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0년 말씀

죄악의 갈등 속에서 해방되었습니까?(롬 07:15~2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0. 1. 23.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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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명대 중기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 1472~1529] 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특별히 도둑이 들끓고 전쟁이 끊임없던 시대였는데 하루는 그의 제자 왕기(王畿)가 자기의 스승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이 도둑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 그때에 왕양명은 대답하기를, 내게는 더 큰 문제가 있느니라. 제자는 선생님, 무슨 문제라는 말입니까 라고 묻자 왕양명은 내 마음의 도둑을 잡는 문제다. 라고 했습니다.

또 전쟁이 한참일 때 그 제자가 나아와서 다시 물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왕양명이 내게는 더 큰 문제가 있느니라. 고 하자 그 제자가 선생님 무슨 문제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왕양명은 그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하기를 그것은 내 마음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이다.

그는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가 인간의 내면의 문제라는 사실을 직시하였던 겁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의 내면의 영적 전쟁터를 가장 투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구절들이(18, 19, 24절) 있는데 그 내용들을 읽어보면 정말 우리의 갈등을 대변하는 말로 느끼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죄고, 이 죄가 눈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악 아닙니까? 그러나 이 죄의 고통보다 더 심각한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율법입니다.
아니 율법이 고통이라고요? 그러면 율법이 혹 잘못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실제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완전한 법입니다.
그런데 왜 이 율법이 고통스럽습니까? 율법 자체가 잘못되어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겁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공개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하여 이 시간 우리도 자신의 모습을 말씀 앞에 적나라하게 비추면서 말씀의 의미를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1. 사람은 누구나 선과 악의 충돌로 인한 갈등을 겪습니다.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오늘날 사람이 사용하는 부정적인 단어 중 갈등(葛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칡넝쿨과 등나무가 서로 얽혀 있는 것과 같이 일이 자꾸만 까다롭게 꼬이고 뒤엉켜서 잘 풀리지 않는 상태를 비유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갈등이라는 것은 서로가 불화하며 다투는 것을 강조할 때 쓰는 말이지요.
우선 사람은 선택의 문제를 놓고 갈등을 하게 됩니다. 직장 문제로부터, 학교와, 결혼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떤 선택을 할까를 놓고 갈등을 많이 합니다.

때로는 선과 악에 대한 심리적인 갈등, 불가능한 일, 괴로운 일로 인한 갈등, 그 외에도 사회 계층 간의 갈등, 귀천의 갈등, 지식수준의 갈등, 남녀 간의 애정적인 갈등, 신앙적인 갈등을 하지 않습니까? 곧 우리의 삶 자체가 갈등의 연속인 것입니다.

 

실제 사람이 갈등을 느끼게 되면 그때부터 마음이 서서히 무너져 가정생활, 사회생활, 직장생활, 대인관계가 무척 어렵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다 갈등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이 겪고 있는 문제 중의 문제요, 고민 중의 고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 모두가 기가 막힐 갈등과 고민과 괴로움을 안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있는
두 가지 본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가 선을 행하고 싶은 본능 때문에 착한 일을 하고 싶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고, 병든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그런 심성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악을 저지르고 싶은 본능도 있는데 이것 때문에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고, 사고를 치고 쉽고, 해서는 안 될 행동도, 욕도 막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고는 싶은데 막상 실천해 보면 잘되지를 않고, 용서는 하고 싶은 데도 잘 안 되며,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도 지내놓고 보니 죄를 지은 결과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사탄이 들어와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죄를 지으니 악이 들어오고, 결국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할 때 악하게 창조하지 않고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영원히 사는 존재였고 또한 죄가 없는 에덴동산에서 살아왔던 존재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왜 악이 있는 겁니까? 이 죄가 들어온 후로부터 인간에게 악한 본성이 생기기 시작하여 두 가지 본성이 공존하게 됨으로서 서로 대적하고 싸우게 된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갈등입니다.

자신에 관한 문제는 자신이 제일 잘 알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자신이 잘 알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나는 왜 이럴까? 내가 왜 그랬지? 아! 난 안 되라는 말을 종종 하는데 즉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잘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은 자꾸 하는 것, 죄를 짓고 싶지 않은 데 자꾸 죄를 짓게 되는 것 때문에 괴로운 것 아닙니까?
죄를 행함으로서 주어지는 달콤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쾌락과 이익입니다. 이상하게도 하지 말라는 것은 더 하고 싶고, 짓지 말라는 죄는 더 짓고 싶고, 죄를 짓고는 은밀하게 숨겨 버리나 그러한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내 속에 있는 성령님은 절대로 죄를 합리화하지 않고 정죄합니다.
양심은 마비될 수 있으나 그러나 성령님은 마비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내가 이 죄를 토할 때까지, 포기할 때까지 성령님은 내 안에서 탄식하고, 신음하며, 나로 갈등하게 합니다. 이것이 선과 악으로 인한 거룩한 갈등이요, 신앙인이 겪는 갈등인 겁니다.

