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1년 말씀

이제 영적 슬럼프를 탈출합시다.(왕상 19:01~18)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1. 2. 13.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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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서쪽 지중해 해안을 끼고 올라가다 보면 해안에서 내륙 쪽 23km지점까지 폭 10km로 뻗어있는 산악지대를 만납니다. 이를 통상 갈멜산이라 부릅니다. 샤론과 에스드리엘론의 두 평원 사이에 높이 솟은 울창하고 아름다운 이 산에는 포도나무를 재배하는 과수원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갈멜산이라고 하여 올라가는 곳은 갈멜산의 불의 장소, 또는 불이 내려온 곳이란 뜻의 무흐라카 봉우리입니다. 이곳에는 수도원과 엘리야의 기념석상이 있는데 특별히 엘리야의 기념석상을 보면 엘리야가 근엄한 얼굴로 오른손에 끝이 구부러진 칼을 들고 있습니다.
이는 칼이 구부러질 정도로 바알 선지자 450인을 과감히 제거하였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또 중요한 의미 하나는 엘리야의 왼발은 바알 선지자의 어깨를 밟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 숭배를 짓밟고 여호와 신앙을 지킨 것을 상징합니다.

 


(엘리야의 기념석상 아래서)

 

엘리야가 성경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떠합니까? 선지자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죠.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모세와 더불어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였고(마 17:03) 어떤 사람인지를 표현하는 성경 구절도 있습니다(약 05:17,18).

그런데 이 능력의 선지자인 엘리야가 영적 승리 후에 영적 다운의 자리, 영적 슬럼프의 자리에 들어선 모습을 오늘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절로 회복 될 줄 믿고 기다려야 합니까?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이제 영적 슬럼프를 탈출 합시다. 란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1. 엘리야의 현재 자리가 영적 슬럼프입니다.


0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가 왕성한 사역을
하던 당시의 북쪽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방황하며 신앙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믿음과 현실의 생활 사이에서 그때마다 적당하게 편한 데로 살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 지라.


이에 엘리야는 백성들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의 선지자, 제사장 850명을 갈멜산에 모으고는 백성들 앞에서 참 신이 누구인지를 가리는 영적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 영적 대결에서 지는 쪽은 죽임을 당하는데 결과는 엘리야 선지자의 승리로 끝이 났고 우상의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우상 숭배자 이세벨 왕비가 그 소식을 듣고는 반드시 엘리야를 죽이겠다는 복수를 다짐하는 각오가 02절에 나옵니다.

 

0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 말을 들은 엘리야는 이세벨의 복수를 피하여 그 손길이 미치지 않을 곳으로 생각되는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브엘세바는 이스르엘에서 약 200Km 쯤 떨어진 남방 유다 땅에 최남단에 속하는 구역입니다.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북쪽 이스라엘의 7대왕 아합과 결혼 한 시돈이라는 나라의 공주로서 이스라엘 왕궁으로 시집오면서 바알과 아세라라는 우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는 바알 제사장들까지 동원하여 국민들에게 숭배를 강요하였고 하나님의 제사장들은 폐하여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가장 번창하였던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 숫자가 약 480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북 왕국 이스라엘에 바알의 선지자가 450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당시 바알 종교가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가 이세벨의 복수 소식 앞에 북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 도망을 한 것입니다. 영적인 탈출은 언제나 밑바닥까지 가는 것 아닙니까? 영적 가뭄의 현장까지 왔습니다. 그러면 지금 북쪽 이스라엘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음으로 큰 고통을 당하다 엘리야의 기도로 가뭄이 해결되자 가축과 산천초목들 모두가 단 비를 맞으며 갈증을 해소하고 있습니다.
반면 비가 내리기를 그토록 소원하였던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인 호렙으로 가는 길목 광야의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을 상대로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04절)

 

얼마나 나약한 모습이며 심한 우울증입니까? 바로 하루 전만 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큰 이적을 행하여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던 그 선지자였는데 불과 하루 만에 엘리야는 절망의 폭풍을 만난 듯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죽기를 구하는 이런 우울증을 왜 만납니까? 능력의 선지자가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능보다는 사람의 권세를 더 크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우울 증세를 확실히 보여주는 대목이 04절의 죽기를 구한 말씀이나 10절의 나만 홀로 남았다는 구절입니다. 만일 엘리야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전날까지 자신과 함께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면 도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의 권력을 바라보니 도망자의 자리, 기력이 소진된 낙담과 절망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일이 잘 될 때는 기분이 한껏 업(Up) 되다가 일이 꼬이고 실패가 거듭되면 인생을 다 산 듯이 낙심되고 절망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좌절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겪는 여러 갈등 요소 중의 하나인데 예,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바라볼 때는 분명히 슬럼프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영적 슬럼프는 하나님의 만지심을 입어야 풀립니다.


05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영적 침체의 잠을 자고 있지만 엘리야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잠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포자기에 빠진 엘리야, 식물인간처럼 된 엘리야의 영적 슬럼프 현장을 찾아오셨습니다.

