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0년 말씀

이제부터 이웃과 더불어 살겠습니다.(롬 12:14~1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0. 12. 1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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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정주부가 남편의 수입이 적어서 동네에 작은 가게를 냈습니다. 이 아주머니가 정직하고 친절하게 물건을 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점점 많아졌고, 물건이 달리게 되어 트럭으로 물건을 들여놓고 하루 종일 정신없이 팔아야 했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퇴근하여 바쁘게 장사를 하고 있는 부인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동네 다른 가게들은 이제 손님이 거의 없대. 저 건너가게는 아예 곧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아. 이 말을 듣고 그 부인은 물건을 트럭으로 주문하지 않았고, 파는 물건의 종류도 줄여서 손님들이 찾아오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물건은 건너편 가게에 가시면 살 수 있습니다. 그 후로부터 장사에서 벗어나 시간이 많아진 부인은 좋아하던 독서에 빠질 수 있었고 틈틈이 글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빙점(1946)이라는 유명한 소설을 남긴 미우라 아야꼬 여사의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한 해가 저무는 시점입니다. 각종 언론 매체와 T. V에서는 연말을 기점으로 불우이웃이나 고아원, 양로원을 돕는 일을 안내하느라 열중입니다. 이런 때 나는 세상의 가치관 모두를 나만 생각하여 내게만 집중시켜놓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너무 많은 욕심들로 인해 나와 이웃 모두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빼앗기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때란 말입니다. 신앙인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 아닙니까? 이웃이 없는 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에서 소금과 빛 된 역할을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1.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웃을 축복하여야 합니다.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람은 책임이라는 인간적 도리를 행할 줄 아는 겁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아리스토텔레스)인 것처럼,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서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함께 공동의 운명을 지니고 관계를 맺습니다. 동시에 이웃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독불 장군이 없다고 하는 거죠.

하나님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혀주셨고, 또 이성도 주셔서 생각하고 추리하며 연구하는 가운데서 대인관계를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 없는 네가 있을 수 없고, 너 없는 내가 또한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이웃을 소중히 여기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협동적인 삶을 가꾸는 것이 중요한 삶임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성숙한 신앙인은 바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웃에 대하여 축복을 비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사랑하고, 자기를 축복하는 사람을 향해서 축복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 즉 보통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에 비해 우리 신앙인은 그보다도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05:44)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축복하기는 쉬워도 나를 핍박하는 자, 나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축복하기는 결코 쉽지 않음을 아실 겁니다.
내가 핍박을 당한다고 할 때 이 말의 의미는 나의 신앙적인 문제에 대해 타인이 훼방을 하거나 박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괴로움을 당하고, 불이익을 당하고, 또 피해를 당하고, 심지어는 여러 가지 말 할 수 없는 외부적인 고통을 당하는 것을 핍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절 말씀은 그런 고통과 아픔을 주는 사람, 나를 아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향해서 축복을 베풀며 살라고 명합니다. 사실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에게 반드시 우호적인 사람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잖습니까?
때로는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를 핍박하며 아프게 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만날 때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안내하는 말씀이 14절이지요.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명하셨던 말씀이 있는데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눅 10:0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 지어다 하라.

 

유대인에게 있어서 평안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겼으며, 인간관계에서나 혹 어느 집을 방문하는 경우에는 그 가정에 먼저 복을 빌어주라는 뜻입니다. 그 가정이 복을 받을 자격이 있으면 그 가정에 복이 머물게 될 것이지만 만일 그 복을 받을 자격이 없으면 그 복은 복을 빈 사람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입니다.

이 원리를 역(逆)으로 한 번 생각해 볼까요.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게 저주성의 악담을 했는데 그 사람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면 그 저주는 그에게 머물 겁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저주를 받아야 할 까닭이 없으면 그 악담의 저주는 저주를 한 사람에게 되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고 보라지, 참 잘 되는가 한 번 보자? 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웃을 향해 복을 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가능하면 이웃의 경조사(慶弔事)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사회에서 IQ보다는 EQ가 높아야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하여 감성지수 개발에 아주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지능 지수는 높지만 감성 지수가 낮음으로 인하여 사회적 불안이 조성되고 많은 문제가 과다히 노출하는 것을 사실 인정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웃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고 그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내가 될 때, 나와 너와의 관계, 바로 믿음의 공동체는 더욱 아름다운 공동체로 성숙되어 나갈 것 아닐까요? 15절은 이웃에게 경조사가 생겼을 때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에 대한 안내문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이웃에게 축하할 일이 있습니까? 기쁨으로 축하하십시오.
우리의 이웃이,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 슬픈 일을 당하였습니까? 더욱 진지하게 아파하는 마음으로 그 슬픔에 동참하십시오. 슬픔을 나누면 그 슬픔은 반으로 줄어든다고 하죠?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기다립니까? 내가 좋은 이웃으로 다가가는 일은 주저하면서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좋은 이웃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립니다만 이럴 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마 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웃이 좋은 일이 있어서 기쁨으로 피리를 불고 있지만 함께 즐거워하는 춤 놀이에 동참하지 않고 또 이웃에게 슬픈 일이 닥쳐도 함께 울어주는 모습이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웃의 즐거움에 함께 동참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무관심히 여겨도 됩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은 진정한 이웃이 되었던 한 사람을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소개합니다.