 


 2. 갈등 탈출은 자기를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알 때 가능합니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그는 위대한 사람, 모든 것을 다 이룬 완벽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정작 바울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고전 15:0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또한 바울은 자기를 평가하기를, 이미 구원을 받았고 주님의 종으로서의 자신을 주께 쳐서 복종시키는 생활을 하면서도 되돌아보면 여전히 자기에게는 옛사람이 살아 있어 자신을 괴롭힌다고 고백합니다.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루아침에 어떤 마술적 변화가 이루어져서 내 삶의 인격이 완전히 변화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렇게 된다면 야 좋은 일이겠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중생을 하였음에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오히려 죄 때문에 고민하는 때가 더 많습니다.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바울의 이 고백 얼마나 솔직한 자기 평가입니까? 바울은 그의 삶에 있어서 어디론가 끌려가는 또 하나의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것이 바로 죄이며 죄가 아직도 자기를 다스리며 주관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놓고 말하기를,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인간의 문제는 밖의 문제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성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외형적 환경을 바꾼다거나 구조를 개선할 때 그것은 약간의 도움은 줄 수 있지만 그것들 때문에 사람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단연히 나의 모순, 나의 갈등, 내 속에 일어나고 있는 처절한 영적 전쟁의 원인은 내 속에 거하고 있는 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한 줄로 착각합니다만 그러나 자기 내면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오히려 추악한 존재이며 인간성 속에는 끊임없는 죄의 야망이 용암 끓듯이 부글부글 끓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3. 모든 갈등의 해결자는 예수님입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의
인생 갈등을 해결해 주시는 분인 줄 알고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있습니다. 누가 갈등을 해결해 주신다고요? 나의 죄 문제까지도 보혈로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모든 갈등들이 해결되는 치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5절에서 자신의 갈등과 우리의 갈등까지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는 겁니다.


롬 08:0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갈등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즉 갈등을 생기게 하는 죄를 없애주셨다는 말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님의 법으로 우리의 갈등을 완전히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갈등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발목잡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갈등으로 인한 신앙생활의 이상 징후를 한 번 살펴볼까요?

 

①교회에 나가기보다 집에 있기를 더 좋아 할 때.

②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보다 세상일을 더 편히 여길 때.

③따뜻한 사랑보다 냉정한 비판에 더 편중할 때.

④성경보다 소설 읽기를 더 좋아할 때.

⑤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기회를 선용하려는 것보다 다른 것을 더 좋아할 때.

⑥교회에 바치는 헌금보다 오락과 향락을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쓸 때.

⑦예배시간에 깨어있지 못하고 조는 경우가 더 많을 때.

⑧봉사보다 불평을 더 많이 할 때.

⑨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보다 정죄하기를 더 좋아할 때.

⑩용서하기 보단 원수 맺기를 쉽게 할 때.

⑪거룩한 생활보다 세속적인 생활을 더 좋아할 때.

⑫십일조와 그 밖의 헌금들을 영원한 보배(하늘의 축복)를 위하여 쓰지 않고 잠깐 후에 못쓰게 될 것을 위하여 긁어쥐고 낭비해 버릴 때.

 

성도 여러분! 인생의 날 수는 내가 결정할 수 없지만 인생의 넓이와 깊이는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얼굴 모습은 내가 결정할 수 없지만 내 얼굴의 표정은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날의 날씨는 내가 결정할 수 없지만 내 마음의 기상은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갈등하거나 고민할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일들로 인하여 염려하며, 고민하며, 갈등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 갈등을 탈출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주인공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의 인물로 유명한 조지 뮬러는
그의 일평생 동안 좌우명이 유명하여 여기 소개합니다. 앞서지 말자. 결코 앞서지 말자. 하나님보다, 기도보다, 성령님보다 앞서지 말자.

이제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선의 뿌리를 두셨고 구원의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나를 덮고 있던 어둡고 무거운 그림자들이 하나씩 하나씩 벗겨 나가고, 갈등이 풀려나가고, 영적 침체가 떠나고,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회복하게 됩니다.

 

요 0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마틴 루터의 말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완성된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이 실수를 하며 갈등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 선한 일만 행하길 원하지만 욕망이라는 죄악이 마음속에서 꿈틀대며 선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 자꾸 죄를 짓게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도 종종 넘어지고 시험을 당하고 쓰러지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갈등으로부터 해방되어 살아가는 생활이 얼마나 복된 생활입니까? 지내놓고 보면 우리는 사소한 것들 때문에 갈등할 때가 참 많았고, 주변을 보면 때로는 사소한 갈등들 때문에 목숨을 거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좀 오래 된 이야기죠.
서울 잠실 어느 아파트에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과 여학생이 부모가 사귀는 것을 반대한다고 둘이서 15층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했습니다. 왜 이럽니까?

어떤 교회는 간혹 오전예배 때 복음성가를 불러도 되느냐? 안되느냐? 부른다면 어느 곡들을 어느 정도로 불러야 하는가? 로 성도들이 열을 올리며 갈등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질의 문제는 놔두고 엉뚱하게 비본질적인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문제로 갈등하며 분쟁과 다툼을 일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삶의 우선순위를 세상의 것에 두면 세상 것을 잃어 버렸을 때에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것 때문에 목숨 걸고 갈등하며 인생을 날리고 맙니다.