(시내산 자락의 로뎀나무 곁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소명도,
이스라엘의 영적 갱신도, 갈멜산의 승리도 다 내 던졌으나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엘리야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는 영적 무감의 상태에 처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뜨거운 사랑으로 돌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영적인 슬럼프를 탈출하는가? 입니다. 세상에서 절망한 사람들에게 영적 감각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에 대한 문제 말입니다.

세상의 있는 그 어떤 것도 나를 회복시키지 못함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속성들은 여러분들 다 겪어보셨겠지만 어떻습니까? 지극히 상대적이고 지극히 계산적입니다. 상황을 따라 내가 잠든 사이에 말없이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정말 속절없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비록 영적 깊은 잠에 빠져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을지라도 외면하지 않고 쉴만한 영적인 은혜의 자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강권하시는 사랑이 나를 살게 하고, 나를 지키시며, 나를 회복시키십니다.

 

사 55:0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여기 절망에 늪에 빠져 영적 탈진의 잠을 자고 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장면을 보십시오. 극도의 절망으로 지쳐 쓰러진 엘리야를 마치 갓난아이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십니다. 비록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간 야속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부정(父情)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되 낙심과 절망에 빠져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를 조금도 책망하지 않습니다.


05절에 천사가, 07절에도
천사가 와서 계속 어루만지시는데 이 말씀을 성도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믿음이 그것밖에 되지 않느냐? 왜 그렇게 힘없이 주저앉아 있느냐? 하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보면 좀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상대로 세 살 먹는 아이를 엄마가 밥 먹이기 위해 떠먹이는 모습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이런 일이 바로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란 어떤 것을 말할까요? 이것은 단순한 피부적 접촉이 아니라 전 인격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치유입니다. 지칠 대로 지쳐 버린 피곤한 육신과, 중심을 잃어버린 그의 영혼을 부드럽게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 곧 회복의 손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상하고 지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손이 필요하지 않느냐 말입니다.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은 우리를 일어나게 하며, 우리의 질병도 고치며, 우리의 영혼도 소생시킵니다. 우리의 인생을 다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 체험되기를 축원합니다.

 


 3. 사명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산으로 가야 합니다.


0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브엘세바의 끝자락 광야에서
호렙산까지는 대략 350km으로서 정상적으로 꾸준히 걸을 경우 한 십 여일 정도면 당도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40주야라 했으니 이 기간 동안 행진만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때로는 금식도 하며, 때로는 기도에 몰입하면서 나아갔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사명자로 부른 산으로서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시내산과 동일시됩니다만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다운 된 엘리야를 기운을 차리게 해서 호렙산으로 인도하신 후 사명을 주십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네 길을 돌이켜. 이 말은 단순히 왔던 경로를 되밟아 돌아가라는 말과는 다른 내적인 태도와 의식의 전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엘리야가 명령받은 행로는 다메섹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절망의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과 만남을 통하여 새로운 사명을 받았으니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주어진 일터로 담대히 가라는 명령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적 회복은 사명의 자리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자리에, 주님의 몸 된 성전에 다시 서는 겁니다. 그것이 회복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성도의 그 본질적 의미는 사명 감당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사명에 헌신하십시오.

오늘 우리의 모습이 무기력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향해 불타는 사랑이 식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이 한 목숨 바치겠다던 그 열정이 왜 식고 말았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내 가슴속에서 그 열정이 불타고 있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가꾸려는 그 꿈이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바로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사명의 자리로 돌아오려는 나에게 혹 걸림돌 되는 이세벨 같은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잘 해왔는데 어이없는 일로 나의 믿음이 허물어지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나의 영성이 로뎀나무 아래 웅크리고서 죽기를 자처하는 엘리야와 같은 자리에 이르게 하였습니까? 한 마디로 영적 방향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너는 할 일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사명을 인식시켜 주심으로 인해 엘리야는 다시 사명을 회복하였습니다.

우리도 가끔 믿음의 큰 체험을 바랄 때가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보이지 않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하나님이 떠나 버린 것 같은 그런 절망감이 엄습할 때는 하나님이여 크게 역사 하옵소서. 하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택하신 자를 버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기도에 거창한 방법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 속에 고요히 응답해 주셨기 때문에 모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책을 읽다가 아빠에게 물어봅니다. 아빠, 세계 3대 악처가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하고, 성경에 나오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하고, 또 하나는 누구야? 아빠가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합니다. 야, 너는 네 엄마 이름도 모르냐?


오늘의 주제가 그 3대
악처 가운데 하나(?)인 이세벨이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들을 몰살시킴으로 인해 독을 품은 결과 아닙니까?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고 신에게 맹세까지 해가면서 선언을 함으로 인해 엘리야가 영적 슬럼프를 만난 사건입니다

이것 하나는 아셔야 합니다. 사명을 다 마치지 않은 자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으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즉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자기 혼자인 줄만 알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권력 앞에 두려워 떨었지만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한 믿음의 사람 칠천 명이 있었습니다.

 

시 118:0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혹 절망 중에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입으십시오. 나에게 위대한 사명이 있다는 것과, 내 주위에 나와 함께하는 믿음의 동지들이 있음을 믿으시고 오직 믿음으로만 전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