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1년 말씀

이제 서로 종노릇 합시다.(갈 05:01,13~1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1. 7. 3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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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통틀어 로마 제국(B. C 27~A. D 476) 시대에 가장 많은 종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숫자가 무려 육천 만 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종과 자유인의 비율은 41로서 자유인 한 사람 당 종을 평균 4명씩이나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종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으며 주인의 허락 없이는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주인이 짝지어 주는 대로 결혼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결혼하여 잘 사는데도 주인이 이혼하라고 하면 이혼도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만큼 주인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로서 주인은 마음대로 종들을 희롱할 수 있었고 종들은 주인의 갖은 학대와 힘든 노역에도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제국 당시 최대의 행운은 종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최고의 행복은 종의 생활을 하던 자가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전해지는 유대인들 남자 기도문 중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께 다음 세 가지의 감사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나를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종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0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사도 바울이 주인 되신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외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을 섬기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행복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종이라 해서 종노릇하는 것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종이 되어 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현장에서 우리는 하나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끼리 자유인과 종이라는 구분을 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 주는 형제로서의 사랑의 종노릇을 합시다. 라고 외칠 때 종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기뻐했다고 합니다.

 


 1. 누구의 종노릇을 해야 합니까?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우리는 먼저 무엇에서 자유 함을 얻었습니까? 죄에서 자유, 사탄의 지배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자유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이 자유가 무엇을 위해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사용될 것인가? 라는 목표가 분명하지 못하면 주어진 자유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을 맞고야 말 것입니다.

01절에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던 바울이 13절에서는 다시 종노릇을 하라고 권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유에 따르는 세상적 위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자유를 얻었으므로 이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기회를 삼아 다시 사탄에게 지배를 받는 자리로 가서는 아니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종이라면 과연 누구의 종노릇을 하여야 합니까?

 

주님의 종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종이 자기 주인을 위해
6년 동안 일을 하다 제 7년째 되는 해 즉 안식년에는 해방을 얻어 자유를 누리게 되는 풍습이 있습니다.

 

21:0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그런데 더러는 자기에게 자유를 허락한 그 주인이 너무 고맙고 좋아서 자유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21:05). 그들은 주인님 제가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는데 그것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 주인의 집에서 영원히 종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 종은 어떤 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종이 자유를 포기하면 주인은 종을 재판장에게 데리고 가서 여러 증인들 앞에 영원한 종임을 나타내는 표시로서 귀에 구멍을 뚫습니다(21:05). 그렇게 되면 그 주인은 그날부터 그 종을 예전처럼 부리지 않고 마치 자기 아들처럼 대하는데 이는 자원해서 된 종, 사랑의 종, 자유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입니다. 나는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라고.

 

어느 목사님이 선교지에 갔다가 그곳에서 수고하는 여러 선교사님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대형 버스에 모시고 가면서 자기는 현지인이 모는 승용차로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앞 버스에서 나오는 매연이 무척 지독하여 운전하는 현지인에게 버스를 추월하도록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사는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버스 뒤만 따라갑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내가 저 선교사님을 대접하러 온 목사다 추월해라. 그래도 마찬가집니다. 이번엔 내가 대장 목사다. 그래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화가 잔뜩 난 목사님이 소리를 지릅니다. 빨리 추월해. 마침내 그 현지인 하는 말이 큰소리치지 마세요. 저 버스에는 내가 섬기는 선교사님이 타고 있습니다.

선교사님께서 이 차를 몰고 뒤 따라 오라 했기 때문에 절대로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을 해서 선교사님에게 그 말을 했더니 그들이 하는 말이 이 사람은 자기 선교사 밖에 모르고 그 선교사 말만 듣는다는 겁니다. 얼마나 듣느냐고? 죽으라면 죽을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런 일도 있었답니다. 한 번은 선교사님께서 아침이 되면 화단에 물을 주라고 하였더니 비가 오는 날에도 물을 주고 있더랍니다.

 

서로의 종노릇을 하여야 합니다. 13 .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수직적인 관계의 종이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의 종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무려 60 번이나 서로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길 뿐만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섬겨야 하고 그들의 종이 되기를 자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서로 종노릇하는 곳에 섬김의 본질이 있습니다. 자유로워서 종노릇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종노릇 하고, 저 사람에게 고개 숙일 이유가 하나도 없음에도 고개를 숙이는 게 섬김입니다.

