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한 중년 성도가 대학병원의 수술실에서 혀에 생긴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취 주사를 손에 쥔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막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말은 이것이 최후의 말이 될 것입니다. 간호사, 수습 의사들, 둘러선 사람들 모두의 표정과 분위기는 침묵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곁에 있는 모두가 다 저마다 만일 나라면, 만일 내가 한마디 할 수 있는 말이 남아 있다면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드디어 입이 움직이고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더니 다음과 같은 말을 세 번 되풀이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루살렘교회 안에서 일어난 한 불행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도 될 수 있을 일을 거짓말을 함으로 비극을 맞이하는 일입니다. 이 사건은 전체가 다 거짓말이 아니라 약 절반 정도만 거짓말입니다. 어떤 거짓말일까요?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밭을 판 그 돈으로 교회 앞에 구제비로 사용해 달라고 내어 놓으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부동산을 매매하여 생긴 돈을 하나님께 다 드린다는 자기 자랑을 좀 심하게 한 것 같은 감이 듭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 앞에 내어 놓을 때는 일부분을 떼어놓고서 모두를 드리는 것처럼 슬쩍 거짓말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비록 거짓말은 하였지만 그래도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거짓말 때문에 부부가 동시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음을 당했습니다. 은혜로 시작해서 불행으로 인생을 마친 겁니다. 이들 부부가 왜 이런 거짓말을 하였는지, 그런 거짓말을 하였다고 과연 죽음을 맞게 되는 지를 여러분과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예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
0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로다.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그 하나님께서 좀 지나치시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헌금의 행위에 일부분의 거짓말이 있다고 그렇게 가차 없는 징계를 내릴 수 있을까? 하는 점 때문이에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헌금 문제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만큼 그렇게 큰 죄악이냐 하는 것이죠? 이런 일에 대하여는 동양권과 서양권에서 보는 시각은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거짓말을 그리 심각한 죄로 생각하지 않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사건에 대해 좀 관대하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서양 문화권은 기독교적인 윤리 혹은 청교도 윤리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거짓말을 어떤 죄보다도 심각하게 취급합니다. 가령 미국 사회에서는 대통령도 거짓말을 하면 물러나는데 그 예로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란 1972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 닉슨이 재선을 위하여 워터게이트라 불리는 건물에 있는 상대 당인 민주당 선거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하였다가 탄로 난 후 부인하다 거짓말 죄로 탄핵을 당해 물러난 사건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이 대통령이 세종시 문제나 신공항 문제로 굵직한 거짓말을 했는데 그것 가지고 그렇게 물고 늘어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뒤에서 욕이야 많이 하겠지요?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할 때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좋은 일을 하고도 그것을 부분적으로 속였다는 것 때문에 죽음을 당한 사건을 좀 더 진지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겠죠?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는 곁에서 당장 달콤한 말을 해 주는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을 받는 일에 노력했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며, 또 실제로 우리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신앙인이라면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본주의의 삶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할 것 아닙니까?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왜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인정과 칭찬받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는 간접적인 근거가 사도행전 04장에 나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행 0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라는 사람의 별명이 위로자라고 소개되는 것을 보아 상대방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자기의 밭을 팔아 교회의 필요와 구제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렸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의 재산을 하나님 앞에 드린 후에 교회에서 신앙의 인기가 더욱 높아졌을 것이며, 이런 헌금 정신은 성도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을 겁니다. 이런 바나바의 행적이 나오고 난 후에 이어서 바로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이들 부부도 바나바의 헌신을 보고 많은 은혜를 받았을 것이며, 자신들도 믿음으로 그런 일을 하고 싶었던 생각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2. 성령님의 감동을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0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 생활에서 헌금을 드리는 모습보다도 헌금을 하는 그 동기를 더 중요하게 보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자신의 땅을 팔아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결심한 것은 바나바의 신앙의 모범과 사도들을 통한 말씀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지 누가 곁에서 시켜서 억지로 한 행위는 결코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주신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주신 은혜의 마음, 섬김의 마음을 이들 부부가 이내 사람의 생각으로 바꾸고 맙니다. 우리도 바나바처럼 땅을 바치면 사람들로부터 특별히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겠지? 라는 인간적인 생각 말입니다. 신앙인에게 이런 생각이 자리를 잡는 그 순간부터 믿음은 다운됩니다. 순수하고 좋은 마음, 성령님의 감동 된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그 때로부터 이들 부부는 불순한 마음에 사로잡혀서 결국은 물질에 시험을 받고 말았습니다.
바나바처럼 성령님의 마음으로 땅을 팔아 놓고는 그만 인간적인 생각을 슬쩍 집어넣어 적당히 떼어 놓았는데 이 물질 시험이 불행의 출발점입니다. 02절을 보십시오.
0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땅값을 손에 들고 보니 아까운 마음이 생겼고, 이것을 다 바치면 장래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염려를 한 것 같아요. 바로 그 염려의 틈 사이를 사탄이 치고 들어와서 마침내 이들 부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는데 결국은 성령님의 감동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으로 출발했던 그 좋은 신앙이 변질되면서 하늘나라의 상급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들 부부가 사도들에게 가져다 놓은 그 물질에 대하여 베드로가 뭐라고 말하는지 볼까요?
