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복숭아 재배자로 입신하려는 꿈을 안고 복숭아 과수원을 매입했습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자신의 정열을 다하여 일했는데 정말 모든 것이 다 잘되어 가는 듯 하므로 이제 청년은 자신 만만해졌습니다.
나무마다 탐스러운 복숭아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하자 하나님은 과연 내 편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태풍이 불어와 그 동안의 모든 정성이 물거품 되는 참담함을 맞았습니다. 충격을 받은 청년은 그 이후로 삼 주간을 교회에 나가지 않았는데 기다리다 지친 목사님이 청년을 찾아와 교회를 나오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투덜거리며 대답하기를,
저는 앞으로도 계속 교회에 나가지 않겠습니다. 목사님, 애써 키운 복숭아들을 큰 태풍으로 모조리 낙과시킬 정도로 가혹하신 하나님을 제가 계속 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나이가 지긋하신 목사님은 몇 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청년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네 복숭아보다 자네 자신을 더 사랑하신 다네. 물론 그 분은 태풍을 맞지 않아야 복숭아들이 잘 자란다는 것도 알고 계시지. 하지만 태풍 없이는 인간이 훌륭하게 성장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계신다네. 그 분의 관심은 사람을 키우는데 있지 복숭아를 키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여러분, 인생 문제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주제 중의 하나가 무엇일까요? 각자의 삶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고난이라는 풍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이 겪는 고난과 풍파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다루기가 힘들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는 게 고난 아닙니까?
고난을 누가 좋아하겠으며, 누가 피할 수 있겠으며, 누가 당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저자는 자신이 당한 고난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는데 먼저 그는 그가 당한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자신의 인생이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 라고 까지 표현을 합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중 일부는 고난의 한 중앙에 서 있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살피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는 귀한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성도의 고난은 인생길의 동행자입니다. |
시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원치 않는 일을 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말입니다. 이런 원하지 않는 일을 만나고보면 사람들이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또는 아예 신앙생활을 접고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교회 나오면 행복해 진다. 시련과 고난이 싹 물러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믿음의 출발을 하였는데 해결은 고사하고 찾아오는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예, 예수님을 믿으면 시련과 고난이 물러가고 또 풀기 어려운 문제도 당장 해결되는 때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날마다 우리에게 나타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운수대통 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가정이나 사업에도 환난과 시련 그리고 역경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면 에이, 예수를 믿어도 별 수 없네 하면서 실족의 길로 갑니다.
성도 여러분, 신불신간에 고난은 우리 곁에 항상 머물고 있는 친구임을 늘 기억하십시오. 욥기를 통한 고난의 설명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난이나 시련은 우리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는 필연적인 동행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욥 05:07) 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이 세상을 고난 없이 살아가는 인생, 고난에서 제외되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인생길의 친구인 고난, 그 고난이 나와 함께하는 동행자라면 이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도 반드시 있을 것임을 믿으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당하는 고난을 놓고 누구누구 때문에 하면서 그 까닭을 남에게 돌리면서 사람을 원망하기를 잘합니다. 혹은 운이 안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하여 운수 타령도 하는데 이런 발상들은 신앙인의 태도는 아닙니다.
우리는 고난을 주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 목적도 바로 알아서 고난을 주신 그분의 목적대로 우리의 신앙 인격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롬 0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이해되지 않는 고난은 있어도 이유 없는 고난은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목적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고난 속에 거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되자는 말입니다.
퇴역 군인들 중심으로 만들어진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6)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중 헤롤드 러셀이라는 공수대원이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어 불구자가 되어 심한 좌절감과 불평, 불만, 원망에 빠지는 내용입니다.
러셀은 나는 이제 쓸모없는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되었구나. 라는 좌절감에 빠져있는 가운데 차츰 마음의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도 잃은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지 않느냐? 라는 생각이 들면서 원망이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의사가 그에게 의수를 만들어 주자 그것으로 글을 쓰고 타이프도 치기 시작했으며, 그의 집념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로 제작되어 직접 장애자의 모습으로 출연까지 합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연기를 한 결과 그 해 이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탔는데 부상으로 받은 상금은 상이용사를 위해 기꺼이 기부하였습니다. 어떤 기자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의 신체적인 조건이 당신을 절망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결연히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만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잃은 것의 열 배를 보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고난의 돌파구는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
83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여러분은 83절의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다는 말이 이해가 잘 됩니까? 우리의 문화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엔 좀 난해한 것 같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항상 그 시대의 정치, 문화, 경제 배경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데 제대로 이해하려면 근 3천 년 전의 이스라엘 문화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옛날에는 유리병이나 도자기 같은 용기들이 없던 때입니다. 땅도 대부분 사막이다 보니 도자기를 만들 찰흙도 거의 없고요. 그래서 물병을 만들려면 짐승을 잡고 벗겨낸 그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가령 짐승의 다리 부분을 벗겨서 말려 그 밑 부분을 꼭 묶고 주둥이를 만들어 물을 부으면 물 부대 즉 병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는 부엌에 매달아 놓는데, 사용하지 않고 계속 매달아 놓으면 부엌에서 매일 불을 떼니 연기가 가득하고 그을음이 끼게 됩니다. 이 가죽 부대 안에도 연기가 가득 차겠지요. 그 상태로 1,2년 정도 방치하면 가죽 병은 연기에 완전히 절여져서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게 됩니다. 물을 넣었다가 마시려고 해도 그 연기 냄새가 심해서 물을 도무지 마실 수가 없을 것이고요.
