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1년 말씀

나는 시원한 역할을 하는 자입니까?(잠 25:13)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1. 7. 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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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유럽의 입헌군주국 노르웨이 왕국이 있습니다. 면적은 386919로서 남한의 약 4배이고 인구는 약 4,828,000(2009) 정도 됩니다. 이 나라의 북쪽 북극권은 여름에는 백야(白夜) 현상으로 인해 한 밤중에도 대낮처럼 밝으나 반면 겨울에는 낮에도 해를 볼 수 없는 날이 며칠이고 계속됩니다. 이런 환경이라면 생활 리듬 무너지기 딱 알맞은 상황 아닐까요?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아간다고 하는 군요?

 

우리는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이라 논하면서 살기 좋은 나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 그런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나라도 한 없이 불편한 곳입니다. 금년 6월은 이른 태풍 메아리 영향으로 장마가 계속 연장되어 습도가 높고, 생활하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거기에다 태풍 한두 개 정도 더 지나간다면 아마 물난리 나겠지요? 겨울에는 강원도 쪽엔 폭설로 인해 교통 마비현상이 자주 일어나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지만 또 이로 인해 오히려 2018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는 특권도 따 왔습니다. 무척 시원합니다.

 

기상청의 금년 날씨 예보가 올 여름 나기가 그리 쉽지 않을 전망이라고 합니다. 작년처럼 찜통더위를 겪을 것 같은 감이 오는데 아마 올 여름에도 냉장고, 선풍기, 에어컨 등 가전제품들이 성수기를 이룰 것 같습니다. 더울수록 스트레스 안 받고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마음 편히 시원하게 살 수 있도록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에게 시원한 환경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김해삼일교회 성도들은 이 여름 시즌에 교회 안에서 말로, 기도로, 인품으로, 물질로 청량음료와 같은 시원한 역할을 하여야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시간 어떻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성도와 이웃을 시원하게 하는 것인지를 말씀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1. 성도를 시원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전
16: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시원하게 하였으니
. 여기서 시원하게 하였다는 말은 원기를 회복하여 쉼을 얻는 것으로서 단순한 육체적인 쉼이나 회복보다는 영적인 위로와 기력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에 물질로 후원을 한 고린도교회의 세 사람을 들추면서 그들이 나와 너희 모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고 소개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분쟁이 심하고 문제도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에베소에 머물고 있는 바울에 대하여도 막 비난을 해 대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식이 바울에게까지 들릴 때 얼마나 스트레스가 오고 속상했겠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여러 문제를 수습하고 싶지만 그러면 그나마 교회의 화평이 또 무너질 것 같아서 하나님의 때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세 사람이 고린도교회로부터 바울에게 온 것입니다. 바로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라는 사람입니다(고전 16:17).


스데바나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세례를 베푼 사람이고(고전 01:16), 브드나도는 이름의 뜻은 행운인데 아마 종의 신분이었던 것 같고, 아가이고는 아가야 사람이라는 뜻인데 역시 노예의 신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스데바나가 교회에서 섬김의 삶을 살 때 그 모습에서 감동을 받고 함께 섬김의 일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바울에게 찾아와서 사도님, 고린도교회의 큰 문제였던 분쟁과 갈등은 거의 마무리 되었습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셔도 됩니다. 이 말을 듣는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시원했겠습니까?
좋은 소식은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법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는 좋은 소식과 사랑의 말을 전하는데 힘쓰십시오. 나쁜 얘기는 전하지 말고, 전하더라도 최대한 좋은 것만 가려서 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에서 서로가 서로를 섬기면서 좋은 소식 전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진가를 충분히 인정하고 도와주라는 뜻입니다. 시원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산소(酸素)와도 같은 사람 아닙니까? 사람의 걱정을 덜어주고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수 있다면 목회자와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 것이며, 이런 분으로 인해 교회는 천국화 되어갑니다.

물질이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그 사랑과 배려가 사람을 시원하게 하는 줄 믿으십시오. 이기적인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다려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거부감을 주는 안티 형입니?
아니면 별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합니까?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기다려지는 사람, 내가 속한 공동체의 회원을 시원하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김해삼일교회 성도들은 항상 유쾌하고 시원함을 제공해 주는 삶을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생기를 팍팍 불어 넣어주는 모 도사처럼 감정상의 위로만이 아니라 영혼에까지 참 안위를 주는 그런 사람이 되어 봅시다. 우리의 주변을 보십시오.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만나고 싶은 기분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는 헤어지면 아쉬워서 날마다 전화통을 잡고 있게 마련입니다.

만나도 좋고 안 만나도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있으면 만나고 없으면 별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 전화 한 통화도 하지 않는 사람 말입니.

함께 있으면 답답하고 안 보면 오히려 더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공연히 스트레스만 받고 전화가 걸려 오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워지지요. 대방을 시원하게 하는 삶은 다툼이 있는 곳에 평화를, 외로움이 있는 곳에 위로를,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항상 심으면서 믿음의 행전을 계속 이루어갑니다.



 2. 좋은 소식으로 시원하게 해야 합니다.


25:25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 당시에는 온라인이나 이메일, 전신환 등 우편제도가 그다지 발달치 못해서 멀리 있는 소식을 전해 듣기란 여간 쉽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좋은 소식이 왔을 경우 소식을 받는 자는 상당한 새 힘을 회복하는 전환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25:25절의 좋은 기별을 영적인 차원으로 옮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good news)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솔로몬 왕이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을 얼음냉수와 같다고 표현한 것처럼 영혼 구원의 소식을 내어 놓을 때 듣는 자가 영적 시원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리가 매주일 교회를 나올 때 남들이 좋은 소식 가져왔는가를 기대하지 말고 내가 복음의 좋은 소식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 금년 표어가 무엇입니까? 물 댄 동산과 같은 교회 아닙니?(31:12). 심령이 건강한 성도가 되고, 근심이 없는 성도가 되고,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려면 무엇보다 영혼을 데려오는 일에 내가 올인 하여야 합니다.