0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감추다(νοσφιζω). 착복하다는 의미로 디도서 02장 10절에서의 떼어 먹지 말고 라는 말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딛 02:10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창 02:18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의 부부 관계를 가리켜서 돕는 배필이라고 했습니다. 이때의 돕는 배필은 생활의 필요만을 주고받는 일상적인 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면까지 포함해서 상대방의 모든 약한 부분을 보완하여 유익하게 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건강한 믿음의 부부 상을 만드는 짝이라는 뜻이에요. 건강한 믿음의 부부는 품격이 있는 신앙의 조화를 이루게 갑니다. 초대교회 시절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에 크게 협력한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처럼 말입니다.
아나니아가 땅값 얼마를 감출 때 곁에 있는 삽비라가 혹은 아나니아가 여보, 우리 하나님 앞에서 재물에 욕심 부리지 말고 그저 믿음으로 삽시다. 라고 적극적인 만류를 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바나바처럼 길이길이 그 행적이 믿음으로 빛났을 것인데 서로가 헌금을 에누리 하는 도적질에 그만 동참을 하고 말았으니 이게 불행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참담한 비극 중의 하나는 서로가 서로를 충고할 수 있는 관계가 되지 못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여보, 이렇게 하지 말아요. 안 돼요. 하나님이 보고 계시잖아요. 하면서 따가운 충고를 해 줄 수 있었고 그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이런 비극을 당하지도 아니했거니와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영원히 빛날 수가 있었을 것 아닐까요? 우리는 그 일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 말고 혹시 나도 하나님 앞에서 이들 부부처럼 같은 전철을 밟고 있지를 않는가를 한 번 돌아봅시다.
3. 거짓을 회복할 기회를 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0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땅값 얼마를 감추어 두고서 교회 앞에 등장하기까지 아나니아의 고민스러웠던 많은 시간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님은 아나니아의 마음을 계속 두드렸을 것이고 양심도 그를 계속 책망하고 있었을 겁니다.이때 아나니아가 오, 하나님 하면서 담대히 일어나 마음을 정리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갔더라면 이들 부부의 삶은 얼마나 복된 길이 되었겠습니까?
아니면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땅값을 가지고 사도들 앞에 나아가 드릴 때 사도님, 여기 저의 재산 중의 일부를 드립니다. 라는 고백만 하였어도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 여기 저의 재산 모두를 드립니다. 는 거짓의 헌금을 드릴 때도 회개의 기회는 여전히 주어져 있었습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베드로의 책망을 받는 마지막 그 순간에라도 아나니아가 옳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하며 손을 들었더라면 불행을 맞지는 않았을 겁니다.
0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아내 삽비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의 죽음 이후에 계속되는 사건을 보십시오. 이 중요한 시점에 부부가 함께 오지 않고 따로 따로 들어왔는데 이 세 시간 동안 무엇을 하다가 오게 된 것 같습니까?
남편이 죽은 지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 소식을 몰랐다면 아마 밖에서 나돌아 다니지는 아니한 것으로 생각되네요. 무엇을 하다 온 것 같습니까? 헌금 에누리한 돈을 안전하게 간수하는 일을 하였을 것이고, 다음으로는 우리도 바나바처럼 땅을 팔아서 교회에 바쳤다 하면서 이집 저집 다니며 열심히 입방아 찧다가 왔을 것 같아요.
0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베드로가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고 물은 것은 삽비라에게 회개할 기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 기회가 있음이 은혜 아닙니까? 그런데 삽비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예, 이뿐 이로라.
이미 남편과 같이 입을 맞추어 놓았기 때문에 이것뿐입니다. 라고 말한 것이겠지요? 설마 우리가 은밀히 계획한 것을 알지 못하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지만 베드로는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 거짓말을 단 번에 알고 있었습니다.
0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이제는 더 이상 거짓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는 없어졌으며 주어진 그 기회를 계속적으로 거절한 결과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약 80여 년 전에 터키에 유명한 여시푸라는 레슬링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레슬링을 잘해서 유럽 지역에서 그를 상대할 사람이 없었는데 몸무게가 무려 200kg나 되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시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최고의 레슬링 선수였던 루이스와 시합을 하여 그를 장난감 집어 던지듯 해치움으로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었고 상금으로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돈을 가지고 가봐야 환전하는데 복잡하니 그 돈을 전부 금으로 달라고 한 후 허리에 둘둘 감은 큰 전대 속에 채워 넣고 다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바다 한 가운데 왔을 때 그가 탄 배가 그만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여시푸는 그 큰 체구에 불거지도록 금이 가득 찬 전대를 둘둘 감은 채로 배에서 뛰어 내렸는데 아무리 운동선수지만 몸에 감은 금의 무게 때문에 구명보트가 도착하기 전에 대서양 밑창에 가라앉아서 지금까지 떠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 금 전대만 벗어놓고
아나니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 란 의미가 있고, 삽비라는 보석처럼 아름답다.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이들이 세상에 태었을 때 그 부모가 제각기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아름다운 믿음으로 생활하라고 지어준 이름일 것입니다.
이들의 앞날이 믿음으로 잘 열려지기를 기대했다는 의미로 봐도 될 것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아름다운 이름을 탐심으로 인해 이름값도 제대로 못한 채 불행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성도들 가운데 맥추 감사주일이라 하니 다소 부담이 되고 은혜 받는 일에 마음이 무거운 분이 혹 계십니까? 마음을 편안히 가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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