83절은 저자가 자기의 몸을 연기에 절인 가죽 부대와 같이 되었다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당면한 육체의 극심한 고난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자신의 몸이 너무도 지쳐 있어서 자기가 보기에도 마치 쭈그러든 가죽 부대처럼 볼품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중에도 예기치 않는 고난과 시련이 다가오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아주 많이요. 남편이나 아내로부터의 고난, 집안사람으로부터의 고난, 주위 사람으로부터의 고난, 사업이나 경제 문제로부터의 고난 등 말입니다. 이런 고난들이 통 끊어질 줄을 모를 때 우리가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고난의 시간들은 계속 됨에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우리는 고민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당하는 고난이 육체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다행입니다만 육체의 고난 뒤에는 거의 영적인 고난도 따른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기서 저자의 고난을 한번 짐작해 볼까요? 그의 고난은 육체의 고난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고난까지 당함으로 인해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82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84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
이렇게 영육간의 고난에 처할 때 저자는 하나님, 언제까지 제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저는 선을 행하고 저 사람들은 악을 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데 왜 저들을 심판하지 않는 겁니까? 이런 절규가 어쩌면 우리의 절규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말씀 안에서 이 고난의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83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87 ….나는 주의 법도들을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시 119:95 악인들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나이다.
원수들의 핍박이 하도 심하다 보니 한 순간 자신도 신앙의 갈등을 겪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므로 인해 다시 믿음의 자리에 굳게 섭니다. 이런 고백을 보면 저자는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바로 세워져 있었으며, 또 말씀을 붙잡고 생활했던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사람들이며, 비록 열심이 좀 약해도 말씀 위에 뿌리가 내려져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를 않는 법입니다.
3. 고난을 만날 때 원망의 자리에 들지 마십시오. |
욥 0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인생의 고난 하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나름대로 할 말이 있겠지요. 그러나 자기에게는 큰 고난의 순간이겠지만 남이 볼 때는 별 것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인 누구나 다 공감하는 고난의 인물이라면 아무래도 구약시대의 요셉이나 욥 정도를 떠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욥이라는 인물, 그가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처신을 하였는지를 조금 전에 같이 읽었습니다.
욥의 고난을 볼까요? 그는 하루아침에 10명의 자녀를 잃었고, 많은 재산을 다 잃었으며, 건강도 잃었고(욥 01~02장) 마지막 보루인 부인까지도 위로보다 악담을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원망하고 악담하는 아내를 향하여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불평과 원망은 내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을뿐더러 마귀가 가져다주는 신앙생활의 독소 아닙니까? 신앙생활에 악 영향을 끼치는 말은 되도록이면 듣지 않도록 힘씀이 내게 복 아닐까요? 듣다보면 어느새 그 말이 내 마음에 자리를 잡고, 그 말에 내가 동조를 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는 서서히 상실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합니까? 이럴 때는 상대가 이 말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일의 근원을 자세히 알아보고 믿음으로 하는 말인가?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는 말인가? 상대의 인격이나 신앙을 깨뜨리려고 하는 말인가? 혹 공동체를 해치려고 하는 말인가? 그 사람이 과연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가? 악한 의도로 하는가? 아니면 선한 의도로 하는가를 진단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시 56편을 읽어보시면 다윗은 고난과 고통의 현장에서 흘린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신이 쓰라린 눈물을 기억해 달라는 기도이지요.
고대에는 눈물을 신성시 여겨 병에 담았는데 이것을 눈물 병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방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었다가 당사자가 죽을 때는 부장품으로 무덤에 같이 묻기도 하였습니다.
시 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성도 여러분, 이미 만난 고난입니까? 이로 인해 눈물이 계속 흐릅니까? 그러면 받아들여서 적응하시고 원망의 자리로 가지 마십시오. 다만 눈물은 하나님께 보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의미한 고난당함을 허락치를 않으며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서 우리의 불신을 깨뜨리기 위한 일을 하실 때가 더 많습니다. 믿음생활은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라가는 안락한 생활이 아니라 힘들게 올라가는 등산과도 같습니다.
믿음의 자리에서 고난을 능히 감당하시고 눈물은 병에 담아 하나님께 보이십시오. 하나님께서 실패를 통해 쉬게 하시고, 질병을 통해 쉬게 하시고, 역경과 시련을 통해 쉬게 하시고, 갈등을 통해 쉬게 하시고, 큰 장애물을 통해서 자신을 점검하라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사람들은 더러는 고난의 문제를 놓고 믿음과 결부시켜 이야기를 합니다. 믿음이 좋으면 고난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도로 말예요. 그래서 아니 저 사람, 고난당하는 것 보니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나 봐, 교통사고 난 것 봐, 병에 걸린 것 봐, 사업이 망하잖아, 하나님이 치시는 거야 등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 된 발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난을 당합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도 얼마든지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시 119:71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107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운행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잠시 쉬어야 하고, 어디에서 마쳐야 할 줄을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적절한 때에 쉼표를 찍어주시고 적절한 때에 마침표를 찍어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한 가지 기억하십시오. 쉼표는 마침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정한 시간표를 따라 마침표를 찍어주셔야만 비로소 모든 것들이 종결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의 고난의 현장, 실패의 현장, 아픔의 현장에 하나님의 마침표가 찍혀지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고난에서 행복의 주인공으로 나아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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