 

눅 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의 곁에는
많은 이웃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들이 우리의 좋은 이웃으로 찾아오기를 기대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좋은 이웃이 되어 다가가야 합니다.우리의 이웃에 즐거워하는 자가 있으며, 우리 이웃에 우는 자가 있습니까? 내 입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십시오.

이웃을 내 입장에 맞추려 하지 말고 내가 이웃의 입장을 이해하고 맞추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3.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채 하지 말라.

 

우리가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 참석을 하였다가 나중에 그 모임이 파할 때가 되면 좋았다기보다는 힘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의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마음을 서로 같이 해 보십시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바울은 16절에서 세 가지 유형을 따라 우리에게 낮은 자리를 권합니다. ①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라. ②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 ③스스로 지혜 있는 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교만한 자리가 아닌 겸손한 자리를 차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왜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느냐고요? 그 배후에 깔려 있는 교만한 생각 때문 아닐까요? 자기를 높이며 자기를 들어내고자 하는 생각이 깊게 배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거스틴. 교만은 천사를 마귀로 만드나, 겸손은 사람을 천사로 만든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낮추며 겸손할 때 비로소 이웃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을 것이나 마음에 교만한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되면 그때부터 화목이 깨어지고 불화가 생기는 겁니다.

 

어떤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의 생각에는 자기 아내의 청각(聽覺)에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이 여겨졌습니다. 아내가 자기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똑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겨우 알아듣는 것 같아서 남편은 아내 모르게 아내의 청각을 한 번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때마침 아내가 화장대 앞에 앉아서 화장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남편은 멀찌감치 앉아서 일부러 신문을 보는 척 하면서 아내를 향해 물었습니다.

여보, 내 목소리가 들려요? 그러나 아내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는 여전히 신문을 보는 척 하면서 아내를 향해 다시 물었습니다. 여보, 내 목소리가 들려요?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아내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남편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아내 등 뒤로 바짝 다가가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보! 이제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요? 그러자 아내는 귀찮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들린다니까요. 당신은 내가 이미 꼭 같은 대답을 세 번씩이나 하는데도 모르고 계세요?

누구 청각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인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남편은 아내가 듣지 못한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도 인간관계에서 이와 같은 잘못을 범하는 때가 자주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채 하지 마십시다.
누가 틀렸습니까? 사실은 내가 틀렸을 수도 있는 줄 알아야 하며, 다른 사람이 부족하게 보입니까? 나는 더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할 때 자신을 낮출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공동체를 잘 가꾸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낮은 자리를 항상 먼저 차지하여야만 합니다.

성경에 보면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제일 큰 자라고(마 11:11) 칭함을 받았던 세례 요한도 자신을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님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였습니다.


막 01:0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사도 바울 역시도 자기를 지극히 작은 자 곧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 같다고 자기 자신을 언제나 낮은 모습으로 평가하여 지냈습니다.

 

고전 15:0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0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어느 마을에 두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모두가 장애자로서 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고, 한 사람은 걷지를 못하는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들은 일을 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없이 한 움막에 거하면서 걸식으로 서로 협력을 하며 살았는데 맹인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고서 앉은뱅이의 다리 역할을 했고, 앉은뱅이는 맹인의 등에 업혀서 맹인의 눈 역할을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두 거지가 서로 협력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그들을 매우 동정하여 이들이 구걸하러 올 때마다 음식을 기꺼이 내어 줌으로 두 사람은 나름대로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어느 해 그 지방에 큰 흉년이 들므로 인해 동네 사람들의 살림 자체가 그다지 넉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두 거지에게 돌아오는 음식의 양도 줄어들자 앉은뱅이는 마음속에 욕심이 생기면서 한 가지 꾀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의 밥그릇에 있는 음식을 조금씩 자기의 밥그릇에 슬쩍 슬쩍 옮겨 놓는 일인데 그 결과 앉은뱅이는 흉년임에도 배불리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반면 맹인은 늘 허기질 수밖에 없었는데 눈보라가 몹시도 휘몰아치는 어느 추운 겨울날 구걸을 하기 위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맹인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고 움막을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맹인은 매우 힘들게 느껴졌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앉은뱅이는 그동안 잘 얻어먹었기 때문에 몸이 많이 불어나 있었지만 맹인은 제대로 얻어먹지를 못해서 몸이 약해질 때로 약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순간 맹인은 현기증을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고, 맹인의 등에 업혀져 있던 앉은뱅이도 역시 나동그라져서 그 길로 두 사람은 눈보라 추위에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한 때 두 사람은 서로 더불어 협력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앉은뱅이의 마음속에 자신만을 위한 욕심이 생기면서부터 이웃의 틀이 깨어져 마침내 두 사람 모두가 죽음이라는 결과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09:09~13절에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곁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먹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세리와 죄인들이 가까이 나올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높은 곳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낮은 곳에 처하는 생활, 섬기는 모습을 친히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교제를 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12월에 이웃사랑을 회복하면서 한 해를 복되고 은혜롭게 마무리 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