우리가 서로 복종할 수 있고, 서로 종노릇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인간관계는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풍요롭고,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 보십시오. 성도들이 목사를 섬기고 목사가 성도들을 섬기는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교회는 얼마나 사랑이 넘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남편이 아내를 섬겨 피차에 복종한다면 그 부부의 삶이 얼마나 보기 좋겠습니까?

아우가 형을 섬기고 형이 아우를 섬기는 가정, 경영주가 노동자를 섬기고 노동자가 경영인을 섬기는 직장은 얼마나 생산성이 높겠습니까?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것은 교제의 근본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 노릇을 하려하고, 심지어 서로 잡아먹으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세대, 서로 종노릇을 하지 못하는 이 세대는 한 마디로 서로 시기 질투하여 이용하고 착취하려는 세대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서로 종노릇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종노릇을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주님이 사랑하는 내 남편, 주님이 사랑하는 내 아내, 주님이 사랑하는 내 자녀, 주님이 사랑하는 내 이웃들을 섬기는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섬기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뿐더러 원수도 섬길 수 있습니다. 지금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지금 나는 섬김의 자리에 있습니까? 섬김 받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섬기는 자만이 섬김을 받고, 낮아지는 자 만이 높임을 받는 법입니다.

 

 

 2. 어떻게 종노릇을 해야 합니까?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어떻게 종노릇을 하라고 했습니까? 사랑으로입니다. 사랑한다면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유지할 수 있느냐? 입니다. 사랑이란 정지된 상태, 진열장의 마네킹처럼 그대로 고정되어 있는 상품과 같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문제는 사랑이라는 동기만 있으면 이웃을 섬길 수 있는데, 어떻게 이 사랑을 크게 할 수 있으며 또 사랑의 힘이 어디에서 솟아납니까? 진정 이웃을 챙기고 배려하는 마음에서부터입니다.


어느 교회 가족찬송 경연대회에서 한 집사님이 찬송을 부르다가 가사가 틀렸습니다
. 교인들이 깔깔대고 웃었고, 그 집사님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얼른 자리에 돌아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어 목사님 가정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도 어떤 부분에서 가사를 틀리게 불렀습니다. 교인들은 다시 깔깔대고 웃었고, 사모님과 자녀들은 왜 틀렸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로 목사님을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과로로 쓰러지셨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유품을 정리하다 일기장을 발견했는데 그 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714, 교회 가족찬송 대회가 있었다. 김 집사가 찬송을 부르다 틀려서 교인들이 다 웃었는데, 김 집사가 너무 무안해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 다음 차례로 우리 가정이 찬송 부를 때 나도 일부러 틀려주었다. 다시 교인들은 깔깔대며 웃을 때 슬쩍 김 집사를 보니 목사님도 가사를 틀릴 수 있구나. 생각하고 안도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일로 한 영혼에 위로를 줄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다
.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음은 남의 허물과 수치를 가려주려고 나의 자존심을 희생하는 마음입니다. 남의 허물 보기를 즐거워하여 오래 기억하고 들춰내려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이고, 남의 허물을 안 보려 하고, 덮어주려는 자세가 행복한 마음입니다.

왜 서로 종노릇을 하지 못하고, 왜 서로 섬기지 못합니까? 이기심과 자존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서로 종노릇하려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종노릇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육체의 욕심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새사람이 되기는 했으나 옛 사람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고, 우리 안에 옛 사람, 옛 성품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옛 성품
, 이기심, 욕심, 육체의 소욕 등을 극복하고 다스릴 수 있을 내적 강한 능력이 있을 때 정말 서로 사랑하는 삶을 실천 할 수 있습니다.
저와 우리 여러분에게는 분명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순간 우리 안에 있던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사라지고, 이웃을 이기려 했던 육체의 소욕을 넘어서서 우리의 목표인 섬김의 삶, 사랑의 종노릇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종이라는 단어 얼마나 비천한 단어입니까

? 인간이면서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처지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이란 단어를 가장 영광스러운 단어로 바꾸어 놓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02:0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0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D. L.
무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 그가 얼마나 많은 종을 거느리고 살았느냐? 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종노릇을 하였느냐 입니다.

 

우리로부터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종이 되셨다면 우리가 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종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지배했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느냐? 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기로 결심한 사람보다 더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에게는 미워할 사람도, 피해야 할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종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이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이러한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진정으로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의 미움의 종이나 시기의 종이 아닌 사랑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주어진 자유를 지혜롭게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닐 것입니다.자유를 갖게 된 후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하는 더 높은 목표, 더 높은 가치 기준을 세울 때 자유의 참 가치를 누리면서 무질서한 생활을 고치며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