순히 혼자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 비해 백 명, 이백 명 만큼의 가치가 있다.
믿음의 사람은 전도에 대한 환상과 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은 거저 받았지 않습니까? 은혜로 받았으며, 예수를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보상은 내가 교회를 어떻게 섬겼는지, 내가 복음의 열정으로 어떻게 헌신을 하였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복음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까? 교회를 어떻게 더 잘 섬겨야 되겠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전도와 봉사와 섬기는 일은 성도의 의무요, 특권인줄 아십시오. 간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경기도 교하지구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간 집사님 한분이 있었는데 이 분이 작은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이 집사님은 늘 새집만 찾아다녔는데 서울 이촌동에 살다가 일산으로 이사를 했고, 또 화정으로 이사를 했는가 하면, 탄현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가 다섯 번째로 교하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심방을 오신 목사님께서 이사를 자주 한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새집이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이때 집사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대답을 합니다. 목사님, 집이야 이 동네 사나 저 동네 사나 마찬가지지요. 새집에 들어가서 살아보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전학을 할 때마다 적응 하는 게 보통 고통이 아니고 남편의 직장이 멀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있습니다. 새 아파트로 이사한 사람들은 마음에 변화가 옵니다. 이제 종교를 가져볼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엉터리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이제 제대로 믿어봐야지 하고 생각을 합니다. 아니면 종교를 바꿔 볼까? 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나면 이사람 저사람 만날 수 있고, 전도 못하는 나 같은 사람도 전도할 수 있는 기쁨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나는 전도하기 위해서 이사를 합니다.
집사님의 말을 들은 목사님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감동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가 연약한 줄 알고 불같은 여종을 보내주시는 군요. 이 목자의 가슴이 냉랭하게 식어진 줄 알고 하늘의 불덩어리를 내게 보내주셨군요. 이 여종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성령의 불길이, 이 종의 가슴에 옮겨 붙고 우리 성도들의 심령을 태우기를 원합니다. 이제 이 여종을 통하여 우리교회를 주님께서 쓰실 줄로 믿습니다.
나의 가슴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까?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이 계속 불타오릅니까? 썩은 새끼줄 같은 세상만 붙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망이 있습니까?
나에게 전도의 은사는 있는지 모르지만 전도의 의무는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나와 함께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내 가슴에 복음 전도의 열정이 있습니까? 정말 구원받은 성도입니까?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최후의 심판이 있는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정말 행복합니까? 누구를 만나든 예수님을 전해야겠다는 열망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사람의 신경조직 가운데는 중추신경이 있어서 이것이 사람의 모든 생각을 몸 전체에 전달합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신경조직이 일을 합니다. 아, 피곤하다고 말을 하면 신경조직은 주인께서 피곤하다 하신다. 모두 다 피곤할 준비를 해라. 그래서 피곤해져 버립니다.
아, 기분 좋다고 말하면 주인이 기분 좋단다. 모두 기분 좋은 준비를 해라 하고 받쳐줍니다. 내일 아침 새벽기도를 꼭 가야 되겠다. 그러면 신경조직은 주인이 내일 아침 4시에 일어나야 된단다. 긴장하고 준비해라. 그런데 새벽에 가봐야 알지. 그러면 새벽까지 가봐야 안단다. 기다려라 합니다. 또 헌금내기 아깝다. 그러면 모든 돈을 감춰라. 그래서 안 하게 됩니다. 사람은 말하고 생각하는 대로 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으리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 단다. 구원받을 준비를 하라. 듣는 자들이 이렇게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대하여 모르는 것 셋, 아는 것 셋이 있다고 합니다. 모르는 것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어디서 죽을지 모릅니다.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그 다음 아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죽습니다. 그 길은 누구도 함께 가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에너지를 주님께 드립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는 담대함을 가지고 삽시다. 교회를 나서기만 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입에 달고 다니십시오. 직분자답게 말입니다. 직분에 먹칠을 하지 마십시오. 나의 주님이신 그 분만 섬기고, 자랑하고, 고백 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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