 

15:30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좋은 소식은 들을 때에 너무나 기뻐서 척추가 발라진다는 이야기이고, 또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도 됩니(16:24). 그런데 우리는 병든 사람에겐 좋은 소식이 들려지면 영육 간에 치유가 된다는 명 처방전의 말씀을 제쳐놓고 놓고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항상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하며 소란 피우기를 잘합니다. 큰일 난 지가 언제인데 밤낮 큰일 났다고만 합니? 이런 사람 만나면 답답하고 괴로워요. 좋은 소식으로 전환하세요.

성도 여러분, 좋은 기별을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는 일을 시켜도 언제나 마음이 든든하며 그 결과는 항상 좋기 마련입니다. 누가 나를 시원하게 해 주지 않는가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누구를 시원하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좋은 소식을 창출하는 아이디어를 짜 내십시오.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생각해 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움직이고 보는 겁니다. 일단 도전부터 해야만 좋은 결과가 찾아오지 않을까요?


딤후
04:0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주님의 마음을 맞추는 자가 시원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 왕에게는 국내외를 위시하여 여러 분야에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또 충성된 사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충성된 사자를 보내는 궁극적인 분은 누구를 상징합니까? 바로 하나님이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가 바로 충성된 자 아닙니까? 이런 충성 된 자, 하나님을 시원하게 하는 자는 먼저 다음의 몇 가지의 신조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가 자신의 정체성 파악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겁니다. 나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 확실해야만 사람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정체성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사람은 조금 뭘 됐다고 해서 교만하기가 일수입니다. 충성은 소리가 없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두 번째는 자신의 위치파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 앞에서, 성도와 이웃 앞에서, 모든 관계 속에서 내 위치가 어디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몰라서 사고가 일어나고 문제가 발생하는 것 아닙니까? 섬겨야 하는 위치인지 섬김을 받아야 하는 위치인지를 아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사명감의 파악입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에 나를 냈으며, 내 일생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기를 원하시는가를 아는 것 이것 정말 중요합니다. 이 절대적 사명, 생명을 바칠만한 하고,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그런 확실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교회에서 그다지 불만이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통해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명의식이 아니라 명예의식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목사와 성도들이 위로도 해 주고 칭찬도 곁들여야 합니다만 설령 그렇지 못해도 교회를 시끄럽게 해서는 아니 되겠지요?

사명감으로 일하는 사람의 그 진행과정은 즐겁습니다만 명예를 바라며 일하는 사람의 그 진행과정은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짜증입니다. 억지로 하거나 마지못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벧전 05:0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하나님의 일에 충성된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되 해서는 안 될 일은 하지를 않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때는 후회가 따르지 않으며 피곤함도 없는 것은 그것이 곧 일에 대한 행복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것만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일을 잘 해도 비난이요, 일을 못해도 비난이요, 일을 안 해도 비난입니다.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함께 당나귀를 팔러 시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당나귀를 끌고 아버지와 아들이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저마다 한 마디 씩 합니다
.
나귀를 타고 가면 될 것을 둘 다 힘들게 걸어가다니 저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나 하면서 놀려대자 그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아들을 당나귀에 태웠습니다.그리고 아버지는 앞에서 고삐를 잡고 걸어서 한참을 가는데 이번엔 노인네들이 그 모습을 보더니만 버릇도 없이 아들놈이 나귀를 타고 아버지를 걷게 한다고 또 야단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들과 자리를 바꾸어서 아버지가 나귀를 타고 아들이 고삐를 잡고 한참을 가다 빨래터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자들이 뭐라고 한 마디씩 하기를, 어른이 아이를 학대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도 말이 되고 저렇게도 말이 되자 이번에는 아예, 아버지와 아들 둘 다 당나귀에 올라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사람들이 수군거리길 저 조그만 당나귀에 두 사람이나 올라탔으니 당나귀가 너무 불쌍하다고 하는 겁니다.
다시 고민하던 아버지와 아들은 마침내 당나귀를 막대기에 앞 뒤발을 묶고서는 어깨에 메고 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이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다 그만 넘어지는 바람에 나귀는 다리가 묶인 채 냇물에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나는 하나남 앞에서의 나름대로의 자신에 대한 소신과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까? 누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아닌 스스로의 원칙에 충실 하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2009
년 초파일날 안산의 한 사찰 주변 도로에 연꽃등을 걸어 두었는데 누군가가 가위로 싹둑싹둑 연들을 잘라버리고, 연등을 발로 짓이겨 놓았습니다.
스님은 기가 막히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여서 연등 전기 줄을 다시 이어 놓고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 두었습니다. 연등줄 끊는 것은 좋으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잘못 끊다 감전사고 나니 조심히 끊으세요.

이런 기사도 있었습니다. 사찰에 들어가 불상에 빨간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려 놓고 그 앞에 오직 예수라고 쓴 사건입니다. 누가 그랬을까요? 성령님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가장 좋아할 일입니다.

 

신실한 일꾼이 귀하게 느껴지는 시대입니다. 나는 섬김의 자리, 충성의 자리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시원한 얼음냉수 같은 사람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직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섬기는 일이며 봉사하는 일입니다.
충성은 주인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은 사람을 대할 때 시원함을 주고 신앙의 매력이 넘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 산소 같고 비타민 같은 사람, 마냥 즐거움을 선사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