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1년 말씀

당신은 예수님 안에서 오늘의 사람입니까?(엡 02:01~13)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1. 10. 1.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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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탈리아 플로렌스에 큰 홍수가 나서 르네상스의 찬란한 문화재들이 유실되고 또 침수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 침수되어 그 본 모습을 잃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서 그린 13명의 인물 중 가룟 유다의 모습은 실로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가룟 유다는 오른손에 돈주머니를 굳게 틀어잡은 대신 예수님이 주신 만찬의 잔은 엎질러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진리와 양심과 인격의 잔을 엎질러 버린 자는 그 누구나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다빈치가 그린 그림은 플로렌스의 부호이며 당시 전 유럽의 재계를 한 손에 쥐고 움직이던 로렌쪼 메디치 가의 가정 성당인 그라체 성당의 오노푸리오 수도원 식당에 걸기 위함입니다.

메디치 일가는 매일 이 성당에 출입했고 수도원 식당에도 자주 들렀을 것인데 다빈치는 이 그림을 통하여 당시의 재벌인 메디치 일가에게 엄숙한 설교를 한 셈입니다. 메디치 당신이 만일 재물에 눈이 어두워 인간의 양심과 인격과 신앙을 저버린다면 바로 너는 가룟 유다가 되느니라. 이런 뜻이겠지요?
메디치 일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하여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당대의 예술가와 무수한 학자들이 그들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 뒷받침을 잘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룟 유다의 어제의 모습과 오늘의 모습, 로렌쪼 메디치의 어제의 모습과 오늘의 모습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비교해 보면 각자가 서로 상반된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제까지는 좋았지만 오늘에는 실패한 사람이고
, 로렌쪼 메디치는 어제는 실패하였지만 오늘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중요하며, 어제가 좋았다면 오늘은 더 좋아야 할 것 아닙니까?
어제까지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오늘부터 믿음의 인생을 살아간다면 이 역시 성공적인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제의 사람을 옛 사람 즉 예수님 밖의 사람으로, 오늘의 사람을 믿음의 사람 축복의 사람으로 규정하고 말씀을 강론하려 합니다. 은혜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1. 당신은 예수님을 모르는 어제의 사람입니까?


0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습은 아집과 자랑과 교만으로 가득 찬 생활이었습니다. 그가 주님 밖에서 유대교의 신분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아무라도 갖지 못하는 특권 의식의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출신 성분부터 그러했고, 사회적 신분에서 그러했고, 교육과정에서 그러했고, 유대인의 전통에서 그러했는데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유대교적 신분을 늘 자랑하였습니다.


03:0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0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며(17:12; 12:03),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는 성인이 되어서도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16:03).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생후 팔 일 만에 받는 이 할례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는데 바울 자신도 그런 자부심 속에서 살고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이스라엘은 야곱이 얍복강 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32:22~28) 얻은 언약의 백성임을 지칭하는 말 아닙니까? 바울은 이 말에서 자신은 이방인에서 개종한 사람이 아니라 순수한 이스라엘 태생으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권리와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베냐민의 지파요. 베냐민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였던 아내 라헬의 소생으로서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울이 이 지파였습니다(삼상 09:01,02). 또한 베냐민 지파는 왕국이 분열 될 때 다윗 왕조에 신실하게 충성하였으며, 바벨론 포로 때에는 성전 건축을 위해 유다, 레위 지파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왔었는데(11:07~09) 바울은 이런 베냐민 지파에 속한 것을 매우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11:01).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울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이방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히브리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밝힙니다. 그는 유대인 방식과 히브리말로 양육을 받았기에(22:02,03) 혈통은 물론 히브리어와 히브리 관습을 그대로 보존한 순수한 히브리인임을 나타냅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리새파는 가장 엄격한 유대 종파로서 구약의 율법은 물론 구전이나 서기관이 해석한 전승을 연구하며 따르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나(23:06) 바리새파에 입문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존경받는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우고 지켰습니다(22:03).

그뿐만 아니라 자기는 본토 유대인이 아니라 해외 유대인(디아스포라)으로서 당시의 길리기아 다소의 유명한 대학에서 헬라철학과 수사학을 공부하였음을 퍽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또한 당시에 누구나 가질 수 없었던 대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음도 자랑하였는데 한 마디로 바울은 세상 면과 유대교 입장에서는 온갖 자랑거리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03,12절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이 본서를 받았던 에베소교인이나 자신도 다 한때는 그리스도 밖에 머물든 자라고 밝힙니다.


0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어제의 사람의 특징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요? 옛 사람입니다. 사람은 신분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는 줄 아시죠? 죄수로 있을 때는 죄수복을 입고, 형기를 마치면 자유인의 옷을 입고, 경찰이 되면 경찰 옷을 입고, 군인이 되면 군인 옷을 입고 회사원은 사원 복을 입습니다. 변화가 되지 못한 사람, 거듭나지 못한 어제의 사람은 계속 옛 습관의 옷, 어제의 옷을 벗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제가 좀 천박한 예화를 들겠으니 이해하면서 들으십시오. 어릴 때 아주 욕을 잘하는 가정에서 자란 남자와 여자가 있었습니다. 서로 어떻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이도 하나 낳았습니다.
마침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되었으나 싸우고 욕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아이가 보는 앞에서도 자주 싸웁니다.싸울 때마다 남편은 이년 하고 아내는 이놈 합니다. 어느 날 싸움을 지켜보던 아이가 아빠에게 이년이 무슨 말이야? 라고 물었습니다
.
갑작스런 질문에 아빠는 응, , 그게 어른들이 여자를 부를 때 하는 소리야. 라고 궁색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아이는 엄마에게도 엄마, 이놈은 무슨 말이야? 라고 묻자 엄마도 역시 당황해서 그러니까 그게 어른들이 남자를 부를 때 하는 소리란다. 라고 했습니다
.

이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갔는데 할머니도 욕을 상당히 잘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할머니에게 할머니, 아빠 엄마가 이년, 이놈 그랬어요. 그러자 할머니가 듣고는 지랄들 하고 자빠졌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이가 할머니, 지랄들 하고 자빠졌네. 가 무슨 말이야? 할머니 역시 아이의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여 으~~, 그게 말이지 잘했다고 박수 친다는 소리란다. 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갔는데 마침 재롱잔치 사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재롱잔치가 다 끝난 후 단상에 올라온 이이는 꾸벅 절을 하고는 또랑또랑한 말로 이렇게 외칩니다. 이 자리 오신 모든 연, 놈들 다함께 지랄하고 자빠집시다.


이 아이의 집안사람의 요소가 바로 어제 사람의 모습입니다
. 사고가 변화되지 못한 옛 사람, 아직도 이런 쓴 뿌리의 요소가 나를 흔들고 있습니까? 생각은 행동을 만들고,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모이면 인생이 됩니다. 어제의 사람이 계속 나를 찾아와서 함께 지내자고 할 때 과감히 떨쳐버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2. 당신은 예수님을 아는 오늘의 사람입니까?


0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바울은 03절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먼저 밝히고 다음에 예수님을 믿은 후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 어제의 사람에 대하여는 세상에서는 아예 소망이 없는 자라고 규정합니다(12).

 

반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쏟아주신다는 약속도 있음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느냐? 못 들어오느냐에 따라 축복의 문제가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잘나고 자신 만만해도 예수님 밖에 사람, 어제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 아닙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많은 축복의 약속들을 소개합니다만 그러나 그 약속들은 오직 예수님 안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밖에서 방황하는 생활이라면 무슨 소망이 있겠으며? 무슨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다 헛되고 헛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 밖에서 가꾸고 누렸던 그 복이 참 된 복이었습니까? 그 복이 나를 평안하게 하였습니까? 세상 말로 좀 잘 나간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잘 나가는 요소들이 나에게 쾌락이 아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영원한 소망인줄 믿고 나의 인생을 투자할 만큼 그렇게 가치가 있었습니까? 아니지요. 바울은 빌 03:07~09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03:0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0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바울은 자신이 세상에서 기득권과 장점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안에 들어와 보니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축복에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이는 오히려 불필요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버려야지요.

그래서 바울은 세상의 온갖 장점이라도 예수님 안에서 보니 배설물처럼 보였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의 삶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자랑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던 그가 이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다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사람이 달라져도 그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싶으리만큼 변했는데 이런 변화를 일컬어 거듭남의 역사라고 합니다. 바울의 변화된 모습을 성경에서 볼까요?

 

갈 06: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달으면서 세상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 나는 얼마나, 어떻게 변화되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비하여 얼마나 겸손해졌습니까?
나는 혈육에 속한 탐심들을 얼마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나는 나의 자랑거리로 여겼던 과거의 장점들을 주님을 위하여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까?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진행하는 동안 그가 일관성 있게 활용한 화두는 변화(change)였습니다. 그는 국민들의 이런 변화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한 새 시대의 리더로 선택될 수 있었는데 선거 캠페인 동안 사용한 문장 중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문구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변화에 굶주려 있습니다.(We are hungry for change)

우리는 변화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We are ready to change)

,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Yes we can)

, 우리는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Yes we can change)

 

그는 투표에서 그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그의 당선 스피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의 승리 그 자체가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는 아닙니다. 오늘의 승리는 우리에게 변화의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우리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여러분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함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성경에 피라는 말이 무려 418번이나 사용되고 있는데 그만큼 피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으므로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고 위로하면서 믿음의 동반자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니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교제를 잘 이루어 가야 할 책임도 있는 줄 아십시오. 계속 옛사람, 어제의 사람으로서의 신앙의 목적과 신앙의 초점과 신앙의 방향감각이 없는 스타일로 살려고 합니까?
옛사람, 어제의 사람을 지배하는 삶의 원리는 하나님 이어야지 사람의 욕심이어서는 안 됩니다. 욕심이란 인간이 양심이나 이성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본능에 지배를 받을 때 생기는 탐욕으로서 이 탐욕이 이성을 침묵시키고, 양심을 잠재우고, 하나님의 소리를 무시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를 합니다.